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감금 딜레마

밤 늦게 다니는 두려움?

Pixabay - 울타리 속에 서 있는 여성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가.” 어린이, 청소년 시기가 끝난 지도 한참이 되었는데 아직 원가족은 매일 내게 전화 통화로 이렇게 말한다. 언니가 새벽까지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밤중에 학교나 독서실에서 집으로 갈 때 가끔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물리친다며 ‘이상한 사람처럼 걷기’ 스킬과 ‘무섭게 눈 뜨기’ 스킬을 혼자 연마했다. 빙글빙글 걷다가 엘리베이터에 남성패싱과 둘이 타면 불안한 느낌은 집 문이 닫히고 잠길 때까지 지속되곤 했다.

밤 10시, 시스젠더 남성 친구의 집에 놀러가기 위해 기차에서 내렸다. 친구의 집까지는 30분 정도 걸어 가야 했다. 가로등도 없이, 동네가 깜깜했다. 이렇게 밤에 혼자 걸어다니기 무섭겠다. 나는 문득 친구가 걱정되어 말했다. 그러자 그는 반문했다. 왜 무서워? 그는 나의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인 밤의 무서움이 뭔지 몰랐다. 집에 도착해 문이 닫히고 잠겼다.

울타리를 나올 수 없는 돼지

어린 돼지가 철제 스툴 안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출처: 새벽이생추어리

새벽은 스도쿠판처럼 스툴이 빽빽이 쳐 있는 종돈장에서 구조된 돼지다. 여느 돼지들처럼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면 분명 새벽은 이미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다. 그는 그의 몸을 식량 그 이상 그 이하로 보지도 않는 감금시설에서 벗어나 ‘생추어리’라고 불리는 훨씬 더 넓은 곳으로 왔다. 하지만 이곳도 울타리가 쳐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한 번 들어온 이상 새벽은 다시 나갈 수가 없다.

새벽이 울타리 밖을 바라보고 있다. 출처: 새벽이생추어리

새벽은 왜 나갈 수 없을까? 왜 생추어리에서조차 인간들은 문을 걸어잠글까? 돼지가 반드시 감금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사회가 돼지가 혼자 걸어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새벽과 같이 고기용으로 가축화된 집돼지의 경우 혼자 걸어다니는 것을 목격당하였을 경우 도살당하든 포획당하든 죽을 가능성이 100%이다. 돌보겠다는 인간들은 100% 죽음보다 보호를 택했다. 그렇기에 새벽은 감금된다. 개선된 환경에서도 이동할 자유는 없다. 새벽을 돌본다는 인간들도 울타리를 넓히기 위해 필요한 금액과 필요한 노동력을 가늠할 뿐이다.

집을 나올 수 없는 개

지금의 개는 어디에 있나? 돼지처럼 한 감금시설에 다수가 들어있기보다는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집집마다 배분되어 있다. 외모, 종, 나이… 어떤 이유로든 선택받지 못해 배분에 실패한 개는 약물을 투여받고 죽임당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개가 계속 만들어진다.

돌보던 개가 탈출을 감행했다. 넘기 어려운 것을 넘어갔고 내딛지 않았어도 될 발걸음들을 내딛었다. 사실 난 그게 분명한 선택이고 의사표현으로 느껴졌다. 그냥 그렇게 인정하고 작별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으면 했다. 개는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죽임 당할 확률이 돼지보다는 낮다. 차를 잘 피하고, 산 속에 잘 들어가고, 음식을 잘 찾아 먹기만 하면 자유를 누리며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와 그의 삶은 나의 것인 적이 없었으므로 나의 집을 떠나간 그를 다시 붙잡아 집에 가두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소유한 적도 없고 소유하고자 한 적도 없었는데 소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음식으로 속여 포획했고, 켄넬에 구겨 넣었고, 집 안에서 다시 켄넬 문을 열었다. 1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그는 작은 켄넬에 구겨진 채로, 멍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잡은 것에 대해 많은 축하를 받았으나 이게 축하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인간과 관계맺는 것을 이미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폭력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 무시해야 했다. 그렇게 나가고 싶었던 개는 다시 집안에서 지냈다.

개가 목줄을 착용해야만 이동할 수 있음을 애도하는 전시 작품과 글. 출처: 필자 제공

마을이 요양원이 된다면

책 ⟪돌봄, 동기화, 자유⟫에는 보호와 감금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요양원 ‘요리아이’의 사례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요리아이에서는 인지증을 겪고 있지만 계속 걷고자 하는 할머니 미쓰코 씨를 감금하는 것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느낀다.

‘개인적인 이유로 타인을 속박하면 범죄 행위인데, 어째서 공적인 곳에서는 속박이 허용되는가. 돌봄 현장에서 이뤄지는 제어와 격리는 누구를 위한 행위인가. 어째서 우리처럼 돌봄이 직업인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그런 일을 하는가.’ (무라세 다카오, ⟪돌봄, 동기화, 자유⟫, 다다서재, 2024, 195~197.)

그리고 글쓴이이자 요리아이의 직원 무라세 다카오는 돌봄을 도맡은 사람들이 하는 격리와 속박이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우리 사회는 돌봄 현장이 합법적 제어와 격리가 이뤄지는 장소이기를 비밀리에 요구하고 있다. (중략) 돌봄을 정성스러운 무언가로 채색함으로써 떳떳하지 못한 가해자성을 사회 전체가 숨기고만 있는 것이다. 돌봄 현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들은 돌봄 현장의 특징적인 성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 있는 병리가 구체적인 형태로 돌봄 현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무라세 다카오, ⟪돌봄, 동기화, 자유⟫, 다다서재, 2024, 195~197p.)

