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끝날 수 없는 시다의 노래
어부의 딸 신옥순
지난해 여름을 떠올려본다. 더웠는지, 비가 많이 왔는지 기억이 아른아른하다. 그래, 맞다. 내게 지난해 여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너무 바쁘셨다. 아버지는 서울 회기역 근처에서 수출하는 옷을 만드는 보세공장을 다니셨다. 어머니는 ‘니네 아버지는 열두시 땡이다’라고 하였다. 늘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초인종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만 저녁을 차려주고 당신은 굶고 있었다. 아랫목 이불 밑에 밥공기를 묻어두고 통금과 함께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나는 부모님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를 닮았다
보세공장은 문을 닫았고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머리가 굵어지고, 나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스물이 넘어서는 아예 내가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경남 창원에 내려가 공장에 다녔다.
지난해 1월에 다시 서울로 왔다. 15년 다니던 공장을 때려치우고 괴나리봇짐 달랑 지고 서울로 왔다. 형제들은 결혼을 해서 모두 집을 떠난 뒤다. 이곳이 여섯 식구가 한방에 모여 시끌벅적 싸우다 머리를 포개며 잠이 들던 우리 집인가? 흔적마저 사라진 낯선 집에 돌아왔다.
흰머리 성성한 부모님만 남아있다. 그제야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눈, 코, 입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도 알았다.
딱 한 해전 유월이다. 서울에 온지 반년도 되지 않은 유월.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채 다 익히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아프셨다. 밥도 제대로 드시지 못할 정도로 심한 감기를 앓으셨다. 감기겠지 하며 보름을 보냈지만 낫지를 않아 큰 병원으로 갔다. 숱한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했다. 가족들의 온갖 희망을 뭉갠 채, 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는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아버지 곁에 있었다. 지금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내게 아버지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입원, 수술, 중환자실, 일반병실, 다시 중환자실. 결국 아버지는 영안실로 갔다.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놔둔 채 영안실로 가셨다.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가기 전날, 아버지는 목욕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내 손으로 관장을 해드렸고, 다 벗은 아버지를 씻어 드렸다. 그 날 아버지의 얼굴만이 아니라 몸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있게 한 그곳까지 닦아드리며, 내가 아버지와 닮았다는 걸 다시 깨우쳤다.
다음날 새벽 4시,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잠에 빠져있던 나를 아버지는 깨웠다. ‘도엽아! 도엽아!’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끼워드렸고, 그 뒤로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은 그렇게 그렇게 내게서 사라졌다. 아니 지워졌다. 다시 유월이고, 그 유월을 잊고 싶어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려고 하니 약속한 일이 산더미다. 연재하는 글이 있어 부랴부랴 인터뷰를 했다.
생각만 해도 아픈 이름이여
신옥순. 마흔 여섯. 모든 선이 굵고 막힘이 없이 확 트인 얼굴이다. 훤한 이마와 넓은 미간은 누구라도 넉넉히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큰누님 같다. 눈은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을 것 같고, 입술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자신감에 차 있다. 그 자신감은 볼의 곡선과 함께 여유로움으로 나타난다. 여유로운 인상에는 한껏 장난스러울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배여 있다. 말을 건넨다.
“가장 아팠던 기억은 뭐예요?”
신옥순은 잠깐 생각을 하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잠시 뒤 눈에 노을이 진다. 그리고 기다리던 입은 열리지 않고, 눈물이 마중 나온다.
질문을 한 내가 민망해진다. 무엇이 그의 입을 닫고, 눈물샘을 열게 했는가? 어떤 기억이 있기에.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물 잔만을 만지작거렸다. 눈물은 한참동안 멈추지를 않는다.
이럴 땐 침묵을 해야 한다. 섣불리 위로를 하려고 해도 안 된다.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때까지 울어야한다.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감정이 다시 몸 속 깊이 내려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였다.
“재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를 떠올리니……. 눈물이 나요.”
그 순간 나도 울컥한다. 지난해 유월의 기억이 나를 뒤흔든다. ‘아버지’ 그 한마디만 들어도 내 가슴은 지진이 일어나고 벼락이 친다. 인터뷰 자리가 아니었다면 함께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싶다. 이미 내 몸은 축축이 눈물로 젖어든다.
신옥순은 충청남도 대천해수욕장 아래에 있는 장항이라는 어촌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곳에서 태어나셨네요?”
“아름답죠. 해질녘 노을이 지면 온천지가 주홍빛으로 물들어요. 바다도 배도 갯벌도 마을도 노을에 다 빼앗겨요. 노을은 보고 또 봐도 지겹지가 않아요.”
