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냉전저널리즘
글로벌화(globalization), 디지털화의 흐름 속에서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그에 상응하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밀레니엄이라는 ‘빅뱅’을 예고할 정도로 지구촌의 변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한반도 냉전에 대한 한국언론들의 보도 행태이다. ‘냉전저널리즘’이라 이름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한국언론들의 냉전보도는 6.25 이후 지나칠 정도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냉전저널리즘의 일관성은 다음과 같은 정형화된 시나리오를 반복해 왔다. 먼저 한국언론의 냉전저널리즘 속에서, 갈등의 원인은 언제나 북한으로 소급되며, 따라서 북한은 치유되어야 할 환자 혹은 격리되어야 할 범죄자 정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또한 갈등은 언제나 전쟁의 가능성으로 비약되며, 결론은 언제나 북한에 대한 불신조장과 한국정부와 군대에 대한 꾸짖음을 통한 안보태세의 강화이다. 그렇다면 냉전저널리즘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국언론의 냉전저널리즘은 남북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전달이나 객관적인 원인분석 그리고 대안제시 등 언론의 기본적인 역할과 보도원칙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혹은 정부의 군사기관지로서 충성해왔다.
한국언론의 냉전저널리즘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 왔는데, 첫째 한국정부의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위기탈피용’으로 사용되어 왔다. 누구나 알다시피 정치권이 혼란스럽거나, 선거철과 같이 정권 유지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면 언제나 간첩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최근에는 강도가 높아져 주로 배가 등장….) 그리고 한국언론은 짜고 치는 고스톱답게 이를 확대·왜곡 보도함으로써 정치권의 보수정치를 위해 일조(一助)해 온 것이다. 둘째, 한국언론의 냉전저널리즘은 시대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냉전고착화를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 한반도의 군사화, 한미연합군의 강고한 연대의식은 언제나 냉전저널리즘의 보수주의를 통해 유지되어 왔으며, 이는 존재하지 않는 전쟁 가능성을 확대 재생산하여 오히려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높이고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성공적으로 이바지해 왔다. 마지막으로 냉전저널리즘의 가장 일상적인 용도는 채루탄보다도 효과적인 것으로 검증된 진보진영탄압용으로의 기능이다. 여기서 한국언론이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반공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냉전저널리즘은 자본주의의 위기마다 이를 확실하게 뒷받침해 왔다. 학생에서 노동자, 노조에서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인한 한국언론의 매카시즘은 언제나 만병통치약의 위력을 보여 온 것이다.
따라서 한국언론의 냉전저널리즘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위상학에 따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다.
한편, 이러한 냉전저널리즘의 국가대표선수는 역시 조선일보이다. 물론, 조선일보의 보수주의에 ‘좃선’이라는 똥집을 날린 인터넷 패러디사이트의 조회수가 1000만회에 이르고, 대학 교수가 ‘반(反)조선일보’의 전사로 전의를 불태울 정도로 조선일보의 보수주의에 대한 악명성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의 보수주의가 가장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자, 조선일보의 정체성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남북갈등에 대한 보도, 즉 냉전저널리즘에 흥분하여 조선일보가 (그 더러운) 침을 튀길 때이다. 왜냐하면 남북갈등은 전쟁 가능성과 북한의 남침위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좃선’의 보수주의에 물적 토대를 제공하고, ‘좃선’의 동지들에게 보수주의의 깃발 아래 재결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서해교전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행태를살펴보고, 이를 통해 냉전저널리즘의 허구성을 재확인해보고자 한다.
조선일보의 서해교전 보도행태
조선일보가 없었다면 한국의 언론학자 혹은 언론비평가들은 모두 굶어 죽거나, 지금보다 100배는 열심히 공부를 했어야 될 지도 모른다. 왜? 조선일보의 정형화된 보수주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주며, 목에 기부스를 할 정도의 거만함은 자신의 오류를 절대로 수정하지 않기에, 조선일보는 주요 보도분석에 있어 명확한 결과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번 보도에서도 조선일보는 이러한 기대감을 결코 져버리지 않았다.
과장·축소보도 : 사건은 비약시키고 원인은 축소하라.
