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출신 래퍼 킬러 마이크는 2012년 곡에서 미국 대통령들을 자본가의 꼭두각시로 묘사했다. 특히 그는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제거하려고 한두 명을 지목해 비판했다. 레이건은 1986년 미군의 폭격을 주도했고 버락 오바마는 201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폭격을 지원해 카다피의 사망에 일조했다. 마이크는 같은 앨범의 곡 ‘Untitled’의 비디오에서도 예수, 맬컴 엑스, 카다피의 복장을 하고 등장했는데, 마치 카다피가 다른 두 사람처럼 오해와 비난을 받으며 살해된 희생자라고 보는 것 같았다.
▲ 2009년 아프리카연합 회의에 참석한 카다피. 그는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됐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Muammar_Gaddafi] |
물론 “중동의 미친 개”라는 레이건의 표현처럼 악마화된 카다피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동시에 42년의 독재에서 비롯된 카다피 정권의 문제들을 모두 거짓말이나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수도 없다. 어쨌든 여기서는 카다피를 변호하거나 비판하는 것보다는 미국의 흑인 래퍼들이 베두인계 아랍인 정치인에게 공감했던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마이크는 한 인터뷰에서 조금 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카다피를 리비아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좋은 일을 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편을 든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이 세계적인 손실이라고 평가했다. 카다피가 미국 흑인들의 이중국적 취득을 지원한 점과, 아프리카 통합 운동에 나섰다는 점이 대표적 사례였다. 카다피가 리비아의 석유 대가를 미국 달러가 아닌 금으로 받고자 했기에 미국인들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 마이크의 결론이었다. 물론 마이크의 대담한 주장들은 자세히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다.
래퍼들과 카다피의 연결고리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범아프리카주의라는 오래된 정치적 이상이었다. 그것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 아프리카 전역을 통합하고자 한 과감한 주장이었고, 대서양 양쪽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에 호소하는 운동이었다. 카다피는 오랫동안 아랍 통합에 열중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1990년대 말부터는 아프리카 통합 운동에 나섰다. 2002년 아프리카연합(AU)의 창설을 주도한 그는 더 나아가 아프리카합중국 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2010년 그는 아랍인에 의한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해 사과했는데, 이는 아프리카 통합을 위한 역사적 화해 표현이었다. 물론 통합 국가 건설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카다피는 마커스 가비와 콰메 은크루마 이후 잊혀진 옛 이상을 다시 꺼내고 있었다.
위대한 래퍼 케이아르에스원은 1992년 발표한 곡에서 카다피의 주장과도 비슷한 범아프리카주의의 맥락을 잘 표현했다. 그는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가에서 아프리카 혁명가로 변신한 콰메 투레를 스승으로 여겼다. 이 곡에서 그는 당시 흑인 최초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장이 된 콜린 파월을 악마라고 부르며 미국의 리비아 공격 계획을 비난했다. “파월은 흑인인데 리비아를 공격하려고 해. 리비아는 아프리카에 있지. 한 흑인이 다른 흑인더러 그의 고향을 상대로 싸우라고 부추기네. 악마에게 협력하는 자도 같은 악마야.”(‘Build and Destroy’) 그런데 이 곡이 진짜 비판하는 대상은 푸어 라이처스 티처나 엑스클랜처럼 백인은 악마이며 흑인은 옳다는 조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힙합 그룹들이었다.
탈립 콸리도 카다피의 구상에 공감했다. 그의 그룹명 블랙 스타는 가비의 아프리카 귀환 운동을 상징하는 단어다. 그는 2017년 곡에서 “우리는 카다피처럼 아프리카를 통합하려고 해. 그건 맬컴이 총을 맞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All of Us’)라는 가사를 썼다. 맬컴 엑스는 생애 말년에 아프리카통합기구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연대 운동을 조직했으나 곧 암살당했다.
미국의 흑인들이 카다피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더 있었다. 카다피는 1969년 집권 후 미국의 흑인 운동 세력인 블랙팬서당과 이슬람민족을 포함한 세계의 혁명 운동을 지원해 왔다. 블랙팬서 복장을 하고 이슬람민족의 메시지를 전달한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척 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1996년 카다피가 이슬람민족의 지도자 루이스 패러칸에게 십억 달러를 선물로 주면서 미국 흑인을 위해 써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미국 재무부의 불허로 자금이 실제로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척 디에게 이 사건은 “리비아가 미국 정부에 의해 ‘테러리스트’ 국가로 여겨지긴 하지만 리비아와 카다피는 흑인 공동체를 결코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라는 증거였다.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이 리비아 공격을 지원하자 패러칸이 즉시 지지를 철회하고 “첫 유대인 대통령”이라며 저주를 퍼부은 것도 당연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도 카다피의 도움을 받았다. 그와 그가 이끈 아프리카국민회의가 1980년대 미국 정부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르는 등 국제적 고립을 겪던 시절에도 카다피는 지원을 계속했고 만델라는 이 사실을 평생 잊지 않았다. 만델라는 유엔이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만류를 무시하고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와 우정을 나눌 정도였고, 카다피가 죽자 “우리 투쟁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도움을 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사였다며 죽음을 애도했다.
그런데 정작 리비아 래퍼들의 입장은 달랐다. 2011년 리비아 시위 당시 래퍼들은 시민들의 편에서 카다피 정권에 맞섰다. 리비아계 미국인 래퍼 칼리드 엠은 ‘Can't Take Our Freedom’에서 카다피 정권에서 투옥되고 고문 받은 아버지와 삼촌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븐 타빗(Ibn Thabit)은 ‘승리 아니면 죽음’에서 시위대의 순수성을 의심한 미국 래퍼 루페 피아스코를 비판하기도 했다. 범아프리카주의 운동가가 범아랍 민중의 저항으로 몰락한 사실은 흥미롭지만 대단한 일은 아니다. 어쨌든 리비아와 미국의 래퍼들이 자신들의 억압자에게 저항해 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