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주민들의 삶과 일본의 반핵운동 (1)

[핵안보정상회의 이후](2)

원자력 촌 - 죽음의 산업을 유지하는 거대 이권 네트워크

일본에서는 핵발전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자본가들과 그들에게 기생하는 정치인, 관료, 언론, 학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원자력 이권 네트워크를 ‘원자력 촌’이라 부른다.(한국에서는 보통 ‘핵 마피아’라고 부른다.) 원자력 촌 구성원들은 이익을 위해 안전 기준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설정하고, 핵발전소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고 데이터를 조작했다.

기본적으로 핵발전은 국가의 비호 없이 성립 불가능하다. 핵발전소 1기를 짓기 위해서는 대략 3조원에서 3조 5천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들며, 핵발전 과정에서 생기는 방사성폐기물을 수천 년에 걸쳐 관리하기 위해서는 역시 방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국가가 함께 책임지지 않으면 핵발전소는 건설도 사후 관리도 불가능하다. 국가의 비호 아래,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운영하는 도쿄전력을 비롯한 전력회사는 굉장히 큰 이익을 내고 있다. 일본에는 9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모두 지역별 독점 회사이며, 정부의 보조를 받고 있다.

핵발전에서 전문가의 역할도 빠질 수 없다. 안전을 보증해주는 원자력 전문가 없이 핵발전은 추진될 수 없다. 또한 언론은 국민들에게 핵발전은 안전하고 경제적이라고 선전하면서, 전력회사로부터 막대한 광고비를 챙겼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주류언론에서 반핵이나 탈핵움직임을 적극적, 지속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을 잃은 후쿠시마 주민들

이번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피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원자력 촌 구성원들이 아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후쿠시마현 주민들이다. 강제 피난이건 자발적 피난이건 이들은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피폭을 피하기 위해 이주하면 주택이나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주하지 않으면 수입이나 재산은 유지할 수 있지만 건강, 출산, 육아 등의 문제를 감내해야 한다. 상충되는 권리가 아닌데도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다.

피난을 강제당한 대가족이 서로 흩어져 사는 경우도 많다. 주민 6,200명의 이타테무라는 사고 전 1,700가구가 임시주택으로 옮기면서 2,700가구로 나뉘었다. 단기간에 수습될 수 있는 사고라면 일시적인 피난으로 끝나 불편을 감수할 수도 있겠지만, 후쿠시마 주민들이 본래 살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몇 십 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후쿠시마 주민들 사이에서는 지금 현외로 피난가거나 이주하는 것을 입에 올리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자칫했다가는 소심하다거나 지역을 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 지역인 도호쿠 지방의 역사를 보면 안타까움은 더하다. 도호쿠지방은 전통적인 농업지역이다. 1970년대 고도경제 성장 정책으로 1차 산업이 파괴되고, 젊은 노동자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도시로 내몰리면서 도호쿠지방은 인구 과소지역이 됐다. 다른 나라들처럼 일본도 이런 곤란을 이용해 도시에서 기피하는 핵발전소를 쇠락한 농촌지역에 지었다. 후쿠시마현에는 10기의 핵발전소가 있고,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핵발전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도호쿠지방은 치명적인 사고가 났을 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현재 피난민은 15만 명에 이르며, 후쿠시마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주한 지역에서 배제당하기도 한다. 타 지역으로 전학을 간 후쿠시마 출신 학생들이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당하는 경우들이 보고되고 있다. 후쿠시마 주민들이 고향을 잃은 상황에서, 다른 지역을 떠돌지만 타지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현상을 두고 후쿠시마 주민들의 ‘국내 난민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피폭당하며 일하는 노동자들

또 다른 핵심 피해자는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아무리 방호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해도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이상 피폭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정기검사 때는 엄청난 압력과 300도에 이르는 수온으로 인해 얇아진 배관이나 노후된 밸브를 교체해야 하는데, 이 작업에는 반드시 피폭이 동반된다. 그러나 피폭의 피해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며,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듣고 작업에 투입되게 된다.

핵발전소에서 피폭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업무는 6,7차 하청회사를 통해 들어오는 최하층 노동자들의 몫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면서 받는 임금은 중간업자들이 가져가고, 노동조합에 가입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권리 주장도 어렵다. 핵발전소 작업으로 피폭되어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의 86%가 하청계약으로 들어온 노동자이다.

후쿠시마 사고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누출되면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평상시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허용 피폭치를 적용하면 작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핵발전소 노동자의 피폭 허용치는 연간 20mSv(밀리시버트), 긴급시는 100mSv인데, 사고가 나자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한해 허용 피폭치가 250mSv로 변경되었다. 이 자체로도 노동자들을 큰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인데, 이마저도 초과하여 피폭된 노동자들도 있다. 이 중에서는 500mSv이상 피폭된 노동자도 있는데, 500mSv이상 피폭되면 일시적인 백혈구 수치의 저하가 관찰되며, 급성 방사성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몇 명의 노동자들이 어떤 상태로 일하며, 피해가 어떠한지에 대해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다양한 피해자들, 각기 다른 고통

앞서 언급한 후쿠시마현의 주민, 핵발전소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에서 나타나는 문제만이 다는 아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처한 조건에 따라 각각 다양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너무나 커다란 피해 앞에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현 농민들의 이야기는 여러 경로로 한국에도 전해졌다. 방사성 물질이 날아오는 바람에 시금치도, 배추도 출하정지 조치가 되자 절망해 자살한 농민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애써 짠 우유를 버려야 하는 나날을 견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낙농업 농민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안타까운 사연은 종종 언론에 보도되지만, 피해보상을 줄이기 위해 피폭허용치를 제멋대로 늘린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이 농민들의 피해보상까지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일본정부가 학교교육법상 정식 학교로 인정하지 않는 조선인학교에 대해서는 방사선측정기나 운동장에 대한 제염처리 지원을 하지 않는다거나, 행정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정부의 지원없이 졸업생들과 학부모들이 나서 제염작업을 거의 마무리했을 지난해 9월 즈음에서야, 일본정부와 후쿠시마현은 태도를 바꿔 학교 재건 비용 전액을 보상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도 농촌에는 아시아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아시아인들이 많다. 현재 후쿠시마 전체에서는 2,000여명 이상의 필리핀인들이 일본인 남성의 배우자로 살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낙농업 농민의 부인도 필리핀인이다. 그녀는 이제 남편이라는 보호막 없이, 외국인으로서, 재난지역에서, 혼혈인 아이와 함께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

분노하는 일본

후쿠시마 주민들과 일본의 시민들이 절망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9월, 대규모 시위가 거의 없는 일본에서 6만명 규모의 시위가 벌어져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후쿠시마 사고 1주기인 올해 3월 11일에도 후쿠시마현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핵집회가 열렸다.

저항의 시작은, ‘원래의 삶을 돌려달라’는 소박한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반핵운동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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