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퇴진과 쿠데타

[INTERNATIONAL]그리고 저지대와 고지대 사이에서

  다민족성을 상징하는 위팔라. [출처: https://www.animalpolitico.com/2011/10/hoy-en-fotos-50/]

쿠데타 혹은 퇴진, 그 사이의 무엇

2019년 11월 10일 오후 5시경(현지 시간)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 약 20분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13년 9개월 18일”의 집권 기간 동안 이루어낸 성과를 언급하고 감사 인사를 전했으며,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카를로스 메사와 산타 크루스 지역에서 반(反)모랄레스 시위를 주도해온 루이스 페르난도 카마초에게 습격을 멈추어 달라고 요청했다.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 부통령은 투팍 카타리(18세기 말 스페인 식민지 시대 원주민 반란군)의 말을 인용하며 사임 연설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돌아올 것입니다. 수백만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10월 20일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 의혹에 휩싸이자 미주기구(OAS)의 감사를 받겠다고 했고, 감사 결과 보고서에서 부정선거 가능성을 지적하자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발표한 그날 오후 모랄레스 대통령과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 부통령은 결국 사임을 발표했고, 다음날 멕시코로 망명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쿠데타’라고 불렀고, 다른 일부에서는 에보 모랄레스의 권력욕을 꺾은 민주적 요구가 얻어낸 ‘퇴진’이라고 불렀다. 두 가지 언어는 이 사안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일종의 시험지와 같았다. 그러나 ‘사임을 발표했다’는 현상적 묘사를 넘어, 2019년 10월 20일부터 11월 10일까지 20일간 볼리비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쿠데타’ 또는 ‘퇴진’이라는 두 가지 언어로 포착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할까? 퇴진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퇴진이라고만 하기에는 의구심이 남고, 쿠데타의 모습이지만 쿠데타라고만 하기에는 미심쩍다. 여기에는 쿠데타 또는 퇴진이라는 두 가지 규정에 담기지 않는 볼리비아의 내부 역학 관계가 있다.

13년 9개월 18일의 에보 모랄레스 집권

모랄레스 대통령은 코차밤바 지역의 코카 재배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을 토대로 성장한 후, ‘사회주의로의 운동(MAS)’을 창당하고 2006년 집권해 볼리비아 경제를 한 단계 성장시킨 인물이다. 이른바 원주민 대통령이었는데 그런 그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차적으로 그의 ‘퇴진’은 13년 9개월 18일의 집권 기간을 5년 더 연장하려는 무리수가 낳은 결과였다. 10월 20일 발표된 에보 모랄레스의 당선은 4선에 성공했다는 의미였으며, 2016년 2월 21일 실시된 연임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국민투표 부결을 기어코 부정한 셈이었다.

볼리비아는 사회주의 성향의 군부가 주도한 1952년 혁명 이후 1980년대 민주화 과정까지 군사정권과 민선정부가 교대로 집권하는 등 제도적 민주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1952년 혁명의 주역이자 1985년 시작된 마지막 임기 까지 네 차례 대통령직을 수행한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조차 연임의 형태로 대통령 자리에 머물지는 않았다. 에보 모랄레스는 지난 반세기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쉬지 않고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이다.

볼리비아 정치문화도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이 재선과 연임을 지양한다. 그러나 그의 장기집권은 여러 차례 합법적으로 용인됐다. 그래서 에보 모랄레스가 지켜온 지난 13년은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는 2006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200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연임을 가능하게 했고, 2009년 재선에 성공했다. 2014년 3선에 도전하기 위해서 직전 임기를 개정된 헌법에 따른 첫 번째 임기로 간주할지, 실제로 대통령직에 머문 기간에 따라 두 번째 임기로 간주할지를 두고 정치적 논쟁과 법률적 판결을 거쳐야 했다. 결국 3선까지 용인돼 당선에 성공한 그는 2014년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4선에 도전하려 했다. 2016년 연임 규정을 개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이번에는 용인되지 않고 부결됐다.