조선일보 냉전저널리즘의 첫 번째 테크닉은, 발생한 사건은 최대한 비약시켜 한국사회의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하고 사건의 저변에 깔린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은 최대한 축소·은폐시켜 독자 대중을 우매화시킨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서해교전 보도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오바(?)하기 시작했다. 서해교전과 관련된 기사를 1면에서부터 3·4면, 사회면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보도했으며, 매일같이 감정적인 내용의 사설을 통해서 이번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했다.
특히 조선일보가 제공한 과장된 언어들의 이미지는 전쟁이 곧바로 일어날 것과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건의 군사적 위기를 집중적으로 확대 보도하였다.
“北 西海5島 전투태세”(6월 17일 3면), “準戰時상황 돌입”(6월 16일 1면), “10년만에 ‘北傀’용어쓰며 決戰의지”(6월 16일 2면), “의도적 기습이냐 … 우발적 發砲냐”(6월 16일 4면), “西海5島는 ‘화약고'”(6월 14일 4면), “모든 방법 동원 北方한계선 死守”(6월 15일 3면)
조선일보의 과장된 전쟁위기 속에는 북한의 행동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 내포되어 있으며, 마치 북한이 전면적인 전쟁도발을 일으킬 것만 같은 위기의식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사회면을 중심으로 하는 가쉽을 통해서는 북한의 행동이나 의도를 추측, 확대 해석함으로써 사건의 원인이 전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군대에 대한 기사의 경우 강력한 군사력 혹은 국방의 의무에 대한 사명감,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적대감 등을 과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북한정권은 정말 구제불능인가”(6월 16일 2면), “北, 軍事用 천연두 바리어스 보유”(6월 14일 2면), “2시간 자고 20시간 근무”(6월 14일 30면), “도발땐 즉각砲火, 해병들 자신만만”(6월 15일 30면)
반면에 미국 측에 대한 간단한 외신 인용을 제외하면,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맥락이나 기타의 진지한 접근은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즉, 한반도 군사위기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이나 분석은 배제된 채, 북한의 불순한(?) 의도만이 추측기사를 통해 보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의 군사화와 전쟁 가능성에 있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분석은, 북한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조심스럽고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사건 자체는 교전 장면에 대한 사진을 파노라마처럼 편집하여 확대하거나 온갖 추측성 기사로 과장하여 도배를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사건의 배후에 있는 한반도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축소·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위주의 보도 : 전쟁인가 스포츠인가?
조선일보 냉전저널리즘에 있어 두 번째 테크닉은 흥미위주의 보도이다. 이는 조선일보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향해 온 ‘안보상업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 조선일보는 과거 남북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흥미위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후, 보수주의자들을 주요 소비자로 삼아 상품화하는 능력을 보여왔다. 조선일보의 안보상업주의에게 삶과 죽음의 전장, 민족분단의 아픔 등은 하나의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에게 있어서 한일축구경기와 남북교전의 차이는 “민족이데올로기인가, 반공이데올로기인가”라는 마케팅 요소의 차이일 뿐이다. 여기서 조선일보에게 중요한 것은 흥미진진한 게임을 통한 관객동원과 승패가르기이고, 이를 보수주의자들의 광기와 구매력을 통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번 사건에서도 남한과 북한의 철저한 편가르기를 통해 스포츠 게임을 방불케하는 현장중계를 진행하였고, 한국군의 승리를 매우 과장되고 격양된 목소리로 치하했다. 그리고 이번 게임이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임을 국가안보태세의 당위성과 자본주의의 국가의 우월성과 함께 강조하였다.
“취약한 船尾 들이받아라”(6월 12일 3면), “우리 고속정의 ‘꼬리 들이받기’ 작전에 완패”(6월 12일 3면), “北해군 외화벌이 하는듯”(6월 11일 3면), “北측 기죽은 듯 멀리머물러”(6월 12일 31면), “船尾올라타기 성공, 軍사기도 올랐다”(6월 14일 30면)
게임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일보는 참전 군인(선수가 적합할 듯)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서해교전을 무용담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북의 패배를 비아냥거리거나 승자의 거만함을 뽑내는 사설과 기사들이 지면을 가득채웠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흥미위주, 승패중심의 보도 행태는 사건의 본질로부터 독자 대중을 더욱 멀어지게 하고, 전쟁의 폭력성을 스포츠 수준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미화시킨다. 조선일보에게는 죽은 북한군인의 인권보다는 한국선함의 우월성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보도의 이중잣대 : 적과 아군의 차이.
