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

[이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요즘 정부의 복지국가에 대한 태도를 보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구절이다. 물론 시대와 처한 사회환경에 따라 ‘가치’는 변화될 수 있다. 젠더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대표적 사례다. 과거 여성에게 부여됐던 성역할은 일정 시기까지 당연하게 취급되면서 맞는 듯 보였지만, 더 이상 돌봄과 관련된 여러 일들이 여성의 역할로만 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물꼬를 튼 건 정부가 주도해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운동과 여성들의 다양한 활동 덕이다.

반면 보편복지와 복지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필요는 여전히 높은데,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지금은 틀리다’며 고집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복지국가 전략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약자 복지’는 선별복지의 다른 이름으로, 마치 한국 사회가 충분한 보편복지 때문에 ‘약자’에게 더 많은 자원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개념으로 약속되지 않는 ‘약자’라는 용어를 내세워서 정부 맘대로 누가 약자인지 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복지에서는 전통적으로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두고 할당의 원리를 적용해 왔다. 소득과 자산조사를 거치지 않고, 시민권을 기반으로 모두에게 제공하는 보편주의 방식과 현재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득과 자산을 조사하여 정책목표에 부합하는 시민을 선별하는 선별주의 방식이 해당된다. 보편주의는 빈곤 예방을 목표로 작동되는 사회수당과 사회보험이 대표적이고, 선별주의는 빈곤에 즉각적인 대응을 목표로 작동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 공공부조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복지국가는 이 두 가지 할당의 원리를 적용해서 운용한다.

한편 보편주의 제도가 희박한 체제에서 엄격한 선별주의를 적용해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복지권을 제한하는 것을 두고 잔여주의적 복지국가라 비판한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 그 어떤 복지국가의 비전을 갖지 못한 전형적인 잔여주의적 복지국가였다. 물론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로부터 출발한 한국의 복지국가체제는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고스란히 수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지점은 많지만, 지난 25년간 시민이자 유권자의 힘으로 보편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상당히 발전하였다. 다만, 국가가 시민의 요구만큼 복지 확대를 위한 전향적인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궤변으로 그들 스스로가 정한 ‘약자’ 복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예산은 축소되었고, 이 정체불명의 복지정치는 시민을 분열시키고, 약자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어야 공정하다?

국민연금은 5년에 한 번씩 향후 70년에 대한 재정추계를 검토해서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노력을 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작년부터 제5차 국민연금재정계산이 시작되어 올 10월이 되면 복지부는 종합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재정계산이 추진되면 재정추계와 국민연금기금운용을 위한 위원회가 각각 설치되고, 종합적으로 제도개혁을 위한 위원회가 따로 작동된다. 그런데 제도개혁을 위한 위원회의 명칭이 제도발전위원회에서 재정계산위원회로 변경되었고, 재정추계위원회에서 제출한 추계결과를 재검토한다는 명분으로 신생조직인 연금수리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국민연금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아닌 오로지 재정 중심적인 구조로만 작동되고 있다.