아마 그의 마음도 노을을 닮았으리.
신옥순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배를 타고 나가면 한 달 넘게 바다에 산다. 만선의 깃발을 단 아버지의 배가 들어오면 온 식구가 항구로 간다. 배에서 꽃게랑 생선들이 내려지면 어머니는 광주리에 담아 장에 가신다.
사공의 뱃노래
신옥순은 오남매의 둘째 딸이다. 위로 언니, 밑으로 남동생, 그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 더 있다. 남매들은 아버지의 배가 들어오면 그물에 매달린다. 그물에 매달려 미처 떨어지지 않은 고기를 발라낸다. 끊어진 그물을 잇는 일도 한다. 어촌에서 그물을 잇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생활이다. 아이들에게는 놀이의 하나이고, 밥값으로 당연히 해야 할 몫이다.
배에서 내린 아버지가 따로 챙겨오는 것이 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께 꾸러미를 하나 내놓는다.
“이건 우리 옥순이 거야하며, 큰 새우 있잖아요, 대하라고 하는 거, 그게 바다에서 잡히면 따로 말려서 챙겨 와요. 제가 어려서 잔병치레가 많았어요. 늘 골골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아버지는 약한 옥순이가 얼마 못 살 것 같다고 특별히 아껴주고 예뻐해 줬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둘째 딸에게 바다에서 말려온 영양가 많은 대하를 끼니마다 먹였다. 밥 대신 먹은 대하는 영양가 이전에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있다. 옥순의 몸은 점점 좋아졌다.
바다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허약한 옥순이를 늘 옆에 끼고 다녔다. 대폿집에 가도 옥순이를 데려갔다. 옥순은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옆에서 놀았다.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할 때쯤 옥순은 술집 구석방에서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잠든 옥순을 업고 좁은 논두렁을 걸어 집으로 온다. 취한 아버지는 옥순을 업고 오다가 무논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넘어져 옥순과 함께 논에 뒹굴기도 했다.
진흙투성이가 된 아버지는 다시 옥순을 업고, 노래를 부른다.
‘사아고옹의 뱃노래에가아 가아물거어리면 삼학도 파도 기피 스며어드으느는데에 부우두우에에 새에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꼬부라진 혀에 노래가 흐른다.
넘어지다 다시 일어나고, 노래 한가락 뽑다 다시 넘어지고를 되풀이 하다 달이 산 위로 한참을 올라오면 집에 도착한다. 술에 절어 감내가 나는 아버지의 입에서 흐르는 노래에 옥순도 함께 취한다. 아버지의 등짝은 참 따뜻했다.
집에 들어선 아버지는 옥순이를 내려놓고 툭 툇마루에 쓰러져서 코를 곤다. 옥순은 아버지의 옷과 고무신을 벗기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는다. 논에 빠져 진흙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씻겨 새 옷을 입히고, 이부자리를 깐다.
병을 달고 살았던 옥순이는 아버지 사랑에 차츰 개구쟁이가 된다. 고무줄뛰기나 소꿉장난보다는 잣치기나 구슬치기 공차기 같은 놀이를 더 좋아했다. 옥순이의 꿈은 군인이 되는 거였다. 씩씩하고 절도 있고 책임감이 있어 보이는 군인의 모습이 너무 늠름하고 부러웠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삼백예순날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언니는 가난한 집안의 숟가락 하나를 덜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미용기술을 배워 돈을 벌었다.
망망대해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붉다 못해 검었다. 목덜미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고, 손은 그물 잡이에 굳은살이 배여 손금도 지문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어머니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새벽부터 장에 나가 해가져야 집에 들어왔다.
중학교를 마친 옥순은 결심을 한다. 부모님이 이토록 자식을 위해 고생하는데, 딸로서, 언니로서, 누나로서 그냥 공부만 하며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 서울에 가 돈을 벌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말을 했다.
열여덟 옥순은 서울로 왔다. 뒤늦게 옥순이가 서울로 간 것을 아신 아버지는 며칠 동안 잠도 주무시지 않고 우셨다. ‘그 어리고 약한 애가 무슨 돈을 번다고 서울로 보내냐’며 어머니께 성을 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직접 서울로 올라와 설득했지만 옥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약수동에 사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 방을 세를 내어 옥순을 살게 했다. ‘힘들면 언제든지 내려오렴.’
옥순은 결심한다. ‘내가 잘 살아야 한다. 아버지 마음 아프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꼭 성공할 거야
아버지의 기억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밤을 지새워도 다 할 수 없고, 책으로 써도 다 말하지 못한다. 일흔 셋의 길지 않은 생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옥순의 곁을 떠났다. 아버지와 나눈 아름답던 시간은 이젠 아리고 슬픈 생채기로 남아있다.
