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기금이요? 그런게 있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이 언제나 그렇죠. 생색 내는데 골몰하고, 실제 도움은 안되고…”
의료용 컴퓨터기기를 만드는 벤처기업인 M사 황아무(남·37) 사장에게 구조조정기금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게 투자하는 기금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기대를 갖고 알아봤지만, 웬만한 기업은 얼씬도 못하는 ‘귀한 돈’이란 것만 확인했다.
최근 촉망받는 M&A 회사로 주목받고 있는 N사 이아무(남·34) 팀장도 마찬가지. 초기 투자로 목돈이 많이 들어가 자금사정이 아주 어렵지만 돈 나올 기미가 없다. 기금쪽에 알아봤지만 아예 지원대상에 포함도 안된다는 면박만 받았다.
수출비중이 크거나, 첨단산업기업 및 벤처기업, 일시적인 자금압박이 있는 기업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구조조정기금’ 벽이 너무 높다는 벤처기업가들의 불만이다. 중소기업을 위한 기금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5대그룹 계열사와 공기업은 지원대상에 빠진다’고 명시까지 했지만, 실제로 돈이 필요한 곳으로 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8월 재경부 금융기업구조개혁반에서 기획한 구조조정기금은 산업은행과 국내 25개 금융기관이 공동출자해 1조6천억원 규모로 운용되고 있다. 재경부는 내년에 기금을 10조원까지 늘려 약 3천개의 기업에 자본금 증자(통합기금) 또는 단기부채의 장기부채 전환(부채기금) 등 지원을 한다는 계획이다.
9월엔 서울부채조정기금(부채), 한강·무궁화·아리랑구조조정기금(통합) 등 4개 펀드사가 설립됐고 이들이 자금을 운용한다. 지원대상 기업의 선정, 지원조건 등 실질적인 경영은 투명성과 객관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모두 외국인 펀드매니저가 맡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지원 폭이 너무 좁다는 것. 아직 시행 초기이긴 하지만 그동안 지원한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기금의 지원대상이 역시 ‘덩치’와 ‘이름’있는 곳에 한정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먼저 투자를 시작한 곳은 한강구조조정기금. 스커더캠퍼인베스트먼트사가 매니저인 이 기금은 지난 11월 말 탄광업체인 동원, 육가공업체인 하림, 전자부품업체인 우영 등 3개사에 6백억원을 지원했다.
이어 무궁화기금(템플턴에셋매니지먼트)이 대창공업에 50억원, 아리랑기금(에스에스비티시)이 텔슨전자에 60억원을 지원.
최근 무궁화기금이 문구업체인 모나미에 3백억원을 투자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빼면 지금까지 지원된 기업은 5개사에 지나지 않는다. 내년까지 3천개사에 지원한다는 애초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게 분명하다.
더구나 지원받은 회사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됐는지 불투명해 다른 중소기업들의 원성이 큰 상태. 중소기업 관련자들은 “외국인 펀드매니저들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들만 골라서 지원하고 있다”며 “기금규모를 늘려서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무궁화기금을 운용하고 있는 마크 모비우스 템플턴사 사장은 “지원기준은 자본금 규모가 아니라 외부자본 유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영자의 마인드”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불만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결국 한국에서 멀쩡한 기업이 연쇄도산하는 것을 지켜본 이들 외국인들이 안전보장 없는 중소업체에 돈줄을 풀리 없다는 얘기다.
기금 액수도 크게 모자라다. 국내 제조업체 전체 재무구조를 부채비율 200% 미만으로 낮추는데 필요한 돈은 30조원이 넘는다는 재경부 추정을 감안할 때, 4개 기금의 목표치인 10조원으론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은 뻔한 일. 기금규모를 늘리기 위해선 외국인투자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지만 스커더사가 1억달러를 유치하겠다는 방침만 밝혔을 뿐 구체화된 것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또 자금지원을 계기로 경영간섭을 우려한다. 각 기금의 외국인 매니저들은 “자문 요청시 조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최근 웅진출판에 대한 투자여부를 놓고 주식발행 문제를 두고 국내 경영진과 마찰을 빚는 등 돌발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돈 없는 중소기업들은 이래저래 설움만 키워가고 있다.
/ 배영환 기자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