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발랄한 순간들

[기획연재] 새만금 생명 보고서(6)

[편집자주] 새만금 갯벌을 살리고 무분별한 간척 사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2003년, 갯벌을 아끼는 시민들이 환경 재앙의 현장을 기록하고, 주민들의 삶을 기록하자는 뜻에서 출발한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그동안 매월 첫째 주 토요일과 일요일 새만금 현장을 찾았다. 지난달까지 모두 120여 차례의 조사를 마쳤다.

헛된 공약으로 점철된 새만금 간척사업을 누구보다 아파했던 이들은 지난 10년의 발자취를 백서로 발간했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펴낸 <2013 새만금 생명 보고서>는 지난 10년의 기간 중앙정부와 전라북도, 토건자본들의 무자비한 개발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사라진 생명들과 주민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의 도움으로 보고서 일부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시민생태조사단의 참가자들의 목소리로 사라진 갯벌이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0년전 바다 쪽으로 썰물을 따라 걸어가던 때가 기억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 날씨는 화창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모래와 뻘이 섞인 갯벌 위를 찰박찰박 걸었다. 조개들은 먹이활동을 멈추고 발을 내밀어 모래 속으로 파들었고 게와 갯지렁이들도 구멍 속으로 숨어드는 순간이었다. 이제 곧 사라지게 될 개맛도 패각 두 개를 비벼대듯 움직여 뻘 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햇살에 바다가 반짝였고 썰물이 모래위에 만든 무늬들도 함께 반짝였다. 물고기 뛰는 모습을 보고 ‘발랄’하다는 말이 생겼다던가? 갯벌은 살아있었고 발랄하기 그지없었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시간마다 변화하며 살아있는 것들로 생기가 넘쳤다.


우리는 새만금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발랄한 순간들을 경험했다. 옥구염전에 도요물떼새들이 수 만 마리가 날아들어 쉬는 모습을 보았고, 무수히 많은 농게와 칠게들이 분주히 먹이 먹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썰물과 함께 바다로 걸어 들어가며 온갖 생물을 관찰하던 그 순간도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그때가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거대한 방조제가 바닷물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 뒤로 우리는 밀물도 썰물도 없는 갯벌에서 조개와 고둥, 갯지렁이들의 죽음을 기록해야했다.

“아직도 새만금에 가요?”

매달 첫째 주 토요일과 일요일.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모여 조사를 한다. 올해로 꼬박 10년째가 되었고 11월에 120번째 조사를 한다. 지인들과 약속을 정하려다가 이번 주에는 새만금에 간다고 하면 대개 “아직도 새만금에 가요?”하고 묻는다. 그 말이 속상하고 서운하다. 마치 “새만금은 끝나지 않았어?”, “새만금에 아직도 볼 게 있어?”하는 말처럼 들려서다.

방조제를 막은 뒤 새만금이 정말 죽었다면, 끝났다면 그것은 더욱 큰일 날 일인데 말이다.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도 생태계에 영향이 없다는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영향이 있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계속 들여다 봐야하지 않나? 하지만 사람들을 원망하기에는 새만금이 너무 멀다. 사대강 사업이나 원자력발전이 그렇듯이 너무 거대하고 구조적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시민들이 알고 덤벼들어 싸우기 어려운 게 사실이고, 이미 사람들은 강과 갯벌에서 멀어진지 오래여서 관심도 적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매달 시민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새만금에 모였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120회 조사, 다섯 권의 활동백서

그사이 네 권의 활동백서가 나왔다. 이제 10년을 마감하며 내는 다섯 번째 백서가 나올 것이다. 시민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모임이지만 조사의 중심에서 줄기차게 활동한 몇몇 조사단의 희생 없이 10년을 지속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이들의 행보는 민담에 나오는 주인공을 닮았다.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그 다음으로 나가는 옛이야기의 주인공 말이다. 폭우와 폭설, 추위와 더위는 아무리 모질고 호되어도 조사단의 직진에 묻혀버렸다. 더 어려운 것이 개개인의 가정사와 건강, 경제문제들이었다. 누구는 결혼과 출산으로 못 오고 누구는 취업에 발이 묶여 못 오게 되었다. 누구는 아이가 세 살이 되자 아이와 함께 다시 나오기 시작했고 누구는 실업상태를 이용해 다시 열심이었다.

