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 MAKER
평·화·칼·럼
반말로 관계 바꾸기
김정은 / 평화인권연대 회원
공동육아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공동육아에 대한 책과 논문들을 읽으며, 무척 놀랍고 솔직히 당황했던 점이 있었다. 교사와 아이들이 반말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교사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여성운동을 하는 대학생그룹에서 학번, 연령, 성별에서 오는 억압을 넘어서기 위해 별명으로 상대를 호칭하는 문화를 접하지 않았다면, 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도교육에서 공동육아를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반말과 별명의 문제다. 그럴것이 좋다고 하는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익숙하게 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아까 조용히 앉아있으라고 하셨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지 못했나요?”, 혹은 “선생님께서 동화책을 읽어주시는데 누가 이야기를 하지요?” 등의 얼른 들어도 어법에 맞지 않는 말들을 사용한다. 방정환이 아이들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기 위해 어린이라는 말과 존댓말을 쓰도록 했던 것은 그 당시 어른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인 일이였다지만, 아이들의 인권운동에 한 획을 긋는 사건 중에 사건이었다. 현재 유치원 교육에서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만, 교사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교사를 더 높이는 말들을 끌어들이면서 함께 존댓말을 썼던 참된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공동육아운동에서 반말 문화는 교사와 아이들과의 평등한 관계, 친구 같은 관계를 만들어가고자 함이고, 더 나아가 연령, 직업에서 오는 차등적인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필 반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전에 존댓말이 어떻게 사용되고 어떤 문화를 형성했는가 따져봤으면 한다. 신분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를 차별로 가능하게 한 몫 했던 것이 존칭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칭을 하는 것은 당연한가? 그렇다면 같은해 2월 28일 생과 3월 1일 생의 보이지 않은 서열은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 혹은 재수, 삼수한 사람에게 학번이 깡패라며 선배 행세를 할 수 있던 문화적인 힘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생각해 보라. 바로 호칭과 존칭어였다. 존칭문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공동육아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솜사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반말로 지내보니, 존댓말 속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관계를 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관계로 바꿀 수 있었다가 아닌 접할 수 있었다고 표현한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운동을 한다는 교사 중에 어떻게 아이와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말을 사용하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별명 등으로 바꿀 수 있다면 금방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것은 교사의 권위,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버릴 수 있겠는가의 문제다.
공동육아의 교사들은 끊임없이 아이들의 문제나 운영의 문제 등을 논의해서 해결하는 협력문화를 만들고 있는데, 새내기 교사인 내가 너무나 편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처음에 도글방이라는 4세 아이들을 맡았을 때 이 아이들과 무슨 대화를 하고 무슨 프로그램을 할 것인가 너무 막막했다. 그런데 27살의 나이를 잊고 4살의 아이 이야기에 푹 빠진다. 사실 6-7세의 아이들과 대화하면 내가 어른하고 이야기하는지 아이와 얘기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 예전에는 ‘아이가 어른 말을 알아들으면 그게 어른이지 애냐’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이해했다면, 지금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며 대화하는데 어느새 길들여지고 있다. 대화로 안되는 일을 매로 한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도 존댓말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존댓말을 쓸 수 있다면 반말을 써도 서로에게 오해 없는 관계로 될 수 있는가 되돌아보자.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