모랄레스 정권은 비민주적인 조치를 수차례 반복했고, 그럴수록 반대 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새롭지 않은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새롭게 단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럼에도 에보 모랄레스에 대한 용인은 성공적인 경제적 근대화와 부의 재분배 사이의 균형 덕분에 가능했다. 다만 ‘원주민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상징적 이미지는, 중국과 브라질 자본을 밑거름으로 삼은 근대화 프로젝트라는 새롭지 않은 얼굴과 점차 오버랩됐다. 새롭지 않은 우파의 목소리는 새로움을 가장하는 데 능했고, 원주민 농민 노동자의 모습을 한 새로운 권력의 얼굴은 자본이라는 새롭지 않은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에보 모랄레스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우려가 여러 징후로 나타났으며, MAS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의가 있었으나 끝내 모랄레스 대통령은 국민투표 부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헌법소원으로 재출마 자격을 얻었다. 2019년 10월 20일은 그렇게 간신히 도달한 문턱이었다.

문턱에서 멈추다

4선에 성공하는 방법은 단숨에 과반 이상의 득표율을 보이거나, 40% 이상득표하면서 2위와 10포인트이상차이가나는경우였다. 그렇지 않으면 2차 선거를 진행해야 하고, 에보 모랄레스의 정당성은 회복하기 어려워질 것처럼 보였다. 징후가 징후로만 남을지 소란스러운 경보음으로 바뀔지 아슬아슬한 순간 여지없이 경보음이 울렸다.

10월 20일 투표는 평화롭고 조용히 진행됐다. 다만 그 날은 전과 다른 두 가지가 있었다. 사전선거결과전송시스템(TREP)이라는 전자 집계 시스템이 도입됐으며, 볼리비아 정부가 초청한 200명 넘는 국제 선거 감시단이 선거를 지켜봤다. 그중 92명은 미주기구 소속의 감시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새로운 조건이 위태로운 순간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었다.

10월 20일 오후 7시 40분 83.76% 개표 결과가 집계되었을 때 돌연 TREP의 데이터 집계가 중단됐다. 그때 에보 모랄레스는 45.28% 득표율을 보였고, 2위 후보였던 카를로스 메사는 38.16%를 득표했다. 더 이상 집계 과정이 업데이트되지 않은 채 다음날 에보 모랄레스의 당선이 발표됐다. 득표율은 47.08%로, 겨우 0.5포인트 차이로 카를로스 메사의 득표율과 10포인트 차이를 벌려 2차 선거를 모면하는 데 성공했다.

부정선거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최고선거재판소는 TREP의 전송 문제에 대해 비일관적으로 답변했고, 급기야 10월 22일 최고선거 재판소 부소장이 사임했다. 그는 선거결과에 조작은 없었으며 관련 사안을 제대로 보고 받지 못했다는 점만을 지적했지만 의구심은 증폭됐다. 카를로스 메사는 부정선거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며 시위를 조직해나갔다. 에보 모랄레스와 언제나 먼 거리를 유지해왔던 산타크루스 지역에서는 루이스 페르난도 카마초가 반 모랄레스 시위에 화답했다.

부정선거를 의심해볼 만한 정황 속에서 볼리비아 도시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1인 장기집권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정권퇴진’ 운동으로 해석됐다. 재선과 연임은 민주주의를 위협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작용했다. 그러나 에보 모랄레스가 여러 차례 시도한 장기집권의 방법은 언제나 절차적 정당성 테두리 안에 있었다. 10월 20일의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부정선거 의혹으로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될 처지가 되자 그는 유무형의 억압적 방법을 동원하는 대신 정당성을 회복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시도한 재선과 연임이 과연 얼마나 민주주의를 위협했는가’ 라는 질문은 ‘이 사건을 ‘퇴진’으로 규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협소하게 이해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경찰과 군이 돌아서다

11월 10일 오전 에보 모랄레스는 최고선거재판소 위원을 전면 교체하고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절차적 정당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는 같은 날 오후 사임 발표로 좌절됐다. 반대 세력의 린치와 위협, 그리고 친정부 성향의 의원 및 각료들의 사임이 잇따르던 상황에서 윌리엄스 칼리만 총사령관이 “평화와 안정을 위해 대통령 사임을 촉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미 11월 8일 여러 도시의 경찰이 반정부시위에 가담한 상태였다.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경찰과 군이 현직 대통령을 외면함으로써 이 사건은 쿠데타로 규정될 조건을 갖추었다. 더구나 대통령 사임 발표 이후 부통령, 상원의장이 잇따라 사임하여 헌정 질서는 중단됐다.

