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는 비로소 파시즘 정국으로 돌입하고 있는 것 같다. 서울서부지법에 윤석열 지지자들이 난입한 사건은 흥분한 극우 젊은이들의 단순한 일탈로 볼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주류 정치가 지도자의 파시스트적 행태를 옹호한 게 정치적 맹동주의로 귀결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과정을 되짚어 보자. 시작은 윤석열의 밑도 끝도 없는 법원 공격이다. 윤석열 측은 공수처가 내란죄 수사권이 없는데도 서울서부지법이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은 불법이며 따라서 체포영장의 집행도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불법이 저질러진 이유는 서울서부지법의 판사가 좌편향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측은 ‘사법카르텔’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해 이러한 주장을 반복했다.
극우 유튜브에서 윤석열 측의 논리는 기존의 부정선거론과 결합했다. 극우 유튜브의 부정선거론은 선관위와 사법부에 불순세력이 개입하고 있다는 논리를 핵심으로 한다. 이 논리에서 ‘불순세력’의 주체로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등장한다. 윤석열 측의 법원에 대한 공격은 이런 부정선거론과 결합해 극우 유튜브와 그 시청층의 사법부에 대한 적대감을 배가하는 동력원이 되었다.
국민의힘이 이들과 선을 긋는 정치를 했다면 사태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공학으로 보자면 국민의힘에게도 조기 대선이 유력한 상황에서 이들과 선을 긋고 강성 지지층을 설득하는 정치를 위한 빌드업에 들어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오히려 이런 극우화된 흐름에 편승했다. 마치 윤석열 측의 법원 공격에 합리적 배경이 있다는 듯한, 즉 옹호하는 스탠스로 일관한 것이다.
여기에 보수언론의 필두인 조선일보도 가세했다. 만일 국민의힘이 그나마 계엄 해제에 일조한 한동훈 전 대표 등의 카드로 대선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면 조선일보의 포지션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한동훈 전 대표를 강제로 끌어내려 대안이 없는 상황이 되자 일단 버티기에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인지 조선일보는 윤석열 측의 답도 없는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공수처도 법원도 법 적용 및 집행이 아닌 정치를 하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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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의 논리가 통일되면 지지층은 끌려가기 마련이다. 적어도 법원에 대한 공분은 국민의힘의 적극적 지지층 사이에선 일치된 정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극우 유튜브 운영자들이 시청자들에게 ‘국민저항권’을 말하자 이것은 일종의 신호가 됐다. ‘국민이 다수 가담하면 수사기관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란 논리가 보수정치를 지지하는 커뮤니티에 빠르게 공유되었다. 방침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당이 정치적 배경이 돼줄 거라는 믿음도 작동했다. 이런 상황에 윤석열이 구속되었다. 맹동주의자들이 법원 테러에 나설 조건이 모두 갖춰진 것이다.
이들이 서울서부지법 테러를 통해 관철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힘이 우위를 갖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공화정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 무력화 되는 것도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비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거대한 백래쉬의 형성 과정을 짚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윤석열의 법원 공격이 이번 사태의 기원이 됐다는 점을 짚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실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둔 것에는 이미 그게 가능한 토양이 조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적 색깔론의 고전적 형태는 ‘친북’을 거론하는 것이다. 이번 국면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근래에는 ‘친중’이 추가되었다. 앞서 잠시 다룬 극우 유튜브의 부정선거론에도 중국 정부가 등장한다. 윤석열이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도 중국은 ‘주권침탈세력’ 등의 표현으로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지구적 규모의 세계관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대중적 차원에서 ‘중국’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어떤 개념의 연합이 이미 형성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극우 유튜브와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오히려 대중영합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의 중국에 대한 반감은 뿌리가 깊지만, 최근 심화된 것은 문화적 경제적 이유에 기인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이들이 즐기는 콘텐츠 산업에서 중국의 자본 투자와 이에 의한 영향력 확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이들에게는 북한보다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이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윤석열 체포 구속 탄핵 찬성 집회를 두고 ‘차이나 머니’ 등을 언급하며 폄훼하는 목소리가 일부 극우화된 젊은층 사이에서 잘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이다. 뒤집어 말하면 앞서 중국에 대한 반감을 키운 계층의 눈으로 볼 때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무언가는 중국과 등치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거다. 그런데 보수정치는 최근까지 포퓰리즘 문법을 활용해 상대를 권위주의로 규정하는 공세를 펴왔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이 ‘분배’라는 포장지를 씌워 추진한 경제 정책, 가령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또는 가상화폐, 금융 자산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2015년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를 통해 분출된 여성주의적 활동 역시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등치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여성주의는 극우화된 인사들로부터 공격당하는 주제 중 중국 공산당 정부와 가장 관련이 없는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이게 된 것은 ‘젠더갈등’으로 포장된 여성주의에 대한 2030 남성의 백래쉬와 더불어 차별금지법 이슈에 대한 범기독교계의 전면적 반발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들의 세계관 속에 ‘진보-더불어민주당-차별금지법-여성주의-권위주의(억압)-중국-공산주의-북한’이라는 하나의 반대해야 할 대상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뉴딜로 형성된 뉴딜연합에 반발해, 뉴딜 정책의 실제 성격과 성과가 어떻든 간에 그것을 ‘개혁’으로 규정하고 ‘반개혁’을 중심으로 자본가, 대외적 강경파, 기독교 근본주의, 문화적 보수파가 손을 잡은 ‘레이건 연합’이 형성된 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주목할 것은 어쨌든 ‘레이건 연합’은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제도를 통해 백래쉬를 기도한 반면, 윤석열 정권의 퇴행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교착 정국에 대한 자본의 최종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지를 보려면 두 가지 요건을 평가해야 한다. 첫째, 민주적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이를 만큼의 폭력에 의존하는가? 둘째, 이러한 방법론을 지지하는 대중적 열광에 근거하고 있는가?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만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백래쉬라는 형태로, 사후적으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대중이 서울서부지법 테러라는 형태로 출현함으로써 이제 두 번째 조건 역시 충족되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전체 유권자의 다수를 형성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국민의힘이 선거 공학이라는 측면에서 여론의 잘못된 신호를 읽고 조기 대선을 망치는 것은 스스로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흐름이 가시화됐다는 것, 그리고 이게 쉽게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 이 조건 자체가 정파불문의 또다른 퇴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 큰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대체 이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하는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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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