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회생’이유로 5년 임기 채우고 시도할 듯…
국민 여론·국회의원 임기 등 걸림돌 많아
작년 이맘때 일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DJP 연대를 극적으로 성사시켰고, 결국 집권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내각제 개헌 문제가 또다시 정국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99년 말로 합의된 내각제 개헌 약속이 지켜지려면 늦어도 내년 초부터는 이 문제가 공론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민련은 이런 정치 일정을 감안해 벌써부터 내각제 군불 지피기에 나섰다. 특히 자민련의 ‘내각제 전도사’ 김용환 수석부총재는 틈 날 때마다 국민회의 쪽에 내각제 개헌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다. 얼마 전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년 말에 개헌을 완성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11월27일 귀국 간담회에서는 내각제 공론화 시점을 ‘내년 이른 봄’이라고 못박았다. 자민련의 잇단 내각제 발언에 국민회의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국민회의 처지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내각제 약속은 집권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 문제는 어떻게든 국민회의가 타고 넘어야 할 산이다. 굳이 자민련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각제 개헌은 국민을 상대로 한 두 정당의 공개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걸었으니 지키기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권력을 선뜻 내놓기는 싫고…. 바로 여기에 국민회의의 고민이 있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결할 열쇠는 결국 김대중 대통령이 갖고 있다.
2002년 말 17대 총선 치러 내각제 실시?
그렇다면 약속 당사자인 김대통령은 과연 내각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최근 청와대 참모들에게는 내각제에 관한 한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떨어졌다. 구체적인 이유까지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청와대 참모들 사이에는 ‘대통령이 아직은 내각제 논의를 시기 상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를 전해들은 국민회의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근본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할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는 유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회의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내각제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직선제 투쟁을 통해 어렵게 따낸 대통령제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데다, 50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터에 쉽게 권력을 분점하기 싫은 까닭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김대통령이 내각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색다른 분석’도 있다. 다만 약속을 지키기는 하되 그 시점을 자민련과 약속한 시기보다 2년 반 늦춘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마지막 대통령 DJ, 2002년 내각제 플랜’이 청와대와 김대통령 핵심 측근들을 중심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2002년 내각제 플랜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김대통령이 5년 임기를 채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되는 국회의원 임기를 2년 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2002년 12월에 16대 대통령 선거 대신 17대 총선을 치러 내각제를 실시한다는 얘기다. 김대통령의 한 핵심 측근은 이 계획을 적극 검토하게 된 이유로 ‘사정 변경의 원칙’을 들었다. 국제법이나 민법에 보면 ‘국가나 개인간에 계약이 성사된 뒤라도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을 경우 계약을 변경할 수 있다’는 사정 변경의 취지가 담겨 있듯이,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의 내각제 합의에도 특별한 사정이 생겼으니 변경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사정’이란 두 말할 나위 없이 IMF 위기 상황이다. 건국이래 최대의 국난인 IMF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며, 그때까지만 내각제를 유보하자는 것이다. 그 동안 여러 갈래로 내각제 해법을 모색해 온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도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11월26일 한 강연회에서 “경제 비상 시국을 넘기면 언젠가는 (개헌을 논의할) 기회가 온다”라는 말로 청와대의 분위기를 간접 시사했다. 김대통령 측근들의 이러한 논리는 최근 자민련 박태준 총재가 표방하고 있는‘선(先) 경제 회생, 후(後) 내각제 개헌’이라는 입장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DJ, 역사에 남는 마지막 대통령 원해”
김대통령은 정말 자신의 후계자를 세울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를 포기하고 내각제 개헌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김대통령이 마지막 대통령으로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을 잘 아는 정치권 인사들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중시하는 김대통령의 성격으로 미루어 5년 임기도 다 채우고 마지막 대통령이라는 영예도 얻을 수 있다면, 내각제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내각제 실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된 배경은 아무래도 약속을 깨는 데 대한 부담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DJP 약속을 깰 경우 역사에 남는 것은 고사하고 영락없이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힐 것이 뻔하다. 결국‘2002년 내각제’ 안은 김대통령 처지에서 볼 때 자민련과의 약속도 지키고, 대통령 임기도 온전히 채우고, 명예도 드높이는 일거 삼득의 해법인 셈이다.‘2002년 내각제’를 검토 중인 김대통령 측근들은 이 계획이 각 정파를 두루 만족시키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추진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약속 당사자인 자민련 김종필 총리에게도 썩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는 주장이다. 김총리는 김대통령 임기 내내 2인자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데다, 2002년 총선 이후에는 총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 측근들은 17대 총선도 DJP 공조로 치른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면서, 김종필 총리도 이런 흐름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자민련이 내각제 공론화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공동 여당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2002년에라도 내각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김대통령 측근들은 또 한나라당이나 YS 민주계, TK 세력 등도 결국은 권력 분점에 동조하리라고 낙관론을 편다. 현재 어느 정파도 대통령 후보를 낼만큼 지지율이 높지 않은데다, 뚜렷한 대통령감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2002년 내각제 안을 추진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당장 개헌 반대론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력한 대통령제 지지자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지난 대선에서 천만 표를 얻은 저력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대통령에 도전할 뜻을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관계자는 총풍·세풍을 거치면서 국민이 더 이상 그를 대통령감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총재도 도덕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대통령 꿈을 포기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2000년에 탄생하는 16대 국회의원 임기를 2년 반으로 정하는 것이다. 여권 핵심부는 총선 전에 정치권이 미리 합의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대다수 정치인들은 ‘선거 한 번 치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반만 하고 그만두겠느냐’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내각제 개헌의 가장 험한 관문은 아무래도 국민 투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국민 여론은 여전히 내각제에 부정적이다. 동교동계 한 의원은 이런 복병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김대통령이 먼저 내각제를 거론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내각제 개헌안이 권력 핵심부에서는 이미 내각제 해법 1순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여권의 시나리오대로라면 내각제 논의 이전에 정치권은 먼저 정계 개편의 급류에 휘말릴 것으로 보인다. 국민회의가 경제 청문회 직후 야당 의원 영입을 재개하면서, YS 민주계와 대대적인 연정을 추진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내각제 개헌을 화두로 한 여권 내 줄다리기와 정계 개편을 둘러싼 여야간 마찰로 새해 정가는 벽두부터 시끄럽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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