곧이어 볼리비아 군부와 미국의 연계설이 회자되기 시작됐다. 선거부정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던 선거감시단을 비롯해 감사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선거부정 가능성을 언급한 감사보고서를 내놓은 미주기구는 대대로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정책을 구현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리튬 산지인 볼리비아가 자원의 국유화 정책을 고수해온 것이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배치된다는 점도 지적됐다. 미국은 볼리비아 쿠데타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다. 미국의 개입과 쿠데타 도발이라는 모두가 아는 시나리오가 회자됐다.

그러나 윌리엄스 칼리만 총사령관이 성명서에서 상기시켰듯 볼리비아 군법 20조에 따르면 고위 장성에게는 “대내외적 갈등 상황을 분석하여 책임자에게 조언”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 굳이 이 조항을 꺼내들지 않아도 볼리비아에서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지 않는 문화가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성향의 소장 장교들이 주도한 혁명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볼리비아에서 군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에보 모랄레스 집권 기간에도 볼리비아 군은 ‘좌파이자 혁명적’ 성격을 부여받았다. 볼리비아 군의 정치색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다만 지금 그 정치색이 반정부적 색채일 뿐이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경찰과 군뿐만이 아니라 볼리비아노동조합총연맹(COB) 역시 에보 모랄레스의 사임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연금 개혁과 공공요금 인상 등으로 에보 모랄레스 정부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정치적 동맹 관계였던 COB 역시 11월 10일 “평화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임을 요구“한다고 발표했다. 오랫동안 에보 모랄레스의지지 세력이었던 포토시의 광부들도 사임에 손을 들었다. 미국이 배후에 선 쿠데타 시나리오만으로는 볼리비아 내부의 정치적 관계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고지대와 저지대,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사임을 민주적 요구에 의한 ‘퇴진’이라고 하기에는 의구심이 남는다. 그는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데타라고 하기에도 미심쩍다. 에보 모랄레스의 지지층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단단해 보였던 에보 모랄레스 정권의 정당성과 지지세력이 무너졌다. 그에게는 절차적 정당성만 남았다. 왜일까?

볼리비아는 전통적으로 원주민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북서부 안데스 고지대와 유럽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남동부 저지대로 양분된다. 즉 라파스와 엘알토에서 코차밤바를 축으로 삼은 에보 모랄레스 지지지역은 산타크루스, 수크레, 타리하 등과 문화적으로도 계급적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볼리비아는 역사적으로 이 두 지역의 대립 속에서 움직여왔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발전과 자유주의에 기반한 발전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비전의 대립이기도 했다.

에보 모랄레스는 2009∼2014년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는 데 성공했지만 남동부 저지대의 온전한 지지를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연임 시도는 정권의 정당성을 흔들었다. 남동부 저지대에서 흘러나온 ‘비민주적’이라는 언어는 볼리비아 사회를 이분화시키는 여러 가지 구분선을 파고들었다. 양분된 두 개 지역을 볼리비아라는 동일한 평면 위에 연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민주주의였기에 ‘비민주적’이라는 케케묵은 언어는 구분선을 틈새로 벌이는 데 성공했다. 남동부 저지대에서 흘러나온 케케묵은 언어에 북부 고지대는 침식당했다. 에보 모랄레스가 민족주의적 근대화를 이루는 데 지지 기반이 됐던 북부 고지대의 라파스, 엘알토, 코차밤바조차 남동부 저지대와 손을 잡았다. 2019년 11월 에보 모랄레스에게 사임을 요구한 그 찰나에 이 동맹은 성립됐다. 그 동맹으로 에보 모랄레스가 구축해온 질서가 와해됐다. 위팔라가 불태워지고, 성경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자리바꿈이 일어났다. 사실 동맹은 불가능하다. 두 지역, 두 가지 비전은 언제나 격돌했다. 결국 “수백만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모랄레스의 예고가 실현되기 위해선 그들의 동맹에 다시 균열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이 균열은 바로 ‘퇴진’과 ‘쿠데타’라는 상반된 평가 사이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