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잊지 않겠다는 다짐’ 어떻게 지킬 것인가

[기고] ‘세월호사건’, 자기통치로서의 정치를 위한 분수령

'세월호사건'은 지금 정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주는 리트머스지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말한다면 정치의 빈곤, 더 심하게 말한다면 정치의 부재로 요약됩니다. 수구집권세력, 보수 야당세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단지 시간낭비로 보입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제도 안팎의 진보좌파정치세력도 무엇이 두려운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문제를 제기하여 불화를 일으키는 것 자체를 꺼려한다면, 진보좌파정치로서의 존재 이유가 없음을 잘 인지하고 있을 터인데도 말입니다. 진보좌파정치는 무엇들을 단순히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임을 자임'하며 이리저리 치이고 피 흘리기도 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아나가는 것 그 자체일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어디를 가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무엇이 그토록 미안한지 묻고 싶기도 합니다. 신실하게 종교를 믿는 이들이 '모두가 내 탓'이라며 가슴을 치고 회개한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많은 이들이, 하루살이가 녹녹치 않은 이들이 '내 탓'이라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니 정말 그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반응들을 살릴 수도 있었던 어린 생명들을 사지로 몬 구조에 대한 '공분', 그 구조를 묵인해 온 것에 대한 '자책'으로 이해하며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죽임이 '세월호사건' 이전부터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렇게 하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물론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따스한 마음들 자체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에 그것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그 '아름다운 마음들'이 더 나은 사회적 삶과 관계들을 만들어가는 데, 어떤 긍정적 힘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그 동안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나라가 자타가 공인하는 '자살 공화국'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 자살의 직접적 요인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철학자들의 실존적 고뇌와 같은 것에 있다기보다 적지 않은 경우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있는, 즉 '구조적 폭력에 의한 자살=타살'로 채워진 '자살공화국'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배상, 가압류를 제기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계급적 성격을 공공연히 선전하는 자본과 그것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국가권력을, 그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단식, 고공농성 등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놓은 이들을, 그리고 아메바처럼 살다가 죽어가는 많은 가난한 이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스럽겠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남은 돈 70만을 월세비로 남기고 간 '세 모녀'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려 보십시오. 삼성, 현대, LG, SK, 쌍용, 한진 등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부를 지니고 있는 거대 자본들조차도 더 가지려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착취, 수탈하여 죽음을 강제하고 있건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월세청산'이라니, 이 얼마나 기막힌 현실입니까. 물론 자본과 권력은 저 처절한 죽음을 내심 '자본주의 사회의 책임윤리의 전범'으로 삼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겠지만 말입니다.

'세월호사건'으로 이 사회 전체가 상중(喪中)이라지만, 이런 직간접적 살인행위가 일상적으로 자행되어 왔다면, 아니 지금의 이 국민적 자책과 애도의 분위기를 틈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렇기에 양식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이 사회는 그 언제부터인가 이미 상중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놓은 노동자들이 지금 '세월호사건'으로 죽어간 그 또래의, 아니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 아기들의 아빠, 엄마, 형, 누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 가족들의 슬픔과 남겨진 아이들의 눈망울들을 한 번이라도 유심히 본 적은 있습니까. 혹시 그 분들이 너무도 막강한 힘을 지닌 거대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여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기에, 그래서 결국 타협하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한 어찌해도 살 수 없는 이들이기에, 그도 아니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 사회의 '패배자', '잉여'라고 생각하기에 한편으로 '동정'이 가기는 하지만, '자책',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처럼 구조적,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현실의 고통, 아픔들과 분리된 '자책'과 '애도'라면, 그 선의(善意) 여부와 무관하게 그런 행태들이 그저 이 사건이 빨리 잊히길 바라는 자본과 권력, 그 떡고물에 취해 사는 이들을 위무하는 '축복의 기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단지 기우일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잘 알다시피 '세월호사건' 유족들이 처음 "국민여러분의 도움을 요청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했을 때, 그 핵심내용은 사태의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을 밝혀내는데 더 비상한 관심과 응원을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이른바 수구, 개혁 등 그 성격과 무관하게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며 사건보도의 수위를 정하는 언론들이 지배하고 있는 싸늘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요청은 지난 4월29일 기자회견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유족들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시지 말라는 것과 무능한 현 정권에게 '공권'으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5월4일 기자회견에서는 아이들이 하늘에서나마 다 같이 활짝 웃을 수 있도록 철저한 진상 규명이 재차 촉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련의 기자회견에서 진정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유사한 사건의 발생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적인 애도 행태' 등에 대한 냉정한 비판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족들이 성금모금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무관한 것이라며 즉각적인 중단을 요청한 것이 그 상징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일방적이고 과도한 해석일까요. 이와 관련, 혹시 '아름다운 마음'을 상징하는 성금기부가 억울한 죽임들을 발생시킨 자본과 국가권력, 그리고 그와 얽히고설킨 미시권력들의 재생산 자체를 문제 삼는 것과 거리를 두는, 그저 도덕/윤리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눈물 흘릴 줄 아는 인간임을 확인받고픈 자기인증 행위는 아니었는지 진정성 있게 자문해 봐야 할 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월호사건'은 분명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안전을 둘러싼 문제만큼 더 큰 정치적 사안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현 정권을 비판하는 이런저런 글들, 구체적인 저항의 몸짓들에 대해 '정치적이다'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정치를 제도적인 틀로 협소하게 규정하여 그것을 독점하고자 하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지만 대중이 각성하는 순간 잃을 것이 너무 많아 두려운 사회정치세력과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그 면면들을 둘러보십시오. 바로 그들이 국정의 책임자, 파트너임을, 이 사회의 리더임을 자임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런 딱지붙이기, 비난에 주눅이 들 필요도,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주권자는 단순한 유권자가 아닌, 그들에게 위임한 주권을 회수할 수 있는 '정치의 주체'이고 이 점은 그들이 스스로를 파시스트라고 생각지 않는 한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이 사회의 운영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국가에, 그 상징인 박근혜정권에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한편 그 미적지근한 대응에 분노를 터뜨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무능력의 수준에서만 설명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애초 국가가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구성원들의 안전한 삶을 보장해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국가권력도 그 구성원들에게 자유-평등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싸우지 않고 얻은 자유-평등이 언제,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듯이 그것의 구체적 표현인 사회구성원들의 안전한 삶 또한 비판, 요구, 항의하고 싸우지 않으면 한 치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월호사건'은 그것을 다시 한 번 명백히 드러내준 증거입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렇기에 지금 현 정권과 수구 집권여당은 물론 보수 야당이 이 '국민적 애도국면'을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에 골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수구 사회정치세력들이 애도 행위 자체에 반인륜적 언술, '종북'이라는 딱지, 그리고 갖은 조롱을 퍼붓고 청소년들의 정당한 집회에 대해서조차 '돈봉투 동원' 운운하며 폄훼하는 것이야말로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예 아닙니까.

