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Daniele Franchi, Unsplash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현상 중 하나는 유럽이 러시아에 대해 보여주는 호전적인 태도다. 유럽의 지배계층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러시아가 유럽에 제국주의적 야망을 품고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터무니없다. 미국 행정부가 고르바초프(Gorbachov)에게 했던 약속을 어기고 나토(NATO)가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러시아를 자극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민스크 협정을 방해한 쪽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이었다. 나토의 목적은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옐친(Boris Yeltsin)이 대통령이던 시기에 서방 제국주의가 잠시 구축했던 관계를 되살려 러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러시아가 유럽을 침공하려 한다는 주장은 과거 냉전 시절 '소련이 유럽을 정복하려 한다'고 했던 주장만큼이나 유치한 얘기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거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는 결정을 내리면서 러시아의 침략성에 대한 주장을 사실상 부정한 이후에도, 왜 유럽은 여전히 이 허구를 퍼뜨리는 걸 고집하고 있을까? 특히 독일의 경우,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입은 손실이 꽤 크다. 러시아산 가스보다 비싼 미국산 에너지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서 생산비가 상승했고, 이는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외국으로 이전하도록 만들며 독일의 탈산업화를 불러왔다. 또한 높은 에너지 가격은 생활비 상승으로 이어져 노동자들의 고통을 키웠다. 독일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를 환영하며 자국 경제 성과를 개선하는 게 자연스러운 대응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호전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걸까?
이처럼 유럽과 미국 간에 생긴 차이를 제국주의 간의 경쟁 부활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러시아를 향한 제국주의 전략의 차이일 뿐이고, 레닌이 '경제적 영토'라 부른 것을 둘러싼 금융 과두제 간의 모순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제국주의 경쟁과는 다르다. 금융 자본이 세계화된 지금, 그러한 경쟁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과 유럽의 이해관계는 러시아와의 평화를 선택하게끔 하지, 대립을 택할 이유가 없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어떤 의미로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 상황이다.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제국주의 간 경쟁이 심화되지 않았더라도, 미국이 제공해온 '안보 우산'이 사라질 위협을 느낀 유럽 지배계층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 군비 지출을 늘리려는 의지를 보였고, 이 군비 증강을 위해 필요한 재정적자 확대나 복지 지출 삭감을 러시아 위협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은 재정적자 확대에 반대하는데, 이는 정부가 적자를 통해 지출을 늘려 경제활동과 고용을 증가시키면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위협에 대비한 군사력 강화를 위한 적자 확대라면 금융자본의 반발은 약화될 수 있다. 독일이 최근 헌법을 개정해 정부 차원의 차입을 늘릴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러시아의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복지 지출 삭감이나 전후 복지국가의 잔재 해체에 대한 반발도 줄어들 수 있다. 결국 유럽 지배계층은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필요한 군비 확충을 위해 러시아의 위협을 끌어들였다.
이런 설명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다. 무엇보다 유럽의 반러시아적 호전성은 트럼프의 집권 이전부터 나타났고, 따라서 재무장을 위한 필요에서만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반러시아적 수사는 극우 세력보다 오히려 중도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 즉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세력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극우 성향의 독일 대안당(AfD)은 독일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심지어 핵무기 보유도 주장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는 사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의 연정이나 새로 승리한 중도우파 기민당-기사연합(CDU-CSU)보다 덜 공격적이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멜로니(Meloni)나 헝가리의 오르반(Orban)도 반러시아적 태도에서는 가장 호전적인 유럽 지도자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패턴을 읽을 수 있다. 극우 파시스트 세력은 국내의 특정 인종이나 종교 집단 같은 '내부의 타자'를 만들어내 증오를 부추기고, 이를 통해 실업이나 생활 조건 같은 문제에서 시선을 돌려 자본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한다. 반면 중도 정치 세력은 외부의 '적', 유럽의 경우엔 러시아를 향한 증오를 조장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중도 정치세력이 케인즈주의적 수요 자극 방식으로 유럽 경제를 위기에서 구해내지 못하면서 새롭게 등장했다. 글로벌 금융자본은 부자 증세나 재정적자 확대 등 정부 지출 확대를 위한 두 가지 방식 모두에 반대해 왔기 때문에, 중도 정치세력은 사실상 손발이 묶여 있다. 이들은 수십 년간 권력을 쥐었지만,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책임과 그 체제가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무능력으로 인해 점점 정치적 기반을 잃고 있다. 물론 이들은 조용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외부의 적, 즉 러시아에 맞서는 방어선으로 스스로를 포장함으로써 지지율 회복을 노린다.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 위기 속에서의 국내 정치적 계산도 유럽 중도 정치세력의 러시아 혐오 선전에 일조하고 있다.
여기에 방산 업계의 로비 압력도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들에게 막대한 주문과 이익을 안겼고, 전쟁이 계속된다면 이익도 계속될 것이다. 예컨대 독일의 주요 방산업체 라인메탈(Rheinmetall)은 이미 수주로 가득 찼고, 독일이 헌법을 바꿔 국방비를 늘리더라도 이 회사의 설비 가동률이 높아지지는 않겠지만, 이익 상태는 지속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이들이 누리는 '행복한 상태'도 끝날 수 있다. 러시아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이 상태를 정당화하는 방법이다.
여기엔 아이러니가 있다. 전후 자본주의는 자신이 '인도적인' 체제로 거듭났다고 자랑해 왔다. 성인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고(영국은 1928년에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복지 지출을 통해 완전고용에 가까운 경제를 유지하고 사회 보장을 제공했으며, 탈식민화를 추진함으로써 식민 착취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변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 모든 진보를 뒤집었다.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의 억압은 민주주의를 약화시켰고, 복지 지출을 줄이고 군비를 늘리는 유럽의 흐름은 복지국가를 붕괴시키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글로벌 사우스의 천연자원에 대한 구식 제국주의적 지배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가 그린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광물 자원을 접수하겠다고 하고, 가자지구를 부동산과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뻔뻔한 계획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가 다시 '인도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일 뿐이다.
[출처] Europe’s Apparently Puzzling Bellicosity | Peoples Democracy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
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