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의 비극적 죽음, 그 ‘잘난’ 국가에 묻다

[기고] 왜, 공감해주고 아파해주는 정부는 없는가?

세 모녀의 비극적 죽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질문

지난 2월 26일 저녁 주검으로 발견된 세 모녀. 12년 전 아버지가 떠난 뒤 이들 모녀는 어머니의 식당 노동과 작은딸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왔다. 36세, 33세인 두 딸은 생활고와 지병으로 금융피해자(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었고, 병원비 부담 탓에 치료조차 포기한 채 지내왔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는 지난 1월 팔을 다친 후 식당 일조차 하지 못했다.

세 모녀는 절망의 마지막 길을 떠나면서 하얀 편지봉투에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는 유서와 월세 70만 원을 남겼다. 죽음을 결심하면서도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 어머니의 속 깊은 심성에 너무도 가슴이 아린다.

세 모녀에게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세 모녀와 함께 아파해야 할 사회공동체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도 모녀를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은, 아니 그 누구도 공감해주고 함께 아파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에 우리는 무엇을 건네줄 수 있는가. 진정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것인가?

[출처: KBS1 뉴스9 갈무리]

복지공약으로 당선, 反복지로 나타난 박근혜 정부

누군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신청하면 되지, 그걸 왜 못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들에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무엇이었을까. 보증금 500만 원의 월세방에 살았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 선정 때 적용하는 재산환산액은 0원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식당 일을 전일제로 계속했을 때 월 150만 원 이상 벌었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 수급 대상자 선정 기준인 3인 가족 최저생계비(132만 9,118원)를 넘는다. 따라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었지만,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수급권자 대상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다. 다만 딸은 차상위 정도로 병원비 정도는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권리로서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신청주의’는 이를 소극적 권리로 버려두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철문 같은 주민센터 문을 두드렸지만, 스스로 가난을 증명해야 하고 가족의 비루한 현실을 발가벗겨 보여줘야 했다. 행정의 매섭고 날카로운 심사(?)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신청주의라는 딱지는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멈추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각지대에 빠진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복지제도에 다가올 수 있도록 안내할 때 법의 권리가 비로소 실현된다는 말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박근혜는 복지공약을 선점하면서 대통령 당선을 움켜쥐었다. 그랬던 박근혜 정부, 지금은 가난한 이들을 솎아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올해 국정과제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조하며, 1호 과제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한 부정수급 근절을 운운하고 있다. 실제 부정수급 내용과 예산은 제공기관의 비리가 훨씬 많지만, 국가가 말하는 부정수급 근절은 복지수급자에 관한 것이다. 이에 맞춰 국민권익위원회와 관계기관들은 ‘부정수급 신고센터’를 개설하는 식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수사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가난은 나라님으로 대표되는 정부 책임이 아닌 한 개인의 능력, 의지의 문제로 환원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가 불어 닥칠 때마다 경기회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난한 이들은 늘어난다. 가난한 사람들도 누구나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헌법에서도 보장하고 있고, 부족하나마 법과 제도로도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노인, 장애인, 아동,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인간다운 삶이 당연한 ‘권리’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지 보호해야 할 수동적이고 시혜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라는 ‘국가’는 경제성장의 구호 아래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는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시장만능, 성장위주 정책은 사회복지를 시장과 가족에게 넘기고, 한국사회를 승자독식의 사회, 패자부활이 불가능한 약육강식의 사회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지금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민의 삶은 불안과 위기의 징후들로 가득하다.

늦었지만, 국가는 세 모녀의 죽음 앞에 말을 건네야 한다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할 권리를 가진 것인지 국가에 묻고 따져야 한다. 사회보장제도의 기본이 되는 사회보장기본법의 기본이념과 목적은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사회보장은 모든 국민이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자립을 지원하며, 사회참여·자아실현에 필요한 제도와 여건을 조성하여 사회통합과 행복한 복지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슬픔에 공감하는 동료가 있을 때라면, 삶이 비루하더라도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공감해주고 아파해주는 것을 사람에게 모두 맡기기에 우리 사회는 간단치 않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이제는 사람과 함께 국가가 가난한 이들을 공감해주고 아파해주어야 할 때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지 않는가.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법과 원칙이 통하는 그 ‘잘난’ 정부에 묻고 싶다. 세 모녀의 비극적 죽음 앞에 그저 눈물 훔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부끄러운 활동가가 묻는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 그 참담한 무기력에 또 참담해하면서 되묻는다. 도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으며, 사회보장기본법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것이냐고! 세 모녀의 비극적 죽음 앞에 늦었지만, 박근혜 정부와 우리는 어서 말을 건네야 할 차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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