여럿이 함께한 덕분에 고스란히 10년을 버틴 셈이다. 우리는 수많은 생명의 죽음을 기록했고 바다를 잃은 어민들의 아픔에 증인이 되고 목격자가 되었다. 어려울 때마다 '그래도 10년은 조사를 해봐야 조사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하는 말을 들었다. 왜 10년 이었을까? 2005년에 나온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1주년 활동백서에 처음 생각이 적혀 있다. ‘10년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하는 바람에 그 원형을 알기 힘든 한국사회에서 10년 정도 한 지역에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모니터링 한다면 언젠가는 그 결과를 가지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10년의 이유였다.

절망? 무력감? 뭐라도 하자!

나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꾸려질 때, 곁에서 조사를 돕고 기록하는 일만 거들어줘도 조사팀이 외롭지 않을 거라는 말에 혹해서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새만금을 오가는 게 큰 부담이었고, 하루에 같은 길을 여러 번 오가도 처음 가는 길처럼 느껴지는 길치인 것도, 양쪽에 물이 있으면 어느 쪽이 저수지고 어느 쪽이 바다인지 모를 정도로 지역과 지리에 아둔한 것도 문제였다. 새만금에 대해, 갯벌에 대해 워낙 몰랐기 때문에 무엇이든 수첩에 자세히 적어남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새만금이 막힌 뒤 절망하고 무력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뭐라도 하자’ 싶었고 움직이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아는 나이이기도 했다. 폭력적인 개발은 이미 수없이 보았고 지는 싸움이라도 참여하면 힘이 된다는 사실을 믿었다. 또 영원히 지는 싸움은 없다고 믿는다. 새삼 곁에서 함께 한 사람들에게 고마운 것이 묻고 또 물어도 대답을 해준 점이다. 분위기는 전염된다. 우리는 한번 구경 온 사람들, 우연히 다녀가는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답하고 설명해준다. 조개이름, 게 이름, 새 이름, 식물이름, 길 이름, 마을이름, 갯등이나 갯벌의 이름……수없이 묻고 대답하며 우리는 지식과 함께 지혜를 키웠다.

탐욕과 어리석음이 낳은 세계 제일의 자연 파괴 사업

신기한 생물들 앞에서 “이게 뭐에요?”,“이름이 뭐에요?”하는 질문만큼이나 많이 하는 질문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사업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아마도 선거를 위해 급하게 지도를 놓고 줄을 그어 바다를 방조제로 막을 계획을 세웠을 거라는……. 어쩌면 농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서야 이렇게 바보 같은 나쁜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새만금은 아주 넓다. 군산에서 부안까지,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막아선 방조제는 워낙 길어서 차를 타고 달려도 한참 걸린다. 처음 온 사람들은 조사 포인트마다 자동차에서 내리면 묻는다. “여기도 새만금이에요?”하고.


한마디로 정치적 야욕과 경제적 탐욕, 자연에 대한 무지가 낳은 사업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부동산개발에 대한 기대감이 한 몫 했다는 설명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인상이 고약해진다. 인터넷에서 새만금을 치면 새만금의 주인인 어민들 이야기, 생물들 이야기는 없고 부동산업체 이름만 뜨더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인 뒤 “에휴” 한숨을 쉬고 흥분을 가라앉힌다.

개발의 주체들은 세계 제일이라는 말로 자랑했지만 엄청난 자연파괴 사업이 가능한 것은 얼마나 광활한 지역인지 국민들이 상상할 수없는 규모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지역이 포함된 결과 누구도 나의 일, 우리 지역의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시대 때 만들어진 ‘공유수면 매립법’, 누구나 자신이 메운 땅은 임자가 될 수 있다는 악법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답도 들었다. 엄연히 바닷가 주민 공동체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갯벌이고 바다지만 정부와 대기업이 짜고 매립을 하면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국가가 하는 사업이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주민들은 평생의 일터를 잃어버렸다. 여하튼 내 수준에서 그렇게 이해했다.

