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는 ‘HIV/AIDS 인권모임 나누리+’(나누리+) 주최로 ‘HIV/AIDS 정부 관리정책과 감염인의 인권’토론회가 열렸다. 당초 이날 토론회에는 정부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토론회 시작 2시간 전 질병관리본부 관계자가 행사 불참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정부 측 입장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날 토론회는 HIV 감염인과 AIDS 환자 그리고 보건의료단체회원 등 20여 명이 참석해 정부관리정책의 문제점과 감염인 인권침해 실태를 중심으로 약 3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HIV/AIDS에 대한 인식, 일반인과 보건의료인들 별 차이 없어
이날 첫 발제를 맡은 나누리+ 윤호제 대표는 HIV/AIDS에 대한 비감염인들의 인식과 태도 및 감염인의 인권침해 실사례들을 중심으로 발표했다.
윤호제 대표는 “일상적 접촉이 HIV의 감염 경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잔 등의 사용을 감염 경로로 생각하는 경우가 34.9%에 이르는 등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여전히 불필요한 공포가 형성되어 있다”며 일반인들의 HIV/AIDS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지적했다.
한국에이즈퇴지연맹의 ‘2003년 전국민 성행태 및 에이즈 의식연구’에 따르면 ‘에이즈 감염자는 다른 사람과 격리시켜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48.5%의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응답했으며, ‘자녀가 에이즈 감염자와 같은 학교에 다니도록 허용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50%를 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윤호제 대표는 또 “2004년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를 통한 공보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벼운 질환으로 진료받기 원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에서 의사들의 상당수가 진료하지 않겠다거나(20.4%) 잘 모르겠다(10.6%)고 대답했다”며 “일반인들 뿐 만 아니라 보건의료인들 또한 HIV/AIDS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왜곡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감염인들, 일할 권리까지 박탈당해
윤 대표는 직장 내에서 감염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대해 “직장 건강검진에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에이즈 검사가 관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이를 통해 양성으로 판명될 경우 대부분 해고 또는 자진퇴사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윤 대표는 “해고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퇴사는 본인의 의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HIV/AIDS 감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이들의 해고와 퇴사에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HIV/AIDS 감염인들이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발제를 한 '행동하는 의사회' 미류 씨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이즈예방법)을 통해 드러나는 국가의 HIV/AIDS 관리정책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었다.
“실효성 없는 HIV검사 정책들을 방치”
미류 씨는 “인권의 시각에서 검토해볼 때 국내 HIV 검사 정책은 많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며 “이미 실효가 없다고 인정되는 정책들을 방치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HIV검사 정책의 낙후성을 지적했다.
미류 씨는 현재 실시되고 있는 익명 검사에 대해 “검사결과 양성 판정이 나오면 곧바로 실명의 보고가 이루어지고 이후 사회적 제재와 무거운 의무를 부과하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익명 검사가 무의미한 상황”이라며 “그런 이유로 익명 검사의 이용률도 높지 않다”며 익명검사의 비익명성을 지적했다.
또 “많은 나라들이 검사를 시행하기에 앞서 검사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피검자도 모르는 사이에 검사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며 “서울시내 상당수 병원과 전문검진센터가 에이즈 검사를 건강검진에 포함시키고 있고, 회사에 검진 결과를 종합해 보내주고 있다”며 개인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HIV검사 행태를 지적했다.
“관리 과정에서 신상정보 유출이 감염인들을 공공보건체계로부터 격리시켜”
태국의 경우 HIV 감염초기에 실명신고를 의무화하였다가 HIV 전파방지에 실효가 없자 익명보고를 하고 있으며, 그 결과 태국은 현재 감염율이 떨어지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사례도 지적했다.
계속해서 “감염인의 신상정보가 신고, 보고되는 과정에서 누설되고 그로 인한 인권침해가 오히려 감염인들을 공공보건체계로부터 격리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며 보건당국의 감염인 관리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성 정체성과 에이즈는 관련 없을 뿐더러 동성 파트너를 만나는 장소까지 기입하도록 하는 것은 과도한 사생활게 침해”
감염인 관리 과정에서 보고되는 내용의 몰인권적 구성도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항체 양성 판정을 받게 되면 감염자관리명부와 역학조사서, 주민등록등본이 질병관리본부 에이즈, 결핵관리과로 송부된다. 이중 감염자관리명부는 자치단체장을 거쳐 보건복지부로 보고되는 서식이다. 현재 감염자관리명부에는 ‘주요감염경로조사(추정)’ 목록을 통해 ‘이성간 성접촉, 동성애, 수술, 수혈, 혈액제재, 마약주사, 기타’로 추정감염경로 항목을 구분해 놓고 있다.
