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상병수당 시범사업에서 질병 등으로 경제 활동이 어려운 아픈 노동자에게 하루 4만 3960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는2022년 기준 최저임금 일액의 60% 수준이다. 상병수당 도입을 요구하던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그런 식의 낮은 보장 수준은 노동자 소득을 보전하는 사회보장제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 24일 서울 NPO 지원센터에서 열린 ‘우리는 왜 아파도 쉬지 못하나’-아프면 쉴 권리 연속강좌 세 번째 집담회에서 불안정 노동자들은 아파도 쉬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과, 상병수당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개선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포럼을 기획한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공공운수노조,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6개 단체는 “코로나19 이후에 다시 올 수 있는 감염병 상황을 대비하고, 누구나 아프면 제대로 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폭넓은 시민사회의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라며 “시범사업 확대를 비롯하여 OECD 국가 수준의 상병수당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실천사업으로 이어져 시민사회 인식 전환 및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자 한다”라고 이번 포럼의 취지를 설명했다.
무서워서 못 쉬는 불안정 노동자들
[출처: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
이날 집담회엔 배달노동자, 주얼리노동자, 제빵기사, 방송스태프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등이 참석해 각 현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배달노동자들은 오토바이 리스비가 자영업자의 임대료 같은 고정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파도 쉬지 못 한다. 배달노동자 박정훈 씨는 이날 “산재가 되더라도 휴업급여가 최저임금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깁스를 하고 일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라며 “유급휴가가 없기 때문에 아프면 소득이 0원이거나 마이너스가 돼, 아파도 일을 하려고 한다”라고 배달라이더의 현실을 전했다.
주얼리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주얼리 노동자들은 ‘초단기 납품구조’ 속에서 내일 약속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김정봉 씨는 “가공. 광. 원본 등 각 파트에 기술자들이 있고 작은 공장에서 그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공백도 없이 생산에 허덕인다”라며 “100년 가까운 주얼리 산업이 성장하는 동안 사업주의 최대 이익만을 계산한 시스템이 사람을 쉴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기계로 만들었다”라고 지적했다.
주문에서 납품까지 걸리는 단 4일은, 종로의 귀금속 시장을 키우면서, 주얼리 노동자들을 부품처럼 소모했다. 김정봉 씨는 “일하다 손가락 절단으로 입원한 노동자가 산재는 커녕 인력 공백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고, 회사는 병원비만 던져줬다”라며 “근로기준법상 연차휴가가 있지만 아파도 쓸 수 없고, 80%가 4대 보험에 미가입돼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임종린 파리바게뜨지회장은 파리바게뜨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 구조를 지적하며 “무조건 쉬어야 할 때도 당장 쉬지 못하고 일정 조율을 해서 늦으면 몇 달 뒤부터 쉴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임 지회장은 “50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염두에 두고 언제든 대체 투입할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여유인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휴무인 사람들에게 연락해 출근 답변을 받아야 대체인력이 구해지는 구조이다보니 근무 중 심각하게 다친 상황에도 대체인력이 구해지지 않으면 출근해야 한다”라며 “그러다 보니 내가 아파서 빠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분위기가 심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족한 인력 구조가 노동자 간 갈등으로 비화하고, 이 속에서 쉴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고도 했다.
노동자의 쉴 권리가 다른 노동자의 쉴 권리를 방해하는 일은 콜센터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다.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서울지회장은 예고 없는 반차를 써버리면 ‘당일 연반차 감점제도’가 있어 한달을 열심히 해도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없고 임금을 적게 받았다고 했다. 그는 “팀 프로모션이라 하여, 팀실적에 따라 만원이나 이만원을 더 주는 그런 비윤리적인 제도도 운영하던 터라 제가 그렇게 빠져 버리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손가락질 받았다”라고 했다.
콜센터 노동자들은 대부분 우울증 고위험군에 속해있고, 방광염,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스트레스성 이석증, 메니에르병 등 두통을 동반하는 어지럼증 질환도 자주 보인다.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서울지회장은 “저는 만성 방광염 환자다. 한동안은 부끄럽지만 성인용 기저기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화장실을 가야 할 때 재깍 잘 가지만, 이미 망가진 몸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라며 “최근엔 이석증과 공황장애로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프리랜서 PD 김기영 씨도 “한달에 몇 편을 제작하느냐에 따라 임금이 기본보다 낮아질 수 있어 쉴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며칠 씩 밤을 새워 편집을 하다보면 수면 부족은 일상이다. 졸음 운전을 하다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어도 간단히 처리만 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촬영한 영상을 편집해야 했다”라며 “대부분의 방송인들은 방송 스케쥴을 지키기 위해, 펑크내지 않기 위해 해야만 했던 무용담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가족이 상을 당해도, 응급실에 있어도, 본인이 아무리 아파도 펑크내지 않기 위해 방송제작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던 경험들이다”라고 말했다.
모자르거나, 접근이 어렵거나… “상병수당, 보완 필요”
이날 모인 노동자들은 상병수당 도입을 반겼으나, 보장 범위나 수준이 협소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하루 5만 원이 채 안 되는 보장 금액이 너무 적다는 의견들이 공통적으로 나왔다.
배달노동자 박정훈 씨는 “금액이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대기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진행하며 대기기간을 설정했는데, 대기기간인 7일~14일 간은 제외하고 상병수당을 지급한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훈 씨는 “3일 이상 입원, 7일 이상의 부상 질병이라면 다른 보험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인 부상 질병에 대한 보상만을 목표로 한다면 급여를 높일 필요가 있다”라며 “혜택에 비해 복잡한 서류작업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주얼리 노동자 김정봉 씨는 현재 진행되는 시범사업의 부족함을 지적했다. 주얼리 노동자가 밀집한 종로의 경우 상병수당 시범사업 구역이지만, 거주자가 아닌 경우 ‘협력사업장’에 속해야 하는데 이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김 씨는 또 “실제 부상과 질병 가능성이 높은 노동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다”라며 “상병수당 범위가 확대되어야 사각지대 해소가 가능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프리랜서 PD 김기영 씨는 “아플 때 쉴 권리는 나았을 때 복귀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해야 한다”라는 점을 피력했다. 김 씨는 “방송계의 현실은 아플 때 쉬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고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불치병 등으로 다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한 듯하다”라고 보완 의견을 냈다.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유급병가나 상병수당이 노동시장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실직과 빈곤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불평등한 결과를 예방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라며 “특히, 비정규직·작은사업장 노동자에게 유급병가, 상병수당 제도가 효과적”이라고 유급병가와 상병수당 제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변호사는 상병수당 사각지대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해 “보편적 적용을 위해 제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정밀하게 설계하고, 두루누리 지원사업을 국민연금 고용보험 외에 건강보험으로 확대 적용하는 등 작은사업장의 건강보험 가입률을 높일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또한 상병수당의 대기기간을 최대한 짧게 해 공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윤 변호사는 “상병수당 지급개시 전 대기기간과 관련하여, 상병급여협약은 수당 지급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지급까지 대기기간을 설정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고 있으나, 그 경우에도 대기기간이 3일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라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발의안을 살펴보면, 정춘숙의원 대표발의안만 3일의 대기기간 설정을 명확히 하고 있을 뿐 다른 입법안에는 대기기간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