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일요일이었습니다. 3월이어도 며칠 계속 찬바람이 불었지요. 그래도 일요일 그 날은 앞날처럼 몹시 추운 건 아니었습니다. 봄이 오는구나 할 정도로 볕이 따뜻했습니다. 그래서인가 모란공원묘지 오르는 길은 얼었던 땅이 녹아 부드러운 진흙길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모란공원묘지 터가 참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파란 하늘도 묘지 둘레 산도 편안했습니다.
▲ 사진은 '삶이보이는창'의 박상경 님이 보내주었습니다. |
박영진 열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구로, 금천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박영진 열사와 한 공장에서 일하고 투쟁했던 사람들, 야학에 함께 했던 사람들, 박영진 열사를 만난 적은 없지만 뒤를 이어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박영진 열사의 누이와 아우, 조카들, 그리고 아직 박영진이라는 이름도 잘 모르는 어린 꼬마들도 함께 갔습니다. 사실 어린 꼬마들에겐 오랜만에 가는 나들이였을 겁니다. 어른들이 추도식을 하는 동안 저희들끼리 신나서 모란공원묘지 저 꼭대기까지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하더군요. 산 하나 없이, 나무도 거의 없이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 구로 골목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박영진 열사를 만나러 온 엄마나 아빠를 따라 나선 덕분에 오랜만에 숲속 모험에 나섰습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정의가 넘치고 사랑이 있어야 하며, 평화가 있어야 한다. 동지여! 끝까지 투쟁하라. 미안하다.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먼저 가서.”
노동자 박영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간 지 벌써 열아홉 해가 되었습니다. 앞에 글은 박영진 열사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한 말로 묘비에 적혀 있습니다. 1986년 3월 17일이었지요.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신문에서 노동자 박영진의 분신을 기사로 보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신문에서 노동자들의 목숨 건 투쟁을 봅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은 한 치도 변함이 없는가 봅니다. 노동자 박영진이 외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라는 구호가 지금 더욱 절실한 것도 그렇고요.
같은 날 계훈제 선생님의 추도식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많은 사람들이 박영진 열사에게 하얀 국화 한 송이, 절 두 자락, 그리고 마음을 건네주었습니다. 추도식 가운데 의미를 더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구로동맹파업 20년이 되는 올해
올해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난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예전에 ‘노동운동’ 하면 구로공단이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36년 동안 불려왔던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고 디지털1단지, 2단지, 3단지라고 교통표지판에 적혀 있지만요. 공장이전으로 직장폐쇄로 그 많았던 섬유・봉제산업 노동자들이 다 빠지고 패션몰로, 아파트형 공장으로, 세련된 빌딩으로 바뀌어버렸지만요. 그래도 여전히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노동자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이들이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고 연초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나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연대’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그렇다면 진정한 연대는 무엇일까, 노동자의 연대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고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20년 전, 1985년 6월 24일부터 6월 29일까지 6일 동안 벌어진 ‘구로동맹파업’에서 ‘연대’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힘이었지요.
그래서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그간 진행된 일과 앞으로 진행할 일들을 말하고 인사했습니다. 당시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이천여 명의 동지들을 찾는 일부터 한다고 합니다. 그이들을 찾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사는 곳도, 사는 모습도 다 다를 터이고요. 파업으로 해고당하고 해고당해 고생하고, 참 노동자로 살겠다는 의지를 가슴에 품었을 때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행의 길이었을 텐데, ‘노동자’ 그 이름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천여 명의 동지들을 찾아 나서면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노동자의 역사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박영진 열사 앞에서 시작을 알렸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이 사회와 이 시대가 결코 바라지 않을 일들만 애써 찾아 쉬지 않고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버스 한 대를 빌려서 우리는 다녀왔습니다. 다른 해에는 보통 두 대씩 빌렸는데 올해는 지역 일이 하나 겹쳐 따로 오는 사람들이 있어 한 대만 빌렸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리는 여전히 촌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거죠. 제가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들었던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혹시 이런 노래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젠젠젠 젠틀맨이다 젠틀맨이다
