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 사고하기: 위기의 시대를 위한 비판-변증법적 사고와 사회주의를 위한 사례⟫(펀우드 출판, 2024) 10장 발췌
선거철이 되면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당신이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세요, 꼭 투표하세요!" 이는 "투표하지 않으면 불평할 권리도 없다"는 설득력 없는 충고와 함께 따라온다. 서구 사회의 여론 주도자들이 투표율에 대해 이토록 신경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낮은 투표율이 정부의 대중적 지지 기반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수당이 투표의 50% 이하를 얻더라도 연합 정부를 통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2000년과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19년과 2021년 캐나다 연방 선거에서 당선된 후보가 주요 경쟁자보다 적은 표를 얻은 사례들이 있다. 이는 미국의 독특한 선거인단 시스템과 캐나다의 승자 독식제에 따른 결과이다. 낮은 투표율로 인해 후보가 20% 미만의 유권자 지지로도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2024년 7월 영국 총선 이후, 키어 스타머의 노동당은 단지 5분의 1의 지지율로 다수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은 스타머의 새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를 바 없고, 대중적 지지도 부족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투표율 문제의 핵심은 정부 정책이 얼마나 정당하게 보이는지에 있다. 예를 들어, 스타머가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정말 ‘국민의 뜻’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정부가 5분의 1만의 지지로 인기 없는 정책을 밀어붙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그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반대해야 하지 않을까?
낮은 투표율로 당선된 정부가 정당성을 의심받는 상황은 많은 노동자와 청년들이 그 정책에 반대하여 행동에 나설 중요한 기회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정부가 ‘국민의 위임’을 받았다는 허구 때문에 수동적이고 무관심하게 남아있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수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 논란이 되는 정책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다. 차라리 투표율을 높여 선거 승자가 국민 대다수의 이익과 상충될 가능성이 큰 정책을 ‘정당한 위임’을 받았다며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출처 : Unsplash+, Koushik Chowdavarapu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급진적 비평가들은 종종 "선거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었다면 불법이 되었을 것"이라는 구호로 주류의 주장에 반박한다. 물론,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선거는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내거나 정치적 분위기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선거만으로는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근본적인 도전을 할 수 없다. 20세기 초 민주주의에 대해 엘리트주의적 비평가들(빌프레도 파레토나 가에타노 모스카와 같은)이 가졌던 두려움, 그리고 보통 선거가 사회주의 정부를 선출하고 계급 불평등을 해소할 것이라는 일부 급진적 자본주의 반대자들의 기대는 빗나갔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보통 선거는 사회 진보를 위한 ‘의회적 길’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100여 년 전,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모든 성인이 정부 선출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그 정부가 강요하는 지배 형태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 대표적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실제 결정 권한이 소수의 특권층 엘리트에게 남아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대다수의 이익을 위한 대중 행동은 "정당하게 선출된 정부"의 위임에 도전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서 민주주의를 “개인의 권력이 경쟁적 투표 과정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위한 힘을 얻는 제도적 장치”로 설명했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 솔직하고 현실적인 정의에서, 고대의 민주주의 이상인 ‘민중에 의한 통치’는 거의 사라지고, 소수의 인물들이 ‘다수의 동의’를 주장하며 통치하는 현실 속에서 다수결 원칙마저 약화되고 만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대표 민주주의는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Tweedledum and Tweedledee) 중 선택’과 다를 바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이는 전통적 선거 과정을 통해 집권한 어떤 정당도 정책 선택이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설사 노동 계급에 뿌리를 둔 정당이 집권하고, 노동자 통제 하의 사회주의 계획 경제라는 공약을 내세워 선출되었다 하더라도(수십 년간 어느 대중 기반 정당도 이런 공약을 내걸지 않았지만), 의회를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로의 전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기존 헌법의 규칙을 따르는 한(모든 국가에서 급격한 변화는 사실상 허용되지 않음),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조치는 자본 도피, ‘경제계’의 거대한 저항, 그리고 (여전히 자본주의인) 경제의 혼란과 마비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주요 행위자들은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움직임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경제 구조와 역학은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명목상 사회주의 정부가 프로그램을 약화하고 자본주의 질서를 ‘책임감 있게’ 관리하는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는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좌파 정당이 정부를 구성할 때마다 맞닥뜨리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든 표면적으로 공산주의든, 이러한 정당의 현실적 최대 목표는 결국 ‘더 인간적이고 민주화된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겉보기에 소박한 목표조차도 노동 기반 개혁 정당이나 좌파 연합 정부가 실현하기에는 벅찬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는 점점 더 심화되는 부와 소득 불평등, 막대한 부채 축적, 생산 자본의 부진한 수익성, 마르크스가 말한 “허구 자본”의 폭발적 증가, 기후 위기에 대한 무능한 대응,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의 강화된 억압, 그리고 새로운 세계 대전을 대비하는 준비 태세로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특징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객관적 상황에서, 심지어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진보적 개혁 조치를 실질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은 극도로 줄어들었고, 다양한 정치 기구의 명목상 ‘좌파’조차도 긴축, 군사주의, ‘국가 안보’라는 논리에 굴복하고 있다.