“결혼하고 힘들게 사는 모습만 아버지한테 보여 준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파요. 제 사는 모습 안 보이려고, 어려운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병치레만 한 둘째 딸이 이렇게 떵떵거리며 산다고 한 번, 꼭 한 번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허망하게, 너무 빨리 돌아가셨어요.”
장항에서 남동생과 함께 살던 아버지가 병원을 찾은 것은 이미 수술도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였다. 췌장암이다. 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옥순이 곁을 떠났다.
눈을 감기 전 아버지는 옥순이의 손을 잡고 말을 했다.
“옥순아! 너는 성공할 거다. 꼭 잘 살 거다. 잘 살 거야.”
벌써 두 해가 되었지만, 신옥순은 아버지가 떠오르면 눈물이 먼저 나선다.
이제 서울로 온 시다 옥순이의 삶을 쫓아가본다.
서울로 온 신옥순은 동대문 연세상가에 있는 잠바집에 시다로 취직을 한다. 이 시절을 ‘끔찍했다’고 기억한다.
당시 봉제 공장은 ‘오야’로 불리는 미싱사의 책임 아래 시다들이 일을 했다. 객공이라 불리기도 한 미싱사는 월급제나 일당제가 아니라 자신의 생산량에 따라 수입이 정해졌다.
미싱사의 수입은 자신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옆에서 보조해주는 시다와 손발이 맞지 않으면 수입을 올릴 수 없다. 쉼 없이 재봉틀이 돌아가게 하는 것은 끊이지 않게 원단을 재봉바늘 밑에 깔아주어야 하는 시다의 역할이 크다. 눈치가 빠르고 손놀림이 잽싼 시다를 둔 미싱사는 그만큼 수입이 늘어나게 된다.
시다의 노래
미싱사는 알게 모르게 옆 재봉틀에 앉은 동료와 경쟁을 한다.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는 미싱사의 경우 시다가 자신의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면 욕은 기본이고 폭력까지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제 오야는 손이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빨랐어요. 누구한테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했고요. 제가 조금이라도 손이 늦으면 뭐가 막 제 얼굴로 날아와요. 실 꾸러미, 가위, 원단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 가리지 않고 던져요. 맞으면서 일을 배웠어요.”
맞지 않으려면 정신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오야의 손을 따라갈 수가 없다. 새벽 다섯 시에 집에서 나가야 한다. 오야가 출근하면 곧바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꼬이면 온종일 눈물을 달고 하루를 보내야한다. 어떤 날은 점심 도시락을 먹을 짬도 없다. 그날 일을 공장에서 다 하지 못하면, 일거리를 집에 싸들고 와서라도 마무리를 해야 한다. 통금이 있을 때라 자정 전에 집에 가야 했다. 집에 오면 밤 열두시다. 지친 몸 잠들지 못하고, 자취방 침침한 백열등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며 쪽가위로 다하지 못한 공장 일을 한다. 그러다보면 다시 새벽. 별을 보며 집을 나선다.
약수동 집에서 동대문에 있는 공장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미싱사는 생산량이 많으면 가져가는 돈이 많아지지만, 시다들은 아무리 많이 일을 해도 정해진 돈만 손에 쥐어졌다. 1979년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 월급은 십만 원 남짓으로 기억한다. 방세가 삼만 원이었고, 먹을 것과 연탄을 사는 생활비가 또 삼만 원정도 든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 고향에 보낼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을 지경이다. 결국 하루에 몇 시간씩 걸어서 출퇴근을 하였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동생들 학비를 만들어 고향으로 보냈다.
새벽에 갈아두고 온 연탄은 자정이 되어 퇴근하면 꺼지기가 일수다. 한 손에는 공장에서 다하지 못한 일거리를 천에 묶어 싸들고, 또 한 손에는 연탄 두 장을 새끼줄에 묶어 들고 약수동 고갯길을 올라 집으로 온다.
불이 붙은 탄을 사오면 비싸기 때문에 숯에 불을 피워 연탄불을 살리고, 냄비에 밥을 한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공장에 살다시피 하니 반찬을 만들 짬이 없다. 결국 고추장에 밥을 비벼 한술 뜨다보면 어느새 잠이 들고 만다. 새벽에는 뜨거운 물에 밥을 한 술 말아먹은 뒤 도시락을 챙겨 공장에 간다. 점심은 일에 쫓겨 허겁지겁 먹어야 했다. 어린 옥순의 위는 견뎌내지 못했다.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돈 쓸 시간이 없어요. 일요일? 그런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일한 기억밖에 없어요.”
