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월이 고비다.’ 구조조정과 실업을 둘러싼 노사정간 줄다리기가 1/4분기에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실업자가 200만명에 이르는 데다, 양대노총 위원장 선거를 전후해 노동계의 다양한 고용안정투쟁이 이 시기에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위 잇단 노사정위 합의 파기
정부가 느끼는 실업에 대한 부담감도 지난해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실업에 깔린 ‘정치적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쏟아지는 실업에 대해서는 온전히 현 정부의 책임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실업을 둘러싼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다각도로 펼쳐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갈등은 ‘노-정 대결’의 모습을 띨 것이라는 게 노사관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부는 2∼3월 노사관계를 뜨겁게 달구게 될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직접적인 당사자일 뿐 아니라, 5대 그룹 빅딜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게다가 노동계는 사회협약추진기구로 자리매김했던 노사정위원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정부를 꼽고 있는 터다.
분위기는 이미 험악해질 대로 험악해져 있는 상태다. 기획예산위원회가 노사정위 합의사항을 어기는 바람에 벌어진 한국조폐공사 파업사태에 대해서는 경찰력이 투입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조폐공사 사태는 지난해 9월 노사정위 차원에서 옥천조폐창과 경산조폐창을 2001년 통합하기로 한 합의사항이 파기되고 올해 3월 통합하는 것으로 앞당겨진 데서 비롯했다.
한국통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사정위 합의에 따라 2000년까지 8250명의 인원을 줄이기로 한 인원축소안이 지난해 12월17일 갑자기 1만5천명으로 두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노사간 격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조폐공사와 한국통신 두곳 모두 합의 파기에 기획예산위가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임금 4.5% 삭감, 퇴직금누진제 철폐, 유급휴일 축소 계획은 공공부문 노사관계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지난 1월8일 양대노총 산하 30여개 공공부문 노조들은 일제히 구조조정과 관련된 기존 계획의 전면 철회를 요구하며 강행할 경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금융감독위원회와 은행 노조들이 지난해 9월28일 총파업 일보직전까지 마주보고 달리던 때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노동계는 단계적으로 투쟁을 높여나간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민주노총은 2월 말까지 노사정위 참여와 총파업을 둘러싼 조직 내부의 의견 차이를 최대한 좁히면서 힘을 비축하는 시기로 잡고 있다. 2월6일 민주노총 최대조직인 금속산업연맹(조합원 18만명) 위원장 선거를 그 시작으로, 3월 직선 위원장 선거를 이를 마무리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지난해 남발한 총파업 전술은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둔다는 게 민주노총의 계획이다. 이에 맞춰 공공연맹·공익노련·민주철도연맹 등 조직통합 논의를 벌이고 있는 민주노총 3개 공공부문 산별연맹은 2월 말∼3월 초 다양한 고용안정투쟁을 집중시킬 예정이다.
한국노총 역시 ‘투쟁을 통해 2월 말 위원장 선거를 맞는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여차하면 97년 12월 대선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폈던 정책연합도 철회할 기세다. 정부에 대한 한국노총의 불만은 지난해 12월30일 한나라당과 정례 정책협의회를 구성하는 ‘외곽때리기’로 나타났다. △주 40시간으로의 법정노동시간 단축 △노조 전임자 임급 지급 보장 △담배산업 해외매각 반대 △정부투자기관 관리기본법 개정 등 굵직한 현안들을 관철하기 위한 지렛대로 한나라당을 활용할 뜻을 비친 것이다.
실업과 구조조정을 둘러싼 또 한차례의 노-정 대결이 원만하게 넘어갈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적은 편이다. 그동안 노사관계가 극한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 ‘소방수’ 구실을 해온 노사정위가 교원노조법의 국회 통과 이후 ‘사실상 임무가 끝났다’는 인식이 정부와 노동계 양쪽 모두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 이정식 기획조정국장은 “해체하든지, 환골탈태하든지 갈림길에 왔다”고 못박았다. 민주노총 이갑용 위원장이 “노사정위 탈퇴 여부를 3월 대의원대회에 상정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노동계의 투쟁이 2∼3월에 몰리는 것을 분리시키는 쪽으로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공공부문에서의 양대노총의 연대를 막기 위해 퇴직금누진제 철폐 및 임금삭감, 인원감축 수준 등을 탄력적으로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노총에는 ‘전임자 임금지급 보장’ 카드를, 빅딜 사업장이 몰려 있는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노사정위에서의 실업최소화를 위한 협의’ 카드를 낼 가능성이 높다. 전임자 임금지급 보장은 재선에 도전하는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의 핵심 공약인데, 노동법에서는 2001년부터 사용자가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줄 경우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고 보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무리한 강공책을 통한 ‘대결’보다는 ‘협력’으로 상황을 돌파하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사정위 김원기 위원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구속·수배 노동자 470명에 대한 사면을 김 대통령이 수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노동계 일부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번에도 노사정위가 다시 한번 ‘소방수’로 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노동계가 실업극복 방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 노사정위에서 전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노동시간 단축과 휴일·휴가 개편 문제는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는 파급력을 지닌 사안인 만큼 사회적인 쟁점으로만 떠오른다면, 노사정위가 나름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노사정위 산하 노사관계소위원회 공익위원을 중심으로 현행 44시간인 법정노동시간의 40시간으로 단축과 이에 따른 휴일·휴가제도 개편 방안을 1월 중순께 내놓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배제적 신자유주의 정책이 문제
하지만 이런 노력이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노사정위 한 관계자는 “경기가 곧 살아나는데 노동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느냐는 게 경제관료들의 정서”라며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사회적 목표로 떠오른 노동시간 단축이 논의조차 될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노동부의 반응 역시 일부 실무자를 빼곤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경북대 김형기 교수(경제학)는 “낡은 개발독재 모델에 집착하거나 노동배제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하려는 관료들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을 노사정위가 형해화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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