이에 대해 미류 씨는 “‘주요감염경로조사’ 조항이 성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내포하고 있으며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며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동성간 성접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이성애자 역시 동성간 성접촉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까지 보고된 바에 따르면 여성 동성애자의 성관계는 전염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외국에서는 에이즈와 관련하여 MSM(Men sex with men)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류 씨는 “성관계를 통한 전염의 추이를 확인하는 데에 이성애나 동성애와 같은 성 정체성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며 “성 정체성 자체는 에이즈와 관련이 없을 뿐더러 동성파트너를 만나는 장소까지 기입하도록 하는 것은 사생활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규정”이라고 말했다.
또 “굳이 구분이 필요하다면 적어도 ‘이성간 성접촉/동성간 성접촉’으로 수정하거나 아예 ‘질삽입성교/항문삽입성교’와 같은 구체적인 행위로 구분해야 한다”며 현재 감염자관리명부가 채택하고 있는 내용의 성차별적, 몰인권적 구성을 비판했다. 이어 “오히려 성접촉력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은 콘돔 사용 여부 정도”라며 “예방정책의 마련과 실효성 평가를 위해서도 콘돔 사용 여부는 조사될 만하다”고 밝혔다.
“남성 성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상품/서비스’를 관리하는 정책”
현행 에이즈예방법은 제8조 1항과 2항, 그리고 시행령 제10조에 강제적 의무검진조항을 두고 있다. 제8조 제1항은 ‘휴게음식점 영업 중 다방의 여자종업원, 유흥접객원, 안마시술소의 여자종업원, 특수업태부’에 대한 강제검진을 6개월 간격으로 연 2회 실시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또 감염인을 고용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류 씨는 “제1항은 암묵적으로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조항”이라며 “UNAIDS의 권고를 보더라도 수혈 혹은 장기기증시를 제외한 강제검진은 국제인권법상 차별금지에 대한 조항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미류 씨는 “남성 감염인이 훨씬 많은 감염인 현황을 보더라도 유독 성매매여성에 대한 강제검진조항을 강조하여 나열한 것은 실효성이 의문시되며, 오히려 피감염자가 되기 쉬운 계층을 예비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라며 성매매여성에 대한 강제검진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성관계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감염시킬 확률보다 남성이 여성에게 감염시킬 확률이 높다는 것은 알려진 바 있다.
미류 씨는 “성매매여성은 질병의 온상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한 질병의 피해자”라며 “이 조항은 성매매특별법에서 범죄자로 다루고 있는 남성 성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상품/서비스‘를 관리하는 정책일 뿐”이라며 성매매여성을 방치하는 에이즈예방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성구매자들은 자의로 콘돔을 사용할 수 있으며 콘돔의 사용으로 성병과 HIV 감염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며 “국가가 에이즈 예방을 위해 정책적으로 보호해야 할 집단은 사회적 권력관계로 인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성매매여성”이라며 성매매여성 보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 ‘감염되기 쉬운 환경’으로부터 그/녀들을 보호하는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
끝으로 미류 씨는 “한국의 에이즈 예방법은 공포를 이용한 통제 패러다임에 근거했다”며 “에이즈는 질병일 뿐임에도 범죄자처럼 다루며 사회적으로 그/녀들을 격리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줄이기 위해서 감염인 또는 감염되기 쉬운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염되기 쉬운 환경’으로부터 그/녀들을 보호하는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며 에이즈예방 정책의 보다 근본적인 전략의 재수립을 촉구했다.
한편, 윤호제 대표는 질병관리본부 관계자 불참에 대해“당초 12일로 잡혀있던 일정을 질병관리본부 관계자의 일정에 맞춰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불참을 통보했다”며 “감염인들을 무시하는 처사이자 관리당국의 현재의 인식수준을 반영하는 행태”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감염인들이 생존권의 위협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것”이라며 “그것을 듣고 정책에 반영할 해당 당사자들이 나오지 이와같은 토론회에 참석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에이즈예방 정책을 하겠다는지 의문”이라며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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