시간이 흐르자 미싱사는 시다 옥순과 손이 맞아 가기 시작했다. 미싱사는 옥순이가 기술을 배우면 떠나갈까 두려워했다. 미싱사는 퇴근을 할 때 재봉틀 안쪽의 북집(재봉틀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실 꾸러미의 집)을 빼가지고 간다. 자신이 없을 때 미싱을 배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질 사나운 미싱사 옆에서 싫은 소리하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는 신옥순을 눈여겨 본 사장은 그를 따로 불러 보조 미싱사로 자리를 옮겨준다. 일 년 반 만에 시다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오년이 지나 신옥순도 미싱사가 된다.
85년에 결혼을 한 신옥순은 인천으로 간다. 보증금 이십만 원에 달세 사만 원을 내는 신혼방 한 쪽에 재봉틀을 가져다 두고 미싱 일을 계속했다. 큰 아들은 낳자마자 서울의 시댁에 맡겼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기뻤고, 다음으로는 결혼 오년 만에 내 집을 살 때가 기뻤어요. 한 푼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는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물네 평 아파트를 사서 입주한 날, 정말 기뻤고, 뿌듯했지요.”
신옥순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 집의 가격을 끝자리까지 기억하고 있다. 삼천사백오십만 원.
이제 삼년만 더 벌면 이 일을 그만해도 되고, 더 큰 집을 사서 이사를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부만 하던 남편이 주물공장을 했는데, 남편의 사업이 계속 꼬여갔다. 재봉틀을 밟아 번 돈이 고스란히 남편의 사업 밑천으로 들어갔다. 결국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남편은 사업을 접어야 했다.
허망하게 끝낼 수 없는 노래
신옥순은 지금 인천 가정동에서 서울 대림동에 있는 봉제공장으로 출근을 한다.
“저희 미싱사들 너무 힘든 시절 이겨내며 열심히 일을 했어요. 사오년 전부터 중국제품이 들어오면서 너무 큰 타격을 받고 있어요.”
신옥순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집은 인천이고 서울 대림동에 가서 일을 한다. 일을 마치면 다시 동대문으로 와서 고급봉제기술을 배운다. 교육을 마치고 다시 인천 집에 돌아가면 자정이다. 고되지만 지금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위기의식을 가진다.
신옥순의 이 같은 억척은, ‘한국이라는 브랜드로 세계 1등의 옷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봉제는 우리 경제를 이끌어온 기술이잖아요. 이렇게 허망하게 값싼 중국 제품에 밀려 빛을 잃어가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그래서 다시 기초부터 일을 배우는 거예요. 단순히 밥벌이 기술이 아니라,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말을 할 수 있는 기술자가 되려고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라벨을 달고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그날을 준비하는 거예요.”
어느 정치인이 신옥순보다 더 우리나라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 어느 사업가가 신옥순보다 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 가위에 머리를 맞으며 일을 배운 시다 신옥순, 오늘의 신옥순은 너무 커 보인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린 신옥순은 사라지고, 당당한 내일을 준비하는 고급봉제기술자 신옥순이 내 앞에 앉아있다.
“아버지가 몇 년 만 더 살아계셨어도 제가 좀 더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병치레하는 약한 딸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살아가는 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주섬주섬 취재수첩을 정리하며 인터뷰를 마치려고 하는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봉제기술자에게 국가자격증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네? 뭐라고요?”
한국 경제의 ‘과거 대표선수’로 봉제기술이 기억되는 것은 억울하다. 미래를 책임질 국가대표선수가 되겠다고 나서는 신옥순 씨가 살아있지 않은가. 맞다. 봉제는 ‘사양 산업’이라고 버림받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 축적된 세계 으뜸의 기술을 버리는 게 옳은 일일까? 더욱 지원하고 살려 국가의 자산으로 발전시키는 게 ‘우리식 세계화’가 아닐까.
한국경제의 토대는 누구의 땀과 힘으로 이루어졌을까?
국가대표선수 신옥순
신옥순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가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아버지를 잊으려고 도망을 준비하고, 신옥순은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6월의 장미는 왜 이리 붉은지 모르겠다. 장미의 꽃말이 왜 사랑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왜 내게 굵은 눈물을 떨구게 하는지 정말 정말 모르겠다. 가시만 없어도 저 붉은 장미를 손바닥으로 훌쳐 삼키고 싶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가시가 없는 장미는 거짓이다. 아버지는 신옥순에게 가시처럼 살아있다. 붉은 장미꽃을 지켜줄 가시로 살아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