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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11시 영상원 연구실, 전규찬 교수는 화가 나 있었다. 어제 PD수첩 특집 방송 시청 소감을 묻자 대뜸 "한국 사회 지식인, 학자, 과학자들 도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식사회'가 갈 데 까지 간 것 같다며 "자기 고백과 양심선언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X파일, 강정규 교수, 아펙, 농민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그리고 황우석 사태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지식인이 입을 다물고 있더라는 지적이다. 지식인이 "대중/다중의 판단의 메뉴를 제공하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정신과 개념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 역할은 안 하고 "그런 상황에서 대중/다중에게 사후적인 판단에 잣대를 들이미는 건 비겁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중이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계기를 제공하지 않은 채, 분출하는 '대중의 욕망'에 대해 "파쇼다, 파쇼적 대중이다, 몽매한 대중이 수구매체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발언하는 것은 "신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지식인들이 면책을 위해 보여주는 나쁜 습성"이라고 분명히 짚었다.
전규찬 교수에 따르면 대중은 "때로는 애국적이기도 하고, 국수적이기도 하고, 선량하기도 하다. 동일한 대중/다중의 동일한 에네르기가 왜 그런지를 살펴야 한다. 바로 거기서 그 조건을 깨는 것이어야 한다"며 지식인의 개입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환기한다.
전규찬 교수는 '화석화' 된 진보 좌파를 향해 자기비판의 날을 세웠다. 수구매체를 모니터링 할 게 아니라 "진보 좌파가 이번 사태에 어떤 수준에서 어떤 이야기하면서 개입했느냐를 모니터링 해야 한다"며 결정적인 위기 시점에 입을 다무는 모습을 낱낱이 다 뜯어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례로 "오마이뉴스 유창선이 진보를 향해 '일그러진 진보' '화석화된 진보주의'라며 진보 좌파를 공격하는데도 침묵하더라" 라며 침묵하는 진보 좌파를 향한 아쉬움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한편 모두가 납작 엎드려 있을 때 "포기하다시피 한 인터넷에서 청년과학자들이 소통하고 활동하고 있었다"며 "진실을 가지고 이 신화를 깨뜨린다는 청년과학자들의 성실한 모습을 보면서 아! 너무 주눅들 필요 없다"며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말했다. "브릭(BRIC)에 주목하고, 브릭에서 다시 한 번 정신을 맑게 하고, 그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모습에서 힘을 얻었다. 청년과학자들, 그분들이 영웅이다"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그들이 언론인이고 그들이 지식인이었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전규찬 교수는 인터뷰 과정에서 김대중칼럼을 보며 '죽음의 수사학'이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작동하는 지를 짚었다. YTN과 조중동이 '죽이러 왔다'는 카피를 대문짝만하게 뽑을 때, "김대중칼럼은 그걸 교묘하게 증폭시켜 죽음이 주는 공포감을 확산시켰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죽임을 가져오는 원인제공자(PD수첩팀)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기피감을 만들고 공권력의 처벌 공분을 불러일으켰다"는 설명이다. '죽음의 수사학'이 주는 가공할 비이성의 현실을 개탄하며 한겨레칼럼을 썼다고 말했다.