조선일보 냉전저널리즘의 세 번째 테크닉. “남한이 하면 로맨스, 북한이 하면 불륜?”. 적과 아군이 분명한 조선일보에게 보도의 공정성을 기대하는 것은 유아적인 발상임에 분명하다. 냉전저널리즘에서 북한의 폭력은 무조건 전쟁도발이고, 남한의 폭력은 무조건 성전(聖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논조는 “더 세게 때리지 않은 것”을 질타하는 수준이다. 이번 사건 역시 남한의 군사적 대응은 정당방위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선제공격 혹은 전쟁도발로 정형화되어 보도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입장에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남한 군사들을 괴롭히는 괴팍한 북한괴뢰집단이야 말로 당연히 응징되어야 하는 것이다(?)”
“東海선 관광료 내고 西海선 영해침범 당해”(6월 14일 1면), “北발포땐 즉각 응사하라”(6월 14일 4면) “도발 응징 … 본때 보여야”(6월 14일 31면), “북은 더 이상 행패를 부리지 마라”(6월 15일 2면)
여기에 ‘적반하장’의 원리까지 동원되면, 북한은 반성의 가능성이 없는 패륜아 취급을 당하기 일수이다. 조선일보는 관대한 남측의 호의를 무시하고 뒤통수를 치는 북한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정형화 시킨후, 북한이 다시는 딴 생각을 못하게 본 때를 보여주라고 여론을 몰아간다. 이번 사건에서 조선일보가 DJ의 ‘별’볼일 없는 ‘햇볕정책’을 매우 급진적인 대북정책인양 상향평가하여 비난하고, 이를 빌미로 군사화를 통한 강경정책으로의 환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햇볕정책은 무능력한 신자유주의정책이 아니라 지나치게 관대한 대북정책이며, 이는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만을 부추기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오직 군사화로의 매진을 통해 ‘남한의 힘’을 과시하는 것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유일한 대안이라는 이율배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파성 : 군사화를 통한 안보태세강화가 장땡인가?
조선일보 냉전저널리즘의 마지막 테크닉은 역시 반공이데올로기이다. 이는 적의 공격이 코 앞에 와 있는데 한가롭게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며, 적극적인 군사화를 통해 안보태세의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요 골자이다. 이번 사건 역시 국방부의 용어 사용에서부터 시작하여, 미진한 군사적 대응 그리고 향후 대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군사화와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발언들로 조선일보의 지면은 넘쳐흐르고 있다.
“북한이 자행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대결로 치달았지….”(6월 17일 2면), “가상 시나리오 만들어 대응”(6월 17일 4면), “北도발을 越線이라니…”(6월 11일 3면) “이러다 목포까지”(6월 11일 2면) “국가태세 총점검할 때”(6월 12일 2면), “‘힘’보여야 ‘햇볕’도 산다”(6월 14일 2면)
심지어 조선일보의 우국충정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의 대북정책을 모범 사례로 삼아 DJ의 햇볕정책을 꾸짖고, 군사화와 강경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할 정도이다.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군사화와 반공이데올로기의 재무장만이 대안이라는 냉전저널리즘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와 냉전저널리즘
조선일보는 이번 사건 초기인 6월 11일에 [국방부의 ‘꽃게잡이 월선’論]과 [코소보에 화해와 평화를]이라는 두 개의 사설을 동시에 실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는 어설픈 논조(미국의 군사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지만 전쟁반대와 평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으며, 후자는 북한에 관대한 한국군에 대한 준엄한 경고와 군사화를 통한 북한의 응징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조선일보의 냉전저널리즘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허구성을 잘 보여준다. 지구촌의 평화는 용납해도 한반도의 평화는 요원하다는…. 세상이 변해도 한반도의 군축과 북한에 대한관대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그렇다면 한국 최고의 엘리트집단 중의 하나인 조선일보가 왜 이렇게 멍청한 소리만을 반복하는 것일까? 조선일보 냉전저널리즘에 깔려있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발상에 기인한다.
너희가 6.25를 아느냐?
