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주>
일인시위와 집회의 차이
“처음 시작하는 사람 중에 오래 갈 줄 알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끝까지 끈질기게 하다 보니 오래 가는 거죠. 처음에 올 때, 아무 것도 몰랐어요. 내가 오죽하면 일주일만 피케팅해서 해결하고 내려오겠다고 하고 왔겠어요. 현대차 앞에도 처음 왔어요. 우리가 서울에 와서 양재동에 올 일이 없잖아요.”
2013년 10월 11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처음 일인시위를 시작하던 날, 미희 씨의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고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 서울에 올라와서 안 가본 방송국이 곳이 없을 정도로 기아자동차 내부고발 해고 문제를 알리기 위해 취재요청을 많이 했지만, 다루어주는 곳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KBS, MBC는 아예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어요. 그때 종편이 생겼는데, 여기는 할 거라고 제가 착각을 한 거예요. ○○○하고 □□□ 하고 연락해서 다 왔어요. 만나면 앞에서는 들어주는 척 하는데, 어림도 없어요. 나중에는 같이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 가슴이 답답하더라고요.”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하는 일인시위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주변 전체가 본인들의 자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현대기아차가 고용한 용역들이다.
“처음에 2~3주 정도 1인 시위를 했었는데, 용역들이 간섭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피켓 하나만 들고 가만히 서있어야 된다면서 너무 방해를 해요. 한 번은 3미터짜리 현수막을 만들어서 걸려고 했더니 용역들이 난리가 났어요. 현수막을 잡고 못 펼치게 해요. 왜 이러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내가 112에 신고해서 경찰이 왔어요. 그 경찰이 서초경찰서 정보관한테 전화를 하더니 저를 바꿔줘요. 그 정보관이 ‘집회는 몰라도, 일인시위는 그런 거 들고만 있어야 됩니다.’ 그래요. 그때 알았죠. ‘아, 집회는 현수막을 걸어도 되는구나.’”
정보관이 무심코 흘린 말 한마디 덕분에 미희 씨는 일인시위와 집회의 차이를 알게 된다. 일인시위는 제약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2013년 10월 말부터 서초경찰서에 가서 현대기아차 본사 앞 집회신고를 했다.
“집회 신고는 2인 이상 해야 되잖아요. 서울에 있는 친구들한테 연락을 했죠. ‘내가 도저히 일인시위로 안 되겠고, 집회 신고를 해야겠으니 도와 달라.’ 그랬더니 시간 있는 애들이 와서 도와줬어요. 어떤 애들은 한겨울에 퇴근하고 구두에 양말 하나 신고 와가지고 발 시린데도 집회할 때 서있어 주고 그랬어요. 그때 친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너무 고맙죠. 평생 못 잊어요.”
▲ 2013년 겨울.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 박미희 씨가 처음으로 집회신고를 하고 걸었던 현수막으로, 걸어놓은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사라졌다. [출처: 박미희] |
집회를 막지 못하자 고소와 손해배상
본격적인 집회 투쟁이 시작됐다. 미희 씨가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집회를 시작하자 용역들이 몰려와 본인들이 1순위라며 집회를 하지 못하게 했다. 본사 앞에 간신히 현수막을 하나 걸어놓으면 몇 시간도 안 돼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잘려져 있기 일쑤였다. 경찰은 용역들이 1순위라며 용역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맞은편 코트라 앞자리를 용역들이 양보했다면서 거기 가서 하라고 선심 쓰듯이 이야기했다.
“한동안은 코트라 앞에다가 현수막 걸고 했어요. 하다 보니까 도대체 여기서 할 일이 아닌 거예요. 보이지도 않는데, 회사가 하나도 답답해할 게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서울경찰청 담당자한테 전화를 해서 사정 얘기를 하고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서초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하나로마트 후문 앞(현대기아차 본사 우측)에 집회 장소를 허용해주라고 얘기를 해줬어요. 서초경찰서가 어쩔 수 없이 받아줬죠.”
2014년 1월 초였다. 미희 씨는 그때부터 현대기아차 본사 오른 편에 있는 하나로마트 후문 앞에서 현수막 하나 걸고 배너 한 개를 세워두고 친구들과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할 수 있었다. 서울경찰서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용역들도 방해하지 못했다. 다만, 집회 물품이 계속 없어져 매일 싣고 다녀야했다. 미희 씨는 그 서울경찰청 담당자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게 많이 후회 된다고 했다.
▲ 2014년 1월, 현대기아차 본사 앞 하나로마트 후문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진행한 집회 [출처: 박미희] |
제한된 공간이지만 방해 없이 집회를 하며 해고 문제를 알릴 수 있었던 작은 행복은 몇 주 가지 못했다. 현대기아차가 민형사 소송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2014년 1월 23일, 첫 번째 법원 등기를 받았다. 현대기아차는 집회금지가처분 신청을 비롯해, 명예훼손·업무방해 고소와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당시, 기아자동차와 부산대리점 소장이 청구한 손해배상 금액만 7천만 원이었다. (2019년에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각각 1억 원의 금액을 손해배상 청구했고, 2021년 서울고법에서 박미희 씨가 기아자동차에 5백만 원, 현대자동차에 25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난다. 대법원은 박미희 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피켓 내용도 내가 한 거랑 완전히 다르게 적어놨더라고요. ‘회사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박미희가 돈을 요구하기 위해 본사 앞에 와서 저러는 거다.’ 그때 마음먹었어요. 끝까지 가보자. 처음에 한 6개월을 정말 오만데 다 다니면서 알아봤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법원에 이의 신청을 하고 절차를 밟아 나간 거죠. 이걸 해결 하는데 19개월이 걸렸어요. 권익위고 어디고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중간에 판결이 한 번 뒤집히는 일도 있었고요.”
현대기아차의 법적 대응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대기업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며 그만둘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으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는 등 미희 씨에게는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진실은 이긴다’는 확신 하나로 다시 용기를 내어 서울-부산을 오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마침내 미희 씨는 2015년 11월 10일 현대기아차가 제기한 '명예 및 신용훼손 금지 등 가처분 신청 사건'에 대한 서울고등법원 부분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사측 상고 포기) 변호사 수임도 없이 미희 씨가 자필로 직접 소장을 써서 진행한 재판이었다. 이 판결에는 ‘철면피한 기아자동차의 행태’ 등 일부 특정한 문구(투쟁 초기 집회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만들어온 피켓 문구) 사용을 제외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부당판매 내부고발로 인한 해고 사실 등 미희 씨가 하는 집회의 정당성과 목적을 인정해주고 미희 씨의 집회를 보장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