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나진선봉지역에 요즘 찬바람이 불고 있다. 한반도 북방 끝에 위치한 이 지역에 한겨울의 찬바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 지만 요즘 부는 바람은 평양당국의 의지가 실린 바람이라는 게 여느 바람과는 다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개방의 가장 상징적인 지역이었던 나진선봉지대가 북한당국의 통제로 눈에 띄게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와중에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일성 동상 가린다” 서방기업 입간판 철거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는 북한당국이 경제특구로 지정했던, 사회주의체제 내에서의 ‘국제자본주의 시험장’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이 곳은 개방에 따른 외국자본 유입으로 주민들이 하루 세 끼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역으로 꼽혔고, 당연히 바깥 주민들의 큰 부러움을 사왔다. 그러나 최근 몇개월 사이 이 지역은 급격히 활력을 잃으며 외국 기업인들의 발걸음이 갈수록 뜸해 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등을 돌리기는 마찬가지다. 북한당국이 나진선봉지대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바짝 죄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당국의 손길을 벗어나 자유로운 상품과 외환 거래가 허용됐던 원정리 국제자유시장에는 이제 더이상 시장의 원리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정부와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나진 선봉시 행정당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상인은 원정리에 물건을 함부로 내다 팔 수가 없게 됐다. 이전에는 일반 주민이나 외국 상인들도 북한 중앙당국에 일정 비율의 세금(영업세)만 내면 물건을 자유롭게 내다 파는 게 가능했다. 지난 97년 6월 에 처음 문을 연 원정리 국제자유시장은 하루 출입 상인이 많게는 2000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누려왔으나, 이런 이유로 요즘에는 사업자로 지정되기가 쉽지 않아 상인들의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진선봉지대 곳곳에 들어섰던 서방 유명기업의 광고 입간판도 최근 자취를 감췄다. 일본의 코니카필림 등 국내외 기업들은 지난 97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 광고규정’에 따라 광고판, 광고탑, 전기광고물, 전자광고판 따위의 바깥광고를 현지 눈에 잘 띄는 곳에 설치해 왔다. 하지만 광고 입간 판들이 김일성 주석의 동상보다 높게 치솟아 있어 수령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이유로 최근 ‘철거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은 지난해 말 나진선봉지대를 방문했던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여동생인 김경희 당 경공업위원장이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 경제관료 자리 군 출신으로 교체

외자유치 업무를 맡고 있는 각종 조직에는 경제·무역분야의 테크노크라트보다 당성이 강한 군 관련 인물들이 대거 자리를 메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10월부터 불거졌으며 군인들이 경제재건 전면에 본격적으로 나섰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들 군 출신 인사들은 대부분 김정일 총비서가 위원장으로 있는 국방위원회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전문 경제관료와는 달리 다소 경직된 군인관료라는 점에서, 국방위 소속 인사들의 전면 배치가 개방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체제유지를 위한 집안 단속에 더 역점을 둔 조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남쪽 기업과의 경협을 떠맡아왔던 전문 경제·무역관료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한결 같은 전언이다. 지난 90년 초부터 북한이 개방정책 시동을 건 뒤 풍부한 경험을 쌓아왔던 전문 경제관료들이 현직에 남아 있는 경우는 이제 손꼽을 정도라고 한다. 한때 북한 대외개방의 핵심 실무라인이었던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장, 김응렬·임태덕 부위원장과 김문성 국제무역촉진위원장 등은 외화불법소지, 공금횡령 등의 협의로 ‘중형’에 처해지거나 일부는 ‘경고’를 받고 근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만큼 이들의 복귀 여부는 불투명하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또 남쪽 기업인들과 만남이 잦았던 중하위급 관리들도 최근 대부분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 말하자면 남쪽 기업인과 접촉하거나 사업을 벌였던 북쪽 인사들 치고 몸 성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셈이다.

북한당국이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에서 ‘자유’를 빼고 그냥 ‘경제무역지대’로 명칭을 변경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남북경협에 깊숙이 관여해 온 ㄷ그룹의 한 관계자는 북한쪽 파트너의 말을 빌려 “나진선봉 지역의 무분별한 개방으로 인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았다는 게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라면서 “앞으로 이 지역의 위상 에 대한 심각한 재검토작업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 지도부는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나진선봉지대의 법적 지위를 이용해 남한 종교인들이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이는 점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고 덧붙였다.