2003년 6월에 새만금 4호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었고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그해 11월부터 지속적인 조사와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2006년 3월에는 한국농촌공사가 외측 방조제 물막이 공사를 마무리 하면서 바다가 완전히 막혔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갯벌이 마르기 시작했다.

“죽기밖에 더 하겠냐?” 하는 분위기가 가장 어렵다


매달 첫째주 토요일 저녁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조사단은 지난달 조사한 내용으로 세미나를 연 뒤 다음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만금 일대에 흩어져 조사를 한다. 처음에는 물새팀, 저서생물팀, 식물팀, 야생동물팀, 문화팀, 영상팀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사람의 능력과 관심을 중심으로 물새팀과 동식물팀, 문화팀으로 정리되었다. 저서생물팀은 갯벌이 막히면서 좀 더 전문적인 장비와 연구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차츰 활동이 줄었다.

겨울은 추웠고 여름은 더웠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갯벌에서 허둥지둥 철수하기도 하고 눈보라에 갇혀 어느 쪽이 바다고 어느 쪽이 육지인지 몰라 당황했던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고생스럽기는 해도 자연이 보여준 아름다운 풍광에 행복하기 그지없을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방조제가 막힌 뒤 조사단은 죽어가는 갯벌을 보며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새만금은 아직도 살아있고 아름다운데 사람들은 방조제 관광이나 오고, 갯벌은 개발세력에게 내 맡겨져 파헤쳐지고 메워져 썩어가고, 결국에는 죽어도 그만인 분위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조사 때는 도요물떼새를 많이 보았다. 포크레인으로 매립이 한창인 곳 곁에도 아직 갯벌이 남아있고 유기물이 남아 있는 곳에는 게와 조개가 살고 있다. 덕분에 멀리 북쪽에서 날아온 도요새들, 물떼새들이 잠시 쉬고 먹이를 먹기 위해 여전히 새만금 갯벌에 머문다. 공사장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물새 숫자를 세는 동안 아직 남아있는 아름다운 습지 풍경에 마음이 더 안타깝다.

두 번째 질문은 “왜 이런 일이 계속 진행됩니까?”하는 것이다. 방조제가 완성되는 시기를 앞에 두고 새만금을 위한 삼보일배 운동도 있었고 갯벌매립을 막아야한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공사를 강행하라고 허가해주고 개발세력에게 힘을 실어준 결정적인 사건은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그 뒤에는 개발을 해서 이익을 볼 정치경제 세력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연명하는 보수언론이 있었다.

방조제가 완공되고 강과 바다가 통하지 않게 되자 사람도 생물들도 생존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운동은 시르죽은 듯 하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만금은 끝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언론은 서로 짠 것처럼 새만금이라는 말 자체를 신문에 싣지 않는다. 아예 언급을 안 해서 대중들이 잊게 만들려는 것이고 실제로 대중들은 잊었다. 농지를 얻겠다던 계획이 사라지고 공장부지가 만들어져도, 유독가스 냄새가 흘러 다녀도, 시화호처럼 폐수가 넘쳐도, 이사하야만 처럼 모기가 회오리 기둥을 이루며 사람들을 괴롭혀도, 자손 대대 폐수처리 비용을 감당하며 어렵게 살아도, 영향 없을 거라던 생태계가 고스란히 죽어가도 들여다보고 제어할 사람들은 없다.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으니 ‘밥이 똥이 되는’ 어리석은 일이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남아있는 갯벌을 지켜야한다

배우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변할 수 있다. 2006년이었던가?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과 함께 일본 동경의 매립지역을 찾아간 적이 있다. 동경만이 차츰차츰 매립되어 현재와 같은 거대도시가 되었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그 과정을 기록해 전시하고 있는 것도 인상 깊었지만 강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작은 갯벌들이 남아있고 마을마다 그곳의 자연을 지키는 습지보호운동이 계속되는 게 놀라왔다.