명목상 좌파 성향의 진보적 혹은 사회주의 정부가 기존 헌법적 틀을 준수하면서 급진적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필연적으로 기존의 국가 기구를 통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국가 기구는 행정 관료제, 사법부, 상비군, 경찰력을 포함하며, 오랫동안 노동자보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도록 형성되어 왔다. 만약 이러한 정부가 재산 소유 계급의 권력과 특권에 실질적으로 도전하려 한다면, 국가 기구의 뿌리 깊은 부문들, 특히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무장한 남성의 조직체”라 부른 군대와 경찰로부터 거의 확실히 저항과 방해를 불러올 것이다.
1970년대 초, 살바도르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가 칠레에서 외국 소유의 다국적 기업 자산을 국유화하려 하자(90% 이상의 다른 기업들은 민간 소유로 남겨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칠레 군부의 고위 장교들은 잔인한 쿠데타를 일으켜 수천 명의 칠레 좌파 인사들을 학살하고 한 세대 동안 조직된 노동 운동을 무너뜨렸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선거 지향적 “사회주의” 정당들이 이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평화적이고 의회적인 사회주의 전환”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혁명적 프로그램과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그램을 더욱 “온건화”하여 자본 계급에게 기존 질서를 책임감 있게 관리할 의지가 있음을 안심시키고, 지지자들이 진정한 급진적 목표를 추구하지 않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민주주의적 국가 형태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계급에 의해 허용되거나 심지어 선호되기도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때에만 해당된다. 자본주의적 이익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보수적이든 자유주의적이든 “민주적” 자본가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 지배를 방어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방법에 기꺼이 의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히틀러(독일), 무솔리니(이탈리아), 살라자르(포르투갈), 프랑코(스페인), 수하르토(인도네시아), 마르코스(필리핀), 혹은 군사 정권(글로벌 남반구 여러 국가의 사례처럼)을 계급 이익의 최후 방어선으로 지지할 것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표 민주주의는 더 부유하고 안정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선호되는 정치 형태였다. 이는 이러한 국가들이 다당제 경쟁을 통해 “민중의 표”를 얻기 위해 노동 계층에 물질적 양보를 제공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양보는 주로 공공 의료와 교육의 개선, 실업 구제 및 기타 “사회 지원”을 포함하는 정부의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정책들의 목적은 물질적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를 정치적으로 안정화하고 계급 갈등을 완화하는 데 있었다. 나아가, 보다 멀리 내다보는 자본가들은 다당제와 대표 정부가 없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부유층에 의한 노골적 지배인 극단적 형태의 금권정치로 치우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표 정부와 보통 선거는 자본가 계급이 단기적 이윤 극대화 욕구를 장기적 사회 결속 유지와 기존 사회 질서의 지속이라는 더 큰 이익에 종속시키도록 훈련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려사항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 유효하지만, 2007-09년 금융 위기와 대침체가 시작된 글로벌 경제 상황은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지난 15년간의 글로벌 경제 침체와 자본주의의 불안정 심화는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한 노동자 계층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에 따라 자본주의 엘리트들은 앞으로 그들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민주적 자유의 제한, 노동자 운동의 억압, 군사적 모험주의가 필수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과거에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대표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대중들이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고 현 사회 질서를 정당하다고 여기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분한 자산이나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경제적 영향력이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으로 쉽게 전환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만약 대표 민주주의가 없다면, 빈곤층, 노동 계층, 심지어 중산층조차도 국가가 부유층만을 위해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결론짓기 쉬울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존재는 이러한 인식을 상당히 완화시켰다. 노동자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며, 투표권을 가진 납세자로서 정부 관리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도록 설득되었다. 대표 민주주의는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이 분산되어 있고, 계급에 기반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국가는 사회의 경쟁하는 이익들 사이에서 중립적 중재자로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었으며, 계급 분열 위에 서서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힘으로 인식되도록 했다.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적 통치 형태가 국민들에게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도록 장려한다는 것이다. 즉, 계급, 인종, 성별, 연령, 종교와 같은 차이가 국민을 나누는 것보다 ‘공통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정치 활동, 특히 반(反)자본주의적 활동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먼 나라의 노동자들과 실제로 일치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이는 지배 계급의 외교 정책과 군사적 모험에 대중적 지지를 동원하는 것을 훨씬 더 쉽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민주적 생활 방식이 전체주의에 위협받고 있다”는 식의 과장된 주장(가슴을 두드리며 하는 주장)은 지난 세기 냉전 시기에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 노선을 국내외에서 대중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점점 희화화되고 있는) “민주주의”가 중국과 러시아의 “독재”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국민을 설득하려 애쓰고 있다. 현재 미국과 주요 동맹국들로 이루어진 서구 세력과 글로벌 남반구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자칭 진보주의자, 인권 운동가, 심지어 “사회주의자”들마저 중국과 러시아의 다극 세계 구축 프로젝트에 반대하며 자국 정부 편에 서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체제적 ‘좌파’는 자기도 모르게 전 세계적 군사 충돌이라는 파국적 상황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 세력은 다가오는 제3차 세계대전에서 민주주의, 인권, “국가 안보 수호”라는 기치를 내걸겠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를 신식민지적 방식으로 지배하고 분열시키며, 미국의 “전방위 지배”를 다시 공고히 하는 데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쿠바, 북한, 베네수엘라, 시리아, 이란과의 대립을 해결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전 세계적 재앙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과 젊은이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지배 계층이 인권,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위선적일 뿐 아니라 수십억 인류, 특히 “민주적 서구”에 사는 대다수를 지속적으로 고통, 억압, 착취 속에 묶어두는 세계 질서의 수호자이자 최대 수혜자임을 인식하고 이에 맞서 동원해야 한다.