기업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북한의 나진선봉지대 통제 움직임은 지난해 10월께부터 불거진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북한당국은 재미 교포인 김진경 옌벤과기대 총장을 ‘간첩’ 협의로 한참 동안 억류하다 풀어줬다. 이 사건은 나진선봉지대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바짝 죄는 신호탄이 됐다. 예전 같으면 북한당국은 투자를 희망하는 남쪽 기업인을 나진선봉지대로 직접 초대해 극진한 대접까지 베풀면서 투자상담에 응했으나, 김진경 목사 억류사건 이후엔 가능한 중국 베이징으로 상담장소를 바꾸고 있다. 비교적 자유로운 출입국 보장으로 비자 얻기가 가장 쉬었던 나진선봉지대가 이제 는 북한에서도 들어가기 까다로운 장소 가운데 하나로 변해버린 것이다.

최근엔 남한 기업인들이 투자문제 협의를 위해 만나자고 거듭 제안을 해도, 북쪽 관계자는 “기다려달라”는 퉁명스런 대답만 할 뿐 더이상의 반응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굳이 캐물으면 “남쪽기업 유치와 관련된 중앙당국 차원의 지침이 아직 내려오지 않은 데다, 대남경협 관련 조직개편이 아직 덜 끝난 탓으로 알고 있다”고 밝힐 뿐이다. 북한에 합작농장을 운영하고 농산물 계약재배사업도 펼치고 있는 두레마을영농조합 등 이미 현지에 진출한 단체나 기업들은 신규사업 계약을 맺어야 하는데도 기존의 북쪽 파트너들이 대부분 자리를 옮긴 데다 후속 반응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 기업인들은 북한 중앙 당국이 나진선봉경제특구 개발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하고 있다.

개방속도 조절 위한 불가피한 조치?

북한이 나진선봉경제특구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배경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비교적 통제가 느슨했던 나진선봉지대에 불어닥친 ‘자본주의바람’이 위험수준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개방속도 조절차원에서 중앙당국의 직접 관여가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찬우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북한은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원산과 남포를 보세가공구역으로 선포하고 나진선봉특구에서 가까운 칠보산 등을 관광특구로 개방할 모든 준비를 갖춰놓고 있다”면서 “최근의 ‘개방 역풍’은 대외개방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추가 개방을 앞두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내부 단속용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최근 움직임을 미국의 금창리 지하시설 사찰압력과 연관시켜 분석하는 의견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미국의 공세적인 지하시설 공개 요구에 맞서 “여차하면 한판 붙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마당에, 다른 한켠에서 유화적인 대외개방 제스처를 보낼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통일부의 한 정보분석관은 “북한은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대외개방 제스처를 아무리 써봤자 외자 유치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면서 “나진선봉지대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통제강화 움직임은 ‘결사항전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조처로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기업 관계자들은 ‘현대 책임론’까지 들먹이고 있다. 현대의 대규모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은 다른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의 북한 진출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ㄴ그룹 관계자는 “현대와 금강산 사업을 시작 한 뒤 북한의 대남경협 종사자들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며 “다른 대기업이나 중소기업과는 사업을 벌여봤자 시간과 인력만 낭비하고 손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현대식의 대규모 북한진출사업이 북한 개방을 오히려 더디게 만들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적잖게 흘러나온다. 북한이 짧은 기간에 ‘달러 뭉칫돈’을 손에 쥘 수 있는 금강산 개발 등 국지적 사업에만 매달리면서, 굳이 까다롭고 성가신 개혁·개방 조처들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과보다 병폐 더 크다 판단한 듯

나진선봉지대의 위상 변화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북한 지도부는 나진선봉지대에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홍보활동을 펴는 등 온갖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도로 항만 호텔 등의 건설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런 성과는 현대의 금강산 개발사업에 견주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더구나 자유무역지대 내부의 자본주의 병폐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는 비판만 거세졌다. 북한당국이 나진선봉지대를 옥죄는 이유가 단지 이것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런 정황이 이유 중의 하나가 됐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임을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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