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배우던 ‘디따’ 호사로운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훤출한 키에 수려하게 잘 생긴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림을 썩 잘 그렸다.

내가 붓을 잡고 끙끙대면 그가 가끔 와서 내 붓을 대신 잡아 주곤 했다. 그의 붓이 한 번 스치기만 하면 캔버스는 곧 바다가 되고, 산이 되고, 배가 되고, 구름이 되었다.

건축공학도인 그는 장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축물들 중의 하나를 설계하게 될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가 교만한 표정을 짓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유난히 진득하지 못했던 내가 화실을 들락날락 거리면 다른 친구들은 “저 녀석은 잎 하나 그리고 나가서 술 한 잔 마시고, 꽃 하나 그리고 나가서 술 한 잔 마시고…. 그러다가 그림은 언제 다 그리냐?”고 나무랐지만 그 친구는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비슷한 무렵에 군에 입대했는데, 그가 그만 작전 중에 탱크에서 떨어져 전신마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함께 그림을 그리던 친구가 면회를 왔다가 전해 주고 갔다.

제대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 TV를 보고 있는데 그가 나왔다. 군대 병원에서 자기를 간호하던 간호장교와 결혼을 했고, 지금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엎디어 있는 그에게 부인이 붓을 물려주고 일일히 물감을 묻혀주는 장면도 나왔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훌륭했다.

그랬을 것이다. 그 간호장교가 아니더라도 그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 그의 수려한 용모와 거의 완성태에 가까운 인품은 전신마비라는 그의 결점을 넉넉히 감싸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친구들과 연락을 해서 한 번 찾아가자고 말이 오갔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그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그 얼마 후였다. 전신마비 환자에게 늘 죽음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전신 욕창 때문에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났고 대전의 국립묘지에 묻혔다고 했다.

간다간다하면서도 미루기만 하다가 3년이나 지난 다음에야 나는 대전의 국립묘지에 혼자 다녀올 수 있었다. 안내소에서 잘 생긴 군인이 적어주는 위치표대로 그의 묘를 찾아갔다.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못난 친구가 이제야 왔다 가네. 용서하게.

김준호, 이렇게 빨리 떠나려고 자네는 세상의

수려함을 다 모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자네 붓이 한 번 지나간 자리면 그것이

곳 하늘이 되고, 바다가 되고, 산이 되고, 구름이

되었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정요한, 전남숙,

김미화, 임동원, 이춘임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네. 모두들 자네를 그리워하더군. 나는 여기에

와서야 대성통곡이라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를

실감하네. 운운…”

손수건을 펴서 네 귀퉁이를 돌멩이로 눌러 놓고, 엎드려 절을 하다가… 펑펑 울다가… 내려왔다.

며칠 후 현충일까지 그 손수건이 그대로 잘 남아 있었는지…

남편의 묘에 아이들과 함께 찾아 왔던 부인이 그 손수건을

보았는지… 눈물 자국이 선명한 그 손수건을 그대로 두고 갔는지…

아니면 곱게 접어 챙겨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현충일이 되면, 자신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친구의 잘 생긴 옆 얼굴이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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