서울에 사는 대학생 조아무개(23·연세대4)씨는 지금도 지난 5월30일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 끔찍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국가권력이 한 개인에게 그런 ‘폭거’를 저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당시 조씨는 옷을 사러 남대문시장으로 향하다 서울역 앞에서 전경의 제지를 받았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아무런 생각없이 학생증을 보여준 조씨는 “잠깐 조사할 것이 있다”는 말과 함께 ‘닭장차’에 실렸다. 서울역 집회에 대학생의 참가를 봉쇄하기 위한 경찰의 격리작전이었다. 조씨는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무작정 동대문경찰서로, 노량진경찰서로 이리저리 짐짝처럼 실려다녀야 했다. 조씨는 밤새 조사를 받으며 온갖 질문공세를 받았다. “집안 환경이 어떠냐” “학교생활은 어떠냐”는 등 엉뚱한 질문만 쏟아졌다. 심지어 호출기 비밀번호 등 개인의 사생활까지 캐묻기도 했다. 극도의 불안과 긴장, 초조함 속에 밤을 새운 조씨는 다음날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경찰서를 나설 수 있었다.
돈 물어주게 된 ‘불심검문’
최근 시민단체인 인권운동사랑방에는 조씨를 포함해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 5명이 모였다. 국가의 불법행위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지난 11월21일 인권운동사랑방의 도움을 얻어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국가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인신을 구속했으니 이에 대한 피해보상으로 1인당 500만원씩 2500만원을 청구한다는 내용이다. 이들 다섯명 가운데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은 채 전경에게 먼저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다 연행된 이도 있었다.
이들의 소송대리인 김도형 변호사는 “신청인들에 대한 당시 경찰의 행위는 명백한 경찰직무집행법 위반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불법행위”라고 소송제기의 배경을 밝혔다. 불심검문에 대한 국가배상은 이미 서너차례 이뤄졌다. 모두 불법연행이 인정돼 국가가 배상했다. 최근에도 지난 5월30일 집회와 관련해 불법연행됐던 학생이 1심에서 100만원을 배상받았다.
“이런 소송은 앞으로도 경찰의 패배로 끝날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불법적인 검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혈세를 불필요한 경찰력에, 배상금에 이리저리 낭비하고 있는 꼴이죠. 시민의 신체를 함부로 구속하는 국가기관의 행태를 뿌리뽑기 위해서도,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도 이런 소송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인권은 교도소나 양심수, 시국사건 등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나 무슨 주의주장 때문에 핍박받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일상 속에서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직접적인 인권문제다. 조씨의 경우처럼 최근 잇따르고 있는 국가배상 청구소송은 권력을 상대로 한 국민의 권리의식, 특히 인권의식이 한단계 성장했음을 실감케 한다.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도 경찰의 불법체포·감금행위에 따른 한 시민의 피해에 대해 지난 11월18일 국가를 상대로 1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중이다. 성남시에 사는 김아무개(34·무직)씨는 지난 9월18일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했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18시간이나 구금됐다 풀려났다. 이전 같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한 사안이지만 김씨는 자신의 인권과 명예가 훼손된 점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인권의식은 대부분 자신의 일인 경우에만 발현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사람의 일인 경우, 더구나 그것이 ‘남의 집안일’인 경우에는 대부분 인권을 ‘유예할 수 있는 것’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게 우리 사회 인권의식의 현주소다. 지난 11월 초 서울 서대문구에서는 어머니를 상습 폭행하던 아버지를 아들이 밀쳐 숨지게 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이 집안에서의 폭행은 수없이 빚어졌지만 관할 파출소에 이를 알리거나 신고한 동네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되는 가정폭력사건 가운데 이웃주민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피해당사자인 여성이 직접 신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 꼼짝마!
인권문제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적용될 경우에도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은 ‘대학 들어간 뒤’로 쉽게 유예시켜 버린다.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는 지난해 서울시내 중학교 세곳의 학생선도규정을 조사해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른 학교는 더이상 조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규정이 비슷한데다, 너무나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옭죄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 교수는 서울 ㅎ중학교의 무기정학 규정 가운데 ‘허가없이 단체(서클)에 가입하여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학생’의 경우를 예로 든다. “자그마한 모임을 만들어도 학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비현실적인데다 학교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많습니다. 지금의 학생선도규정은 한마디로 ‘너희들 꼼짝마’ 수준입니다.” 요즘 ‘학생인권선언’을 두고 말이 많지만 이미 한국은 지난 91년 ‘유엔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을 비준했다. 태아부터 18살 사이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는 조약이다. 고 교수는 “이 권리조약만 우리 사회가 제대로 지켜도 새로운 학생인권선언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는 12월10일로 50주년을 맞는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자유권적 기본권과 함께 사회권적 기본권도 인정하고 있다. 실업보호 등 사회보장적 성격의 인권도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를 인권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수준에서 지난 11월26일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 ‘개혁을 위한 시민행동’ 소속 18개 시민단체가 주창한 ‘국민복지권리선언’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이들 단체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인 실업자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부도에 다름아니다”라며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보장제도 확충으로 대량실업위기를 극복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이제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 실업과 사회보장 문제를 인권문제로 끌어올린 첫 선언으로 평가될 만하다.
우리 사회 인권문제와 관련해 한 인권운동가의 주장은 되새길 만하다. “인권은 이제 더이상 제도나 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육의 부재와 그에 따른 의식부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인권교육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기성세대는 그 업을 아이들에게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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