양복 입은 너! 너만 잘났냐
작업복 입은 나! 나도 잘났다
젠젠젠 젠틀맨이다 젠틀맨이다
펜대 굴리는 너! 너만 잘났냐
미싱 밟는 나! 나도 잘났다
젠젠젠 젠틀맨이다 젠틀맨이다
양주 먹는 너! 너만 잘났냐
막걸리 먹는 나! 나도 잘났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현장, 대우어패럴에서 일했던 분이 부른 노래입니다. 그이는 당시 미싱사였고, 노동조합 간부이기도 했습니다.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뒤에도 여전히 노동자였고, 지금도 미싱을 밟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20년이 흐르는 동안 동지들과 소식도 끊기고 사는 일에 묻혀 살아야 했습니다. 그이가 아침에 차를 타고 떠날 때 “이런 자리에 함께 하게 되어 무척 기쁘고 가슴이 떨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가슴 떨림 없이 그저 어디고 가는 일 없는가 챙겨야겠습니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새겨진 사랑이
이다지도 깊은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아아아아 아아아아
진정 난 몰랐었네
가수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죠. 요즘 20대는 잘 모르겠지만 30대부터는 웬만큼 아는 노래일 겁니다. 어렸을 때 온갖 폼 잡고 불렀던 기억이 있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버스 안에서 부른 분은 박영진 열사와 함께 동일제강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친구입니다. 박영진 열사가 분신을 하고 난 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불렀던 노래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 노래를 들으니 아, 이 노래가 참 좋더군요. 그리고 참 아픈 노래더군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 다 해 바둥치는 전쟁 같은 노동일
아, 오래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이 절망벽 깨뜨려 솟구칠
거친 땀방울 피눈물 속에서 숨쉬며 자라나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오를 때까지
노동자의 햇새벽이 오를 때까지
노동현장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없어진 구로노동상담소를 거쳐 서울여성노동자회에서 죽 활동하는 분이 ‘노동의 새벽’을 불렀습니다. 늘 맑은 얼굴이었고, 늘 잔잔한 웃음 잃지 않는 밝은 눈빛을 한 그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구로동 닭장집에서 자취하면서 다녔을 공장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전쟁 같은 낮일과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찬 소주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붓고 있을 ‘우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개나리 만발한 담장에 기대면
꿈결처럼 떠오르는 언니의 얼굴
지친 내 어깨에 따스한 손길로
힘내자 하던 언니
당당한 우리 권리 찾자던
인간답게 살자던 언니의 약속
파업 투쟁 속에 떠나간 언니
그 모습이 눈에 어리네
기억하나요? ‘G라인 언니’라는 노래입니다. 이제 좀 있으면 개나리가 피겠지요. 해마다 봄이면 구로공단 공장 담벼락과 공단길에는 개나리와 목련, 붉은 장미가 무슨 전령인 듯 피어났습니다. 그 꽃들처럼 아름다웠던 노동자들이 살았고요. 사람들이 다 잊었을 이 노래를 가끔씩 불러 90년대 초를 떠올리게 하는 분은 시인인데 시인의 가슴속에 노래에 나오는 이들의 얼굴이 내내 담겨 있어 오늘도 구로에서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나 봅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나는 소사장제 도입으로 투쟁을 오래 했던 구로1공단 싸니전기에서 일하던 후배가 떠오릅니다. 여전히 스무 살 앳된 그 얼굴이.
그 뒤로도 노래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남행열차’도 나오고, ‘불티’도 나오고 ‘참사랑’, ‘소양강 처녀’도, ‘삼다도’도 나왔습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문화단체에서 일한다는 분, 노동자의 책을 만드는 분, 노동운동을 하면서 구로에 터를 잡고 지역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부른 노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에 나온 노래는 ‘또다시 앞으로’와 ‘한결같이’였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분은 정말이지 한결같이 추모식 때마다 음식을 준비해와 정성스레 차려내고 추모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언제나 몸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노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노동가요든 대중가요든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다 좋더군요. 그리고 난 내 맘대로 느껴버렸습니다.
한 차를 탄 운명일까요. 출발했던 가리봉 오거리에 버스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 다 되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뿔뿔이 각자 갈 곳으로 흩어졌지만 우리가 함께 한 길은 결코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가리봉 오거리까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70년대, 80년대부터 ‘세상을 바꾸겠다’고 시작한 사람이든 90년대부터 시작한 사람이든 2000년대부터 시작한 사람이든, 노동자 박영진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구로에 남은 사람이든 구로를 떠난 사람이든,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한 길을 가려고 할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