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창리 지하시설을 둘러싼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경수로 사업이 흔들리고 있다. 다소 성급한 감이 있긴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한-미-일 3국의 재원분담을 기반으로 한 케도(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체제의 붕괴 가능성’까지 제기할 정도다. 사실 금창리 문제로 미국이 경수로 1호기를 짓기 전까지 해마다 50만t씩 북한에 공급키로 한 중유를 못 주겠다고 나오고 북한도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핵활동 재개를 선언하면, 그 불똥은 곧 경수로사업으로 튈 수밖에 없다.
미국내 강경분위기가 문제
지금으로선 무엇보다 미국 내 강경 분위기가 문제다. 금창리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으면 대북 중유공급 예산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게 미국 의회의 분위기다. 미 행정부는 5월말까지 금창리 지하시설 의 핵의혹을 해소하고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억제하는 데 가시적 성과를 올려야 중유 예산을 의회로부터 타낼 수 있다. 중유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경수로 본공사 착수는 엄두도 못 낸다. 46억달러의 경수로 총사업비 가운데 약 10억달러를 기여하는 일본 정부도 미국의 강경 분위기에 편승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고무라 마사히코 일본 외상은 1월18일 “북한이 사찰을 계속 거부하면 미국과 일본의 북한 경수로 건설재원 지원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거듭 밝혔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국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하다. 정부 관계자들 은 지금이 지난해 6월과 8월의 북한 잠수정사건과 로켓 발사사건 때 못지 않은 위기국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더구나 정부는 32억달러에 이르는 경수로 분담비용을 전기료에 부담시키는 방안에 대해 국회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전기료를 통한 간접세 형식으로 비용을 조달하는 데 대한 여론의 반대는 만만치 않다.
상황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북한에도 있다. 북한은 그간 중유공급 지연을 빌미로 제네바 합의를 깨겠다는 위협을 거듭 해왔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지난 1월5일 “미국이 이달 중순 예정된 경수로 본공사 착공을 또다시 연기하는 등 자기의 의무를 똑바로 이행하려 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의 존엄과 이익을 손상시키는 데 대해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런 으름장은 역으로 케도사업을 떠맡고 있는 북한 외교부 관리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됐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군부의 입김이 갈수록 거세지는 터에 금창리 문제로 또다시 본공사가 지연되자, 북한의 외교부 관리들은 북-미 협상장에서 “제발 좀 살려달라”는 하소연을 할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전한다.
물론 아직은 금창리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낙관론이 대세다. 한국은 물론 어느 나라도 케도 체제의 붕괴를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 다. 북한으로서도 케도 체제는 당장 경제에 도움이 된다. 매년 북한에 들어가는 50만t의 중유는 김책제철소를 비롯해 주요 산업시설의 가동률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그래서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이 북-미 핵합의 파기를 자주 입에 담는 것은 역설적으로 케도 체제를 놓치지 않으려는 조바심의 표현일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임을출 기자 chulmail.hani.co.kr
◇ 인터뷰/ 장선섭 경수로사업 지원기획단장
-지난해 9월께 착수할 예정이었던 경수로 본공사가 계속 지연되고 있는데, 북한쪽 반응은 어떤가.
=북한의 가장 큰 불만은 중유가 약속대로 제때 공급되지 않는 것이다. 또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경수로 본공사가 착공되지 않는 것을 ‘의도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97년 8월 터 닦기 공사가 시작되면 곧바로 대규모 토목 건축공사가 뒤이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가 지지부진하 니까 과연 한-미-일 3국이 경수로를 지어줄 의도가 있는가 근본적인 회의를 품고 있다.
-북한이 케도 체제를 부정할 가능성은.
=그럴 우려가 없지 않다. 특히 대북 중유공급이 늦춰지면서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합의 파기 위협’을 현실화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해 말 중유공급 이행 을 위해 행정부 자체적으로 1200만달러를 지출하도록 ‘비상조처 ’를 취했다.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이 풀리지 않을 때 예상되는 문제점은.
=당장 미 행정부가 의회에서 중유예산을 따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게 분명하다. 일본 의회와 우리 국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 질 것이다. 경수로 재원분담에 대한 한-미-일 3국 의회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워지면 케도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빨리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 본다.
-현재 공사의 진척사황은 어떤가.
=1월16일부터 부지 밖으로 나가 골재채취와 골재운반도로 정비, 공업용수 배관공사 등을 벌이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북한에 신뢰감을 줄 수 있는 가시적인 공사는 물자 운반용 바지선이 닿을 수 있는 전용 방파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 예산이 확보돼야 가능한 일이다. 일단 방파제 공사가 시작되면 북한쪽에 상당한 심리적 안도감을 안겨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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