사실 내가 본 야쯔 갯벌이나 도시 곁의 작은 갯벌들은 그 때 나의 오만한 표현을 빌리자면 ‘시궁창 냄새 나는 손바닥 만한 갯벌들’이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었다. 갯벌을 다 망친 뒤에 이렇게 더럽혀진 곳을 지키겠다며 날마다 새를 카운팅하고 조개를 세다니! 게다가 우리는 대체 새만금에 무슨 짓을 한거야! 하는 자괴감도 컸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보다 더 나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 새만금 지역은 개발세력들 외에는 ‘출입금지’이다. 새를 보러 공사장 안을 들어갈 때에도 우리는 제지를 당한다. 모 아니면 도라는 듯이 새만금은 이제 끝났다고 할 게 아니라, 생태적으로 보호하고 살려야 할 곳은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지역주민들이 자기 마을의 갯벌을 지키려 애쓰던 일본의 습지보호운동이 새삼 부러워진다.

2012년 겨울에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일본 이사하야만 갯벌매립지역 주민을 찾아갔다. 이사하야만은 여전히 갯벌매립을 두고 주민과 환경단체가 개발세력을 대상으로 소송을 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방조제로 막힌 바다도 주민들이 원하면, 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결정하면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10년의 기록이 증거로 채택될 날이 오기를

2006년 대법원 판결은 새만금에 내린 사형선고와 같았다. 새만금 갯벌과 갯벌에 기대어 살아가던 주민들, 생명들은 아우슈비츠행 기차를 타고 있다. 방조제 마지막 구간을 막으라는 선고를 하면서 판사는 ‘피해 증거가 없다’고 했다. ‘물막이공사가 생태계와 주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증거가 없으므로’ 내린 선고라니!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지난 10년 동안 새만금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차곡 차곡 기록했고 물막이공사의 영향에 대한 증거들을 모은 셈이다. 시민의 눈으로 보고 기록했지만 보고서를 읽어보면 어린아이의 판단으로도 그 말이 거짓이란 걸 알 수 있다. 언젠가 환경단체든 지역주민들이든 이 증거를 갖고 다시 싸워 갯벌을 되살릴 수 있기 바란다.

그 사이 우리는 상을 타기도 했다. 2006년 환경기자협회가 주는 올해의 환경인 상이었던가. 사실 방조제가 막힌 해에 받은 상이라 기뻐하고 좋아할 여유는 없었지만 따뜻한 칭찬이 담긴 기사에 기운이 나기도 했다.

“그 뒤 이달까지 만 3년 동안 이들은 강풍이 불고 큰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새만금 개펄에 모였다. 그 사이 새만금 소송이 대법원에서 패소하고, 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가 끝나는 등 새만금 간척사업은 점점 되돌리기 힘든 방향으로 치달았지만 이들의 새만금 행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렇게 조사 때마다 30여명 안팎의 시민들이 참여한 결과, 지난 3년 동안 시민생태조사단에 참가해 새만금을 다녀간 사람은 800명이 넘는다” - 2006년 12월 24일 한겨레신문

그 뒤로 다시 7년이 흘렀고 이달까지 만 10년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지난 10년 사이 사십대였던 조사단원들은 오십대 중늙은이로 변했고 이십대는 삼십대가 되고 어린이들은 자라 청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살이의 10년이나 의미를 둘 뿐, 자연의 10년은 찰라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와 달이 움직이고 수 만년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만들어진 갯벌 아니던가! 수많은 생물들이 갯벌에 적응해 살기까지 또 수 만년이 걸렸을 터이다. 사람들이 자연에게 큰 상처를 냈지만 자연에게 10년쯤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자연의 일은 끝난 게 없다. 새만금은 끝나지 않았다.

[연재 순서]

1. 새만금 조류 조사 10년, 8만 마리의 도요새는 어디 갔을까? 오동필 물새팀 실행위원
2. 군산에서 가장 큰 포구, 이제는 황량함만 자리해. 여길욱 저서생물팀 실행위원
3. 새만금 지역 어민, 지금은 어떻게 사나? 김경완 문화팀 실행위원
4. 내가 만난 새만금 어민. 김경완 문화팀 실행위원
5. 지금도 돈이 되는 실뱀장어 어장. 김회경 동화작가
6. 새만금은 끝나지 않았다. 생태조사단 10년. 이성실 어린이책 작가
7.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오동필 실행위원 인터뷰. 문주현 참소리 기자
8.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문주현 참소리 기자
9. 소외받은 자의 우울한 완장. 김형균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원
덧붙이는 말

이성실 작가는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원입니다. 사진은 오동필, 이성실, 오승준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원이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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