대표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이익에 부합한 네 번째 방식은, 경제 위기와 착취적인 경제 시스템의 문제를 특정 정당과 정부의 정책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는 경제 호황의 공을 쉽게 차지하고, 경기 침체에 대해서도 일상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성과가 특정 정당의 행정 능력에 달려 있다는 환상이 만들어지지만, 이는 각국의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하든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불황이 발생한다는 점을 무시하며, 자본주의의 가치와 이윤 법칙에 지배되는 경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풀린다. 노동자들은 나쁜 경제 상황을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고유한 모순과 불합리성 대신 정치인들에게 돌리도록 유도된다.
하지만 지금, 대표 민주주의 형태의 자유주의 통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대중을 진정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억누르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2020년 미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 2023년 프랑스에서 마크롱 정부에 맞선 대규모 항의, 2023-24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노동자와 학생의 시위, 그리고 주거비 상승을 비롯해 생활비 상승에 맞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서구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 물결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자본과 통치 엘리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상황은 파업권, 거리 행진, 그리고 반대 의견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민주적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동시에,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 하위 80-90%의 사람들에게 현재의 통치 형태는 대자본의 노골적인 지배를 가리는 얇은 가면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정치적 중심은 더 이상 지탱되지 않으며, 새로운 원심력이 발생하고 있어 결국 파시즘과 사회주의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계급 대립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민주적 통치 형태를 상상하기 어렵다. 반대로, “평의회 민주주의”와 사회화된 탈자본주의 경제에 기반한 활기찬 민주사회주의 자치 시스템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비록 실현이 쉽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시스템에서 시민들은 협박이나 언론 및 정책 결정자에 대한 특권적 접근이 아니라 합리적인 설득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투표는 몇 년마다 열리는 총선으로 한정되지 않고, 경제 및 사회 계획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숙의 기관(평의회 및 의회)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작업장과 지역사회의 평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투표를 위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민중에 의한 통치라는 고대 민주주의 이상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역사적 경험들은 노동자들이 사회화된 경제와 사회주의적 정치체제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200년 이상 이어져온 생산 협동조합,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의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 체제, 과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많은 노동자가 자주 관리 기업에 참여했던 경험, 현재 쿠바와 베네수엘라에서 운영 중인 작업장 및 지역사회 평의회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역사적 선례들은 노동자들이 사회적 연대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생산성과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한다. 게다가, 21세기의 과학과 기술은 과거 그 어떤 시기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번창하기에 훨씬 더 유리한 조건과 능력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생산 과정의 관료적 조직은 노동 절약형 기술 혁신의 필연적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에서의 노동력 대체와 자동화, 로봇 공학,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관료적 권위 관계의 ‘기술적’ 논리를 약화시키며, 작업장뿐 아니라 전체 사회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 참여를 위한 사회적 시간을 해방시킨다.” (머레이 스미스, 보이지 않는 리바이어던, 2019).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전 세계 사회주의 공동체가 직면한 중요한 거시경제 및 사회적 문제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데 있어서 대다수 시민이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과 투표는 친사회주의 성향의 정당들이 제시하는 정책 플랫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작업장, 지역사회, 지역, 국가 및 국제 평의회 체계를 통해 운영될 것이다. 이렇게 활기차고 다층적인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노동자, 소비자, 청년 등 대중을 모든 수준의 정치 생활로 끌어들여, 점점 더 잘 교육받고 정보에 밝은 사회주의 시민들이 진정한 세계적 평등-사회주의 문명의 진화하는 모습을 결정할 힘을 갖도록 할 것이다.
[출처] Capitalist Democracy Is a Sham! For Socialist Democracy!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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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스미스(Murray Smith)는 캐나다 브록 대학교의 명예 교수이며, 팀 헤이슬립(Tim Hayslip)은 캐나다 요크 대학교의 사회학 박사 과정 학생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