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lags of our fathers
전쟁에 휘말린 인간의 이면을 바라보면 자주 걸작영화가 탄생한다. [디어헌터]가 그렇고 [지옥의 묵시록]이 그렇다. 걸작은 아니더라도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대흥행작이 되기도 한다. 전쟁영화는 극한 상황 속에서 종종 피어나는 휴머니즘에 주목해 인간 보편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이념을 지향하는 이들은 수탈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의 본모습을 가리는 교묘한 지배 이데올로기라 휴머니즘을 비판하기도 한다. 내키진 않지만 마땅히 비판할 수는 없는 찜찜한 대상 말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휴머니즘은 냉혹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가장 정당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간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부조리를 해소하는 일종의 자기 합리화인 셈이다. 하긴 휴머니즘 없는 마르크시즘은 그저 탁월한 이론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에 새우등 터진 우리 입장에서 이 영화는 배부른 하소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를 보고 ‘악랄한 제국주의 패전국의 물타기 시도’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도롭프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모두가 상처 입는 게임. 전쟁은 그런 것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이 보여주듯 전쟁에 영웅 따위는 없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은 그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악몽일 뿐이다. 한 번의 전쟁은 한 세기 이상 상처를 남긴다. 아직 ‘이성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ps. [요코 이야기]. 언제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자와 아이들이다. 종군위안부가 그렇고 식민지에서 성폭행 당하는 패전국 소녀가 그렇다. 민족이나 국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소설에 대해 꾸며낸 이야기라 비판하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다. 교재 채택 사실을 알지도 못했던 한국 정부의 무능을 탓할 일이다.
1. 알고 보니 같은 전투를 배경으로 미군 입장에서 [아버지의 깃발]을, 일본군 입장에서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를 쌍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 편 다 수입이 되었다는데 아마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개봉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일본군의 시각으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를 개봉한다는 건 자살행위다. 영화는 [이오지마]쪽이 더 좋다는 평.

2. 클린트 이스트우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딱 그 나이만큼의 속도로 이야기한다([용서받지 못한 자][밀리언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대작 영화도 마음대로 주무른다. 거장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다.
3. 감독, 각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음악도 직접 작곡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미 카네기홀에서 재즈피아노 연주회를 열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음악가다.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The Blues]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피아노 블루스]에는 생전의 레이 찰스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블루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내내 둘은 익살맞고 애정 어린 표정을 잃지 않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대충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어렸을 때 집에서 혼자 블루스 음악을 듣곤 했는데 백인 꼬마가 블루스를 듣는다며 어른들로부터 ‘정신나간 녀석’이란 소리를 듣곤 했지요.”
역시 타고난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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