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배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과 그 현실에 마주칠 때마다 나는 줄줄이 이어지는 체험의 영상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전율을 불러 일으키며 떠오르는 풍경의 하나가 바로 박종철씨의 고문치사 사건이다. 더욱 정확히 털어놓는다면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떤 메아리의 충격이다.

12년전의 그 날, 그의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울부짖음의 글을 적어내자, 동의롸 비판의 두 갈래의 목소리들이 번갈아 울려왔다. 시사를 다루는 글장이로써야 당연히 치러야 할 일상의 홍역이다. 그러나 그 날의 울림은 일상의 어느 날과 같을 수가 없었다. 몇 사람이었는지는 구태여 헤아려내고 싶지 않다. 오직 오늘에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건 핏발선 반공전사들의 외마디 절규이다.

“그따위 빨갱이 새끼 하나 죽은 걸 가지고 무슨 놈의 타령 땅 타령 사람타령인가”

이 소중하고도 비좁은 글자리에 지나간 날의 에피소드 한토막을 애써 늘어놓은 충정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울려온 전율의 메아리는 국가보안법적 혀닛ㄹ의 단편임이 분명하다. 아니,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의 연명을 보장하는 토양임이 분명하다.

구태여 분단체제의 위헌론 그리고 죄형법정주의 등 거창한 화두들을 끌어들이기 이전에 나는 그저 소박하고 그러나 너무 투박한 하나의 화두를 먼저 던지고자 한다.

이른바 국가보안을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마저 무고하게 ‘폐기처분’되어도 무방한 것인가. 짐작컨대 이렇게 물으면 거의 누군가가 고개를 가로 저을 터이다. 그러나 참담하게도 국가보안법적 현실을 겨레의 고개짓과는 거꾸로 굳어져 온다.

그 마당에 반인권적인 고문과 조작의 악순환이 얼마나 사람다운 삶의 세상을 억누르는 범죄인지를 절감하기는 어렵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들먹이면 더구나 먼나라 얘기쯤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나는 굳이 인권이라는 낱말도 떠올리고 십지 않다. 그저 소박하게 그러나 절박하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라고만 말하고 십다. 우리는 얼마나 오랜 세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다운 삶의 세상을 저버리고 살아 왔던가.

오히려 묵인과 역행과 배반의 걸음걸이를 스스로 이어왔던 것은 아닌가.

하기야 지나간 한 세기동안 우리는 제국주의적 안보체제인 치안유지법의 질서와 분단독재적 안보체제인 국가보안법의 질서 아래 살아왔던게 사실이다.

그 질곡에서의 해방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의 쌓임만큼 두려운 위력도 없다. 뒤틀린 질서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익숙해지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길들여짐이며 마비이다. 벗어버려야 할 중독의 증상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가끔 한 세기에 걸친 겨레의 인내를 확인하며 경탄으 혀를 휘드른다. 그러나 모든 인내는 인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인내의 끝, 인내의 너머를 겨냥한다. 이젠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이 열린다고 한다. 부당한 인내를 끝내야 할 시점이다. 더구나 새로운 세기와 천년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구호로 장식된다. 어느 시대인들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새 시대가 강조하는 희망은 사람이 겆는 무한한 창조의 역량에 쏠리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의 생명, 그 생명이 겆는 창조적 역량의 풍말을 옭매는 어떤 족쇄도 해체되어야 할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비록 인내의 세월이 너무 길었고 너무 때늦었지만 그것이 사상이든 양심이든, 또는 언론이든 출판이든 그리고 학문이든 예술이든 그 모두의 창조적 자유를 억압하는 틀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 원천적이고 1차적인 대상이 바로 국가보안법적 현실일 터이다.

역시 국가보안법적 현실에 스스로 몸을 부딪쳐 그 칼날을 허물어온 겨레의 눈은 밝다. 우리 모두 손을 마주잡고 ‘국가보안법 반내 국민연대’의 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제안이야말로 그 눈 밝음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연대의 전선을 위해서 어리석은 나같은 무리도 돌출의 만용을 끝없이 자제하고자 한다. 나부끼는 깃발을 따르며 오직 사람다운 삶의 세상을 열어 가는 대열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한다. 한 장 한 장 역사의 벽돌을 쌓아가는 작업은 언제나 기쁨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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