조선일보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는 전쟁환원주의이다. “상기하자 6.25″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50년대식의 반공이데올로기가 아직도 건재한 것이다. 조선일보의 지면 속에서 북한의 모든 군사적 행위는 50여년의 시공간을 거침없이 가로질러 1950년 6월로 되돌아가며, 보수주의 국가인 남한에게는 전쟁에 대한 군사적 대응이외에는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보’나 ‘포용’, ‘평화적 통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로 취급된다. 전쟁의 고통을 모르는 젊은 것들의 철없음으로.
전쟁환원주의 속에서는 북한 책임론이 도사리고 있다. 국제적인 정세나 현시기 한반도의 정세와는 무관하게 ‘전쟁=북한=군사적 대응’이라는 불변의 법칙이 조선일보의 냉전저널리즘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평소 북한의 경제난에 대해서 남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군사문제에 있어서만은 북한이 항상 위협적이라는 상호모순된 논리를 서슴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전쟁환원주의 덕분이다.
갈등은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쟁환원주의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일보는 밤낮없이 분주하다. 조그만 사건 속에서도 보수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틈세를 찾아야 하며, 조금이라도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이 고개를 들 것 같으면 이에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야하기 때문이다. 즉, 냉전저널리즘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고, 군사화를 통한 보수주의를 설파하여 매카시즘적인 마녀사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냉전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냉전의 고착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한국군의 군사력 증강은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본질적으로 가중시키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적대화와 강경한 군사적 대응은 한반도의 평화적 외교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내에서 진보진영에 대한 통제와 보수주의의 지지기반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한반도의 냉전이 고착화되기를 원하고 있다.
‘좃선’, 진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의도는 스스로가 자화자찬하는 정보력의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왜 남북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빈약한 냉전저널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절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전쟁유발에 있어 가장 강력한 불안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정책에 있어 조선일보가 침묵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실제 사건의 과장을 통한 냉전저널리즘의 확산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주체생산을 통한 한반도의 냉전 고착화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진실에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으며, 일회적이고 주변적인 사건들을 통한 이슈 만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언론, 한반도에 대한 평화적인 문제설정이 중요하다.
조선일보를 통해 서해교전에 대한 언론의 허구성을 살펴보았다. 사전에 전제하였듯이 조선일보를 분석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그 허구성의 확연함과 과도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사건에 대한 보도에 있어, 기타의 언론들도 흥미위주의 보도, 보도의 이중잣대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 한반도의 구조적인 모순과 미국의 군사정책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있지 못하며, 나아가 한반도에 대한 본질적이고 평화적인 문제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의 군사적 행위에 대한 집중보도, 한국군의 군사적 활약에 대한 긍정보도 등의 근시안적인 보도관행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남북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항상 강조하는 ‘세계화’된 시각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전쟁이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이나, 신식민지 수준의 굴욕적인 외교습관에 익숙해져 있는 남한을 통해 현실화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장소가 한반도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언제나 그러했듯이 전쟁기계인 미국과 초국적자본이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음모론의 수준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위상학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한반도는 이처럼 불안정한 세계정세 속에서, 미국의 군사결정권 속에서 전쟁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전쟁위기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국과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는 어떠한 모험도 개의치 않는 전쟁기계 미국에 있다. 미국의 군사정책이 한반도 문제에 깊숙이, 그것도 절대적인 군사결정권을 가지고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기의 가장 심각한 원인이며,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평화정책이 부재하다는 것이 또 다른 원인이다. 한국정부는 평화의 안착화를 위한 적극적인 외교,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지역적 평화외교에 매우 인색하다. 오히려 미국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를 통해 스스로의 정권유지와 신자유주의 전략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에만 급급해 하고 있다. 이는 DJ의 햇볕정책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과 한반도의 평화안착화를 모색하는 적극적인 외교정책이 아니라 초국적자본의 신자유주의의 정책에 모든 것을 내맡긴 무책임한 자유방임주의의 변종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언론은 현상적인 남북문제에 “눈 가리고 아웅”할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설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불안정성과 냉전체제를 이용한 초국적자본의 시장확산전략(남한)과 시장선점전략(북한)을 가감없이 폭로하여야 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반도의 군사화, 국가폭력, 인권유린 등에 대해 주목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의사가 없다면, 아니 언론의 권력화와 자본화에 눈이 멀어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할 여력이 없다면, 한국군함의 들이받기에 광적으로 열광할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한반도의 젊은이들 앞에서 차라리 침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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