그들 스스로가 그런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살아 왔기에 이해 못하는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태가 결코 비이성적 수구사회정치인들의 우발적 행위로 인식, 간주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대중의 공분을 분산시키고 위축시킬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제고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극적인 간보기는, 특히 대중의 비판과 정치적 압박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수 자유주의야당은 어떻습니까. '세월호사건'을 그저 박근혜정권에게 떨어진 불똥이라 인식하고 대중적 비판과 분노가 자신들에게로 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 나라를 자살공화국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신자유주의의 주춧돌을 놓은 장본인들 아닙니까. 그렇기에 지금 수구, 보수 정치세력들이 보이는 행태들이 일회적 병리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재확인하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세월호사건'의 처리는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자기통치성의 확대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가난하지만 선한 이들의 계속되는 죽음을 목도하면서 자책, 애도하는 가운데 그저 '미개인' 소리를 들으며 살아 갈 것인지를 규정할 중요한 분수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통치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 속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아니 자기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는 인식과 실천 속에서만 싹틉니다. 그 관심과 연대, 동일화 자체가 바로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만이 진정 그 어떤 변화의 싹, 힘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질서 있는 애도, 조문'을 바라는 박근혜정권에게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선거 때만 되면 주권자로 추앙되지만 실은 '몽매한 대중'으로 간주될 뿐인 바로 그 대중이 자신들의 애도가 정치행위 그 자체라고 자각하면서 변화의 구심들을 만들어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지하다시피 '세월호사건' 유가족들이 특별법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방선거일정 등을 고려할 때, 이 요구가 가까운 시일 안에 가시화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며 이는 가시화 자체가 지루한 과정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가장 큰 이유는 조합주의적인 보수독점적 정치구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특별법제정 여부와 무관하게 진정 '세월호사건을, 그 죽임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지금 바로 그것을 구체화할 크고 작은 실천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그것을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주체가 형성될 경우일 뿐입니다. 지금은 썩어문드러져 잊혀진 존재가 된 '4.19세대', '386세대' 등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자임하는 것 자체가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통치성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체의 형성과정은 그 '사건'의 보편화 과정과 맞물릴 때, 강한 역사적 추동력으로 실체화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사건'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되고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세월호사건'과 "죽거나 나쁘거나"의 삶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의 많은 죽임들과의 연관성을 확인, 공유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편화 과정은 '세월호사건' 유족들의 특별법제정 요구에 대한 헤게모니 정치적 응답일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마음 따스한 이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쌓아둔 무기력과 패배감을 밀어내면서 훼손된 인간적, 정치적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집단적 치유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나중이 아닌 지금 즉시 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사건을, 이 시대의 죽임을 진정 아파하며 우는, 그렇기에 서로 치유하고 치유받아야 하는 모든 이들의 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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