문제는 사회보장제도로서 국민연금이 갖는 의미를 중심에 두는 전문가보다는 기금의 적립 규모와 수준, 수익비와 수익률과 같은 사보험과 민간 금융시장의 원리를 중심으로 국민연금을 바라보는 전문가가 각종 위원회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제5차 국민연금재정계산이 실시된 이후 국민연금은 공정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폰지 사기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 사회적 논란에서 실제 노인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로지 사회적 부양비용을 깎아야 미래세대에 공정하다는 식의 일방적인 주장이 각종 언론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2022 고령자 통계」를 보면, 2021년 기준 66세 이상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43.2%(중위소득 50% 이하)로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65세 이상 고령자 중 기여를 기반에 둔 공적연금(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수급률은 55.1%에 머문다. 즉 65세 이상 국민의 약 45%는 공적연금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같은 해 OECD 연금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43.1%로 OECD 평균 55.8%보다 낮고, 평균 급여액은 월 53만 9,310원, 20년 이상 가입자일 경우 93만 5,320원으로 급여액이 올라간다. 국민연금의 완전 가입 기간은 40년으로 1988년부터 제도가 시행된 국민연금 자체가 이 기간을 채우고 있지 못하다. 제도 설계상 국민연금은 40년 가까이 가입할수록, 저소득자일수록 유리하게 설계된 재분배 소득보장제도이다. 또한 사회보장제도 중 노후빈곤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도이다. 그런데 저출생 심화와 기대여명의 증가로 연금재정에 대한 장기추계가 거듭될수록 먹구름이 짙어진다. 이에 재정전문가들은 세대 간 형평성을 내세워 더 많은 보험료를 내고, 더 적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아이 낳기를 주저하고 수명이 길어진 것은 노인이나 노인이 될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인 세대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경제발전 시기를 겪으며 국가와 자본에 가장 극심한 노동착취를 당해왔던 세대이다. 곧 노인이 될 세대 역시도 군사체제와 가부장체제를 겪어내며 지금은 틀린 여러 곳에서 갑질과 불평등을 견뎌내며 국가의 도움 없이 가족을 일궈낸 세대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기회가 적고, 자원이 부족한 것은 이전 세대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경제발전전략, 즉 자본 중심의 축적체제를 통한 성장을 위해 노동의 희생을 당연시해 왔던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생산체제의 모순으로 빚어진 계급갈등의 문제를 세대 간의 문제로 전이시켜 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어렵다고 해서 계급문제가 세대 갈등으로 전이될 수 없다.

노인에게 제공되는 공적연금과 기타 사회복지 현금 급여를 축소할 경우, 더 심각한 노인빈곤과 사회적 단절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것이다. 자본은 당연히 사용해야 할 재생산비용을 세대 갈등을 내세워 현세대 노인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착취율을 올릴 것이다. 결코 노인 세대의 희생으로 다음 세대의 평안은 찾아오지 못한다.

시장 논리로 대체 불가한 돌봄과 우리들의 삶

지난 5월 말 사회보장 관련 위원회의 소위 전문가들과 관계부처가 참여한 ‘사회보장 전략회의’에서 윤석열 정부의 복지국가 전략을 점검하고 추진 방향을 구체화하였다. 전략회의는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라는 비전 아래 약자 복지, 서비스 복지, 복지 재정 혁신을 중점으로 추진하고, 핵심과제로 사회서비스 고도화 추진을 밝혔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저출생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2000년 1.48, 2010년 1.23으로 꾸준히 낮아지다가 지난해 0.78이라는 초저출생 상황에 이르렀다. 문제는 앞으로도 출산율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어떤 요인으로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0.78로 위축된 것인지에 대한 정부의 진지한 성찰이 제출되지 않고 있다.

출산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 오랜 뿌리를 둔 가부장적 문화, 노동시장 분할로 인한 불평등 심화, 신자유주의 이후 극심해진 개인 간 경쟁, 개인이 져야 할 수많은 책임 앞에서 한국 사회 시민들은 아이 낳기를 주저하거나 엄두조차 내기 어려워졌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자기가 먹을 수저는 자기가 들고나온다’는 속설이 맞는 듯 보였지만, 반세기 이후 이 속설은 틀리게 되었다. 전쟁 이후 폐허의 상태에서도 들고나왔던 수저가 눈부신 경제 성장 이후 어디론가 사라지는 기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저출생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점점 더 억압되었던 계급문제와 젠더불평등에 대한 이 시대의 선택으로 존중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저출생이 문제가 되는 하나의 지점은 사회의 재생산이 내부적 동력으로 한계치에 이르렀는데, 국가와 자본이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부족한 노동력은 모두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메꿀 자신이 있는 걸까? 만약 이것이 계획이라면 현재보다 더 극심한 양극화와 차별만이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게 될 것이다.

