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얼마나 더 세련되어야 하는가?

[칼럼] 공지영 김여진에게 기대지 말자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

세상이 변한만큼 이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운동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낡은 구닥다리 책 같은 구래의 성긴 목소리나 주장이 아니라 ‘새롭게’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고 한다. 좀 더 나아가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일반적인 투쟁방식이라 할 수 있는 집회 혹은 거리농성이 이제 새삼스러울 것 없으니 투쟁방식도 좀 변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투쟁에 땀방울이 헌근한 활동가에게 낡은 방식을 더이상 고집하지 말고 시대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며 타박한다. 그러면서 활동가들이 소리 높여 주장하는 낡은 그 ‘투쟁’도 좀 더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부드럽고 세련된 수사(Rhetoric)로서 다가서야 한다며 조용히 충고하기도 한다.

활동가에게 부당한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의 날 것 그대로의 현장의 절박함도, 땀방울이 헌근이 베여있는 분노도, 대중에게 ‘잘’ 전달되기 위하여 부드럽고 편안한 수사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중요하다. 때문에 활동가는 참으로 고단하다. 현장의 절박한 투쟁에 온몸으로 함께 해야 할 테지만 그 현장의 절박한 투쟁을 어떻게 대중에게 부드럽고 세련된 수사로서 좀 더 다가설 것인지를 강요(?)당한다.

  공지영 [출처: 뉴스민]

적절한 수사(?), 영화 도가니 관심을 받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자행된 구조적 성폭력 사건 실화를 다룬 영화 <도가니>는, 귀먹은 세상이 차갑게 외면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자 자칫 외면당할 뻔한 장애인시설의 구조적인 성폭력사건에 대한 고발이다. 소설가 공지영은 광주 인화학교의 성폭력사건이라는 ‘팩트’를 놓치지 않고 논픽션과 픽션을 적절히 배합한 소설 ‘도가니’를 통해서 대중의 분노와 관심을 세워놓았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의 진실은 ‘영화’와 ‘소설’이라는 ‘적절한 수사’를 통해서야 마침내 대중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적절한 수사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방식은 매우 유효하였다.

공지영처럼 사회 참여활동을 펼치는 유명인을 소셜테이너라고 부른다. 공지영을 비롯하여 김제동, 김여진, 이효리 등 소셜테이너의 활동이 대중에게 크게 주목받고 있다. 대중은 소셜테이너의 말 한마디, 주장 하나하나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예컨대 홍대청소노동자 투쟁이나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폐 투쟁이 사회적인 관심을 받게 된 점도 김여진의 역할을 빼놓지 말아야 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활동가, 소셜테이너에 대한 복잡한 심경

그럼에도 활동가인 나는 소셜테이너의 활동에 마음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소셜테이너의 ‘적절한 수사’는 보다 많은 대중의 관심과 사회적 여론화와 부당한 현실에 대한 개입의 필요성은 충분히 머리를 끄덕일 수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김여진 [출처: MBC 100분토론]

소셜테이너의 적절한 수사가 대중과 만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현실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폭로하고 드러낼 수 있는 땀방울이 밴 현장의 절박함이 온전히 전달될지에 대한 의구심 말이다. 다시 말해 소셜테이너의 트위터를 넘어 땀방울이 헌근이 배어있는 날 것 그대로의 현장이 훼손 없이 소통과 연대가 가능할런지에 대한 의구심 말이다. 그래서 소셜테이너의 ‘가공된’ 적절한 수사는 날 것 그대로의 현장을 원치 않게 2차 가공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 말이다.

또한 소설, 영화 도가니의 사회적 관심이 광주 인화학교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였던 광주인화학교대책위의 지난 5년 여년의 활동의 성과라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광주 인화학교라는 현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소설이라는 적절한 수사를 통한 대중이 요구하는 소통방식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또 다른 제2 제3의 광주 인화학교가 있을 터이다.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라 부당한 자본과 권력에 수많은 민중과 사회적 소수자가 고통을 받고 있을 터, 이 수많은 날 것 그대로의 절박한 현장 모두가 소셜테이너를 통한 사회적 소통은 가능하지 않다.

그 몇몇 소셜테이너의 활동에 주목받지 못하는 대다수 절박한 현장은 역으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날 것 그대로의 현장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사회적 울림과 교감이 되어야 함에도 거꾸로 또 다른 소셜테이너에 기대야 한다.

대중,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는 사려가 필요

대중은 현장 그 자체로서 소통하고 교감해야 한다. 끊임없이 소셜테이너에 기댈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현장의 절박함과 땀방울의 울림과 교감을 나눌 일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대중 스스로가 날 것 그대로의 현장의 절박함도, 분노로 투쟁하고 있는 민중과 사회적 소수자와의 울림과 교감을 우선하기보다는 소셜테이너의 언어와 관심이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려 투쟁하는 현장이 소셜테이너에 기대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지난 12일 대구시장과 면담을 요구한 시지노인병원 노동자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시청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출처: 뉴스민]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과 권력의 유착이 더욱 노골적인 시대에 분명, 현장 활동가의 투쟁과 분노는 여전히 과소한 시대다. 예컨대 대구지역의 투쟁사업장이라 할 수 있는 대구시지노인병원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러하다. 요양보호사가 주를 이루고 있는 병원사업장이지만 대구시의 위수탁업체이자 대구시의 관리감독을 받는 사업장이지만 부끄럽게도 체불임금에다 최저임금 위반사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파업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대구시는 운경재단 과 위수탁 재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지노인병원 여성노동자들의 애끓는 호소에도 대구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여기에 활동가의 고민이 시작된다. 현실은 더 ‘영화’ 같은데 이 영화 같은 ‘현실’에 분노하고 함께할 대중이 많지 않은 것이다. 대중이 불편한 현실, 불편한 현장의 진실에 공명하기를 바라는 것은 여전히 낡은 방식을 고집하는 활동가의 아집뿐인가?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부드럽고 세련된 수사가 부족한 활동가 자신의 타박만 하지 말고 영화 같은 현실을 어서 빨리 비추어 줄 소셜테이너의 언어와 관심에 더 매달려야 하는가? 여전히 날 것 그대로의 현실과 세련된 수사 사이에, 활동가는 갈피를 못 잡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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