그래서 요리아이는 새로운 방식의 돌봄을 시도한다. 미쓰코 씨가 걷는 곳들을 따라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그를 지켜봐달라고 부탁하여 요리아이 주위 반경 200m의 세상에 미쓰코 씨를 돌보기 위한 중계기지들을 만드는 것이다. 이 중계기지의 역할은 미쓰코 씨가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요리아이와 전화로 알리는 것. 중계기지의 사람들은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자신의 상황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중계기지의 사람들은 미쓰코 씨를 발견하면 할 수 있는 만큼, 기꺼이, 기쁘게 미쓰코 씨 돌봄에 참여하게 된다. 비감금, 자발적 공동 돌봄으로 인해 미쓰코 씨는 자유를 얻고, 요리아이는 돌봄의 책임을 나눠 갖게 된 것이다.

비감금 돌봄의 가능성

비감금 돌봄을 상상하자. 비감금 돌봄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는 감금 돌봄의 많은 경우 소수의 사람들에게 돌봄이 전가 되기 때문이다. 감금 돌봄이라는 것은 정해진 공간으로 가야 돌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에 돌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돌보는 자가 그곳까지 가거나 돌보기 위한 물자를 그곳으로 가져가는 시간과 여력을 내어야 돌봄이 성립될 수 있다. 소수의 집중된 에너지로 가능한 것이 감금 돌봄이다. 체력적, 감정적 소진도 가까워우며 책임지는 소수가 쉬면 돌봄이 무너져 지속가능하지 않다.

또한, 갇혀서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돌봄의 기간 동안 그 공간을 거의 전유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이 딛는 모든 땅에 인간들의 가격이 매겨져 거래의 대상이 되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애초에 피돌봄자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란 없다. 인간 피돌봄자라면 그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비인간 피돌봄자라면 우선 그가 ‘존재’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땅부터가 부재하다. 돌봄 제공자와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도대체 어디로 가서 살아가나? 감금 돌봄만이 가능하다면, 소수만이 참여하게 된다. 그에 더해 그 (돌봄노동에 큰 시간과 여력을 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안해지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동산’으로 번역되는 삶터를 마련해야 한다. 넌센스다.

비감금 돌봄을 상상했을 때, 핵심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피돌봄자이다. 돌봄을 받는 자가 이동이 자유롭다면 시공간의 제약 없이 돌봄이 가능하다. 또, 자신이 낼 수 있는 여력만큼의 기꺼운 기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잔디가 일시적으로 울타리 밖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 출처: 새벽이생추어리

‘자유와 안전은 서로 밀어내는 자석처럼 사이가 나쁘다. 우리는 반발하는 자기장 속에서 타협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무라세 다카오, ⟪돌봄, 동기화, 자유⟫, 다다서재, 2024, 195~197.)

돌봄의 행위자들은 언제나 돌봄-감금 사이에서 모순과 회의를 느낄 것이다. 감금과 속박이 고증하는 것은 돌봄 현장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감금 돌봄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 존재에 대해 사회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감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 시야를 외부로 돌려야 한다.

원가족이 늦은 밤 시간에 외출을 금지한다면 문제는 젊은 여성이 어두운 거리에서 안전하지 않게 하는 사회에 있다. 새벽이 한 번 들어간 울타리에서 다시 나올 수 없다면 문제는 혼자 다니는 돼지에게 위험한 사회에 있다. 개가 줄에 묶여서만 집밖으로 나올 수 있다면 문제는 혼자 다니는 개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회에 있다. 노인이나 어린이가 해코지를 당할까봐 혼자 다니는 것이 금지된다면 그건 노인과 어린이에게 안전하지 못한 사회를 문제 삼아야 한다. 감금 돌봄은 피돌봄자에 대한 사회의 문제를 증명한다.

당장 오늘, 내보낼까 가둘까? 속박하고 안전하게 할까, 자유롭고 위험을 감당할까? 돌보는 사람들은 타협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죄책감을 수반하겠지만 이것이 그저 사회의 병폐가 드러난 것임을 잊지 말자. 그러면서도 계속 ‘비감금 돌봄’이 가능할 조건이 무엇일지 상상하자. 피돌봄자에게 위협을 주는 사회를 경계하고 지탄하고, 지역의 공동 돌봄에 참여하여 돌봄의 책임을 자발적으로 나누자. ‘혼자 걸어다니는 돼지’처럼 익숙하지 않은 타자가 돌아다닐 때의 어떤 변수와 위험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 위험이 해당 ‘종족’을 감금하거나 몰살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상. 그렇게 된다면 자유로 향하고 있지만 안전을 중요시해 꽁꽁 잠가 놓았던 감금 돌봄 시설들의 문이 서서히 열릴 수 있지 않을까? 밤 늦은 시간에도- 목줄 없이-울타리가 텅, 하고 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가 그린 돼지 생추어리. 울타리 문이 열려 있다. 출처: 필자제공
덧붙이는 말

시옷은 동물이 겪는 폭력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동물권 활동을 시작했다. 얇든 굵든 길게 활동하기 위해 살처분폐지연대 등에서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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