어떤 노동력이 공급되든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이 시장의 가치에 따라 평가되어 사람들을 등급 매기고 값을 매기는 이 노골적인 모든 짓이 폐기되어야 한다. 시장의 값과 사람들의 삶의 값이 같아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존재 자체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가능하다. 신자유주의 이전 유럽의 많은 복지국가는 적어도 출발에서의 평등을 맞추기 위해, 노골적인 계급착취를 제어하기 위해 작동되었다. 이미 자본주의 역사에서 인류는 시장의 모순을 제어해 본 경험이 상당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의 자본과 국가는 더 많은 돈을 가지게 되었고 경제 성장을 이뤄냈지만, 대다수 민중은 노골적인 시장원리에 노출되어 고통받고 있고, 더 이상 그들의 인생이 아름답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에게 저출생으로 빚어질 미래문제에 대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이것은 사회의 실존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근본적인 체질을 변화시켜야 할 사안에 대해 세대 갈등 수준으로 봉합하거나, 찔끔찔끔 찔러주는 현금급여 수준으로만 대처하고 있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가 복지국가 전략으로 내놓은 것이 또다시 시장과, 또다시 경제 논리이다. 대체 사회보장 전략회의에 참석했던 소위 전문가들은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인가? 이제까지 실패에 대한 반성도 시민들이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이토록 매정하게 외면할 수 있는가? 그들의 전문성은 무엇을 위해 기능하는 것인가?

고도화란 사전적으로 “기술이나 생활, 문명 따위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산업구조의 고도화나 정보 통신의 고도화 추세 등으로 사용되고, 주로 산업발전과 관련된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윤 정부는 지난해부터 사회서비스 고도화를 외쳐왔고, 지난 1월 사회서비스고도화추진본부까지 발족하였고, 2027년까지 사회서비스의 고도화를 지속해 추진할 계획이다. 망!했!다!. 이 정도면 사회를 절단 내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노무현 정부 이후 사회서비스는 수요 확대, 공급 시장 활성화, 품질 제고를 내세우고 있지만 세금 기반의 제도가 공적 서비스 제공 없이 대다수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민간에게 서비스 공급을 의지해 온 결과, 수요 확대와 품질 제고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문제는 이미 시장화된 서비스 공급구조를 개선하거나 개혁할 의지가 없는 정부와 소위 전문가들이 시장화된 사회서비스 공급구조를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취약계층 위주 사회서비스를 중산층으로 확대하고 기술 및 투자, 경쟁 여건 조성 등을 통해 복지-고용- 성장 선순환을 도모한다는 허튼소리를 한다.

중산층으로 확대는 소득수준에 따른 본인부담금 적용으로 사실상 중산층이 더 많은 부담금을 감당하는 조건에서 지원한다는 소리이고, 기술 및 투자는 이제까지 사회서비스 발전이 지체된 원인과는 전혀 관련 없는 소리이다. 또한 양질의 민간 공급자를 육성할 수 있도록 컨설팅 강화 등으로 경쟁 여건을 조성한다고 밝혔지만, 초기부터 사회서비스 시장화로 경쟁은 형성되었지만, 이용자를 위한 경쟁이 촉발되지 않는 기이한 모순에 빠져있고, 이는 컨설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미시적 문제가 아니다. 즉 정부의 발표는 새로울 것도, 기대될 것도 없다는 점에서 사회의 체질을 바꿔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우려스러울 뿐이다.

사회서비스의 핵심인 돌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시기와 누군가를 돌보는 시기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초기에는 전업주부에 의한 전적인 돌봄이 대가 없이 제공되었고, 페미니즘의 확산과 평등 운동의 결과로 여성의 돌봄노동에 대한 성역할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또한 저출생과 고령사회는 돌봄노동에 대한 국가적 개입을 요구하게 되었고, 한국 사회 역시 지난 20년간 사회서비스를 통해 가정 내 돌봄 노동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아동과 노인을 중심으로 제공되는 돌봄노동에 대해 ‘누가, 어떤 수준의 보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국가는 질 낮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복지와 고용의 선순환을 외치며, 시장에 돈을 던지는 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노인에 대한 돌봄의 경우 상당수 사회서비스에서 포괄하고 있지만, 시설에 의한 방임과 학대가 끊임없고, 돌봄을 매개로 평등한 관계 설정도 어려운 지경이다.

최근 사회서비스 공급자들은 싼값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주노동자 허용까지 요구하고 있다. 시장방식으로 조직됐던 사회서비스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돌봄의 가치복원과 영 유아부터 노인까지 사람의 인생이 귀하게 존중될 수 있도록 서비스가 조직되어야 한다. 노인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라고 해서 경제적 효율성만 내세운다면, 결국 전체 사회의 사람에 대한 격은 낮아질 것이고, 모두를 위한 내일은 약속되기 어렵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면,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한 미래는 현재보다 악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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