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폭력에 관한 공적 논의와 담론은 부인과 히스테리 사이에서 동요한다. 부인이란 ‘그렇지 않아’ 혹은 ‘그럴 리가 없어!’라는 반응이고, 히스테리란 공포, 불안, 방어, 딴청 등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잡한 반응이다. 성폭력에 대한 여성주의의 개입은 이렇게 요동하는 동시다발적 반응 속에서 일어나며 그렇기에 사회적 불안에 의해 지속적으로 과잉결정된다.
최근에 발표된 성범죄 처벌 및 성폭력 방지대책의 특징은 처벌강화를 특징으로 한다. 9월 중에 발표된 대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자발찌 제도 보완, 성폭력 가해자 신상공개 및 2,800여 명의 신상정보 소급공개, 화학적 거세 등의 성충동억제 약물치료, 경찰인력을 증가하여 전자발찌 부착 대상자를 포함한 성폭력 우범자 관리 강화, 보호관찰인력의 증가, 성범죄 관련 법률개정 및 형량증가,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의료지원 서비스 확대, 피해자 통합지원센터 확대 등.
최근의 대책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지적해 온 대로, 성범죄자에 집중된 이러한 대책은 문제가 많다.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대책이 먼저 심층적이고 실효성 있게 논의되고 시급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성범죄자 처벌과 감독에 집중하는 대책의 기저에는 특정한 인식, 관점, 여전히 잘못된 고정관념이 작동한다. 우선, 강력한 처벌과 성범죄자 관리감독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인식. 여성단체에서도 처벌강화에 부분적으로 수긍한다. 법 실행이 현행 법조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벌강화가 성폭력을 줄이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은 법원도 강한 처벌이 성범죄 자체를 줄이지는 못한다고 인정한데서 이미 드러났다.
문제는 요즘 발표된 처벌강화 대책이 성폭력을 극단적인 충동에 의한 병리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에 기댄다는 점이다. 이러한 병리적인 관점은 성폭력이 낯선 사람이 자행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과도 밀접하다. 정부의 대책이 보여주는 철학, 즉 처벌이 곧 예방이라고 보는 철학 역시 심히 문제적이다. 처벌 중심적 철학은 피해자를 사회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개인으로 접근하며 피해자가 피해를 극복하는 과정을 철저하게 개인적 과정으로 내버려 둔다.
성폭력과 그 방지대책을 둘러싼 인식에서 더욱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차이는 성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에서 나타난다. 신문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보수적 입장은 성폭력의 원인을 무수한 형태의 도덕적 해이와 자기통제 불능, 혹은 사이코패스 등을 거론하는 병리학적 원인을 강조한다. 자기통제를 못한다면 약물을 통한 거세라도 받아야 한다는 식이다.
다른 한편, 진보적 시각에서는 성폭력이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입장은 또한 최근의 처벌 및 감독강화 대책이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점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즉, 신자유주의식 경쟁의 강화와 사회복지의 쇠퇴로 인해 강화된 양극화 현상 및 계층불안정화를 은폐하기 위해 형벌정책을 강화하는 전략이 활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징벌적 조치보다는 치료 및 교정중심의 접근을 택하면서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에 주력하는 경향을 띤다. 여기서 거론한 몇 가지 입장은 물론 단일한 것은 아니다. 각 입장이 띠는 경향을 추상화해서 꼽아보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입장을 띠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 문제를 둘러싼 여성주의의 개입 역시 복합적이다. 최근에 발표된 성범죄 대책과 관련하여 여성주의의 반응은 성범죄 대응과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성폭력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마다 여성단체들이 발표한 ‘성폭력 대책 촉구 성명서’들을 보라. 이 성명서들을 보면, 처벌강화와 실효성 있는 재범방지대책을 주문하며, 성범죄자들에 대해 법대로 처벌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성범죄를 둘러싼 법제도의 실행이 현행 법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중심적인 조사/재판 문화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교정해야 함을 역설하고, 이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학교에서부터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피해자 보호 및 2차, 3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 및 의식과 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한다.
성범죄 관련 법률개정 및 성폭력을 둘러싼 경찰, 사법문화의 변화는 시급한 일이다. 이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문화와 의식의 변화는 이에 비해 천천히 일어날 테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일구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관여, 개입, 행동해야 한다. 지금 여기 이러한 변화의 재출발점으로 다시금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여성주의와 인권운동은 인권과 성폭력에 관한 논란과 쟁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시각이 피해자중심주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이 상반될 때 피해자의 목소리를 우선적으로 경청하는 것은 적어도 여성주의와 인권운동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성범죄 관련 법률개정 및 피해자 지원의 확대는 환영할 만하다. 피해자중심적인 대책의 세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는 더 많은 구체적 논의와 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성폭력 문제와 관련한 법제화를 둘러싼 정교한 개입과 더불어 더욱 다양한 논의를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펼쳐야 한다. 9월 초에 법원에서도 성폭력 친고죄 규정은 개정되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성폭력 범죄 친고죄 규정은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의 경우 친고죄 규정은 2010년 4월에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가장 큰 문제는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객관성을 증명할 책임은 폭력을 당한 아동/여성에게 떠넘겨진다는 사실이다. 피해자 진술의 신뢰성과 객관성은 피해자의 진술을 들어주는 사회, 청중, 법관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성폭력의 법제화는 동의와 강제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가정 아래 성폭력을 자기결정권 침해의 문제로 본 것이지만, 실상 성폭력은 선택의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지점들 역시 포함한다. 바로 이 복잡성을 붙들고서, 성폭력을 피해자,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끄러운 공적 논의가 다양하게 열려야 한다. 이러한 논의와 대책의 경합 속에서 지속적인 대안적 프로그램, 실험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에 언젠가 또 발표될 여성단체들의 성명서에서는 지난 10년간 반복적으로 발표된 내용들 중 두어 가지라도 없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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