전규찬 교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MBC에 의한 YTN 때리기와 진보와 리버럴에 의한 보수 수구 때리기"가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진실은 규명해나가지만 각 영역이 자기 실패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보는 작업"을 해야 하고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 광기에 포섭되고 포기했던 자기 무능에 대해 되돌아보는 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전날 녹화를 끝내고 잠을 거의 못 자 까칠한 모습의 전규찬 교수. 짧은 인터뷰 시간인데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필시 우리가 조우하고 있는 '무능한 진보 좌파', '입다문 지식인'이라는 자기고백 앞에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까닭이다. 국가와 시장주의, 그 비이성의 신화가 낳은 왜곡되고 일그러진 황우석 사태는 아직도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황우석과 노성일이 줄줄이 기자회견을 하며 사회구성원을 희롱하고 농락하는데 오늘날 '진보 좌파'는 과연 사태 파악이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황우석사태진단] 세 번째, '황우석 사태와 언론'은 이 인터뷰 기사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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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의 내용대로 황우석 교수 스스로 지난 10월 24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면 이렇게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다. 방송 보면서 우리 한국 사회의 아픔, 상처 모두가 느끼지 않았겠는가. 아쉬운 점 하나는 무임승차를 한 25명의 과학자들이다. 이 신화가 진짜 신화란 걸 알고 있던 과학자들이 카메라 앞에서는 말할 수 있으면서 밖으로 말하는 용기는 왜 없었는지... 과연 진실보다 신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권력 부담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이것저것 떠나서 한국 사회 지식인, 학자, 과학자들 도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가. 우리 전체의 실패다. 우리 모두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이번에 과학이, 언론보도가 양심고백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식사회는 이미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지식사회는 고백하고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 사실 노성일 씨 발언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이므로 크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비애감이랄까... 실체없는 괴물이 얼굴을 내밀었고, 공포라기보다 별거 아닌 게 '국익' '영웅' '신화'로 되면서 저렇게 못살게 하다니... 참담했다.
지난 12월 1일 문화연대, 민언련 등이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신화의 폭력, 사유의 구속'이라는 글을 발제했다. 인상깊은 내용이었다. 그 글에서 푸코가 말한 '두려움없는 발언'을 들어 언론자유의 근본정신을 포기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금 시기 언론자유 문제를 유난히 강조한 이유는 뭔지
지금 우리는 언론자유를 기정사실화 하는 것 같다. 그걸 87년, 93년 이후 한국 사회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인다. X파일, 강정구 교수, 아펙 그리고 이번 사태를 경과하면서 한국 사회 언론자유가 과연 실재하는 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시장과 신자유주의가 허락하는 언론자유는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전체주의의 기원」「혁명에 관하여」「공화국의 위기」 등의 저자)가 말하는 사적 언론자유는 있다. 그렇지만 공공영역 내에서 공개적으로 진실을 발언하고 소통하는 공적 언론자유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론장이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장 안에서 사적인 수준 내에서만 발언하고 사적 수준에서 소통은 가능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은 우리 삶과 관련된 것을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이성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언론자유의 근원을 추적했던 푸코의 파레시아(parrhesia) 개념을 되돌아보게 된다. 푸코는 솔직하게, 두려움 없이 권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 내고자하는 양심, 내야 하겠다는 책무감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언론자유라 할 수 있는데 한국 사회는 언론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화를 위한 검열을 작동한다. 그 검열을 의식하는 자기검열이 존재한다. 언론이 자기 검열 과정에서 공공적 소통, 공적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따라서 언론자유가 부재한 현실이 만들어졌다.
언론에서 특히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X파일 때도, 아펙 때도, 이번에도 진보적 지식인들의 발언은 미약해 보인다. 공적 자유를 위한 공공적 소통을 포기해버린 듯한 인상도 받는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시장 내의 자유를 공적인 자유로 착각하고 오해해왔다. 연구자, 지식인들이 나서서 그런 신화를 만들었다. 수구매체가 만들어내는 허위의식, 선전, 이데올로기를 말하면서 우리는 문제없고 그들만이 문제라고 하는 논리는 가증스런 변명이다.
정치적 무의식 속에 언론자유가 허락되어 있다 라고 믿는 것이 신화를 확대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 한가운데 학자와 지식인이 존재한다. 최근 사태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대중을 향해 냉소적인 목소리로 파쇼다, 파쇼적 대중이다, 몽매한 대중이 수구매체에 놀아나고 있다 라고 발언하는데, 이건 신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지식인들이 면책을 위해 보여주는 나쁜 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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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다중은 가끔은 애국적, 국수적, 민족주의적이기도 하고, 지독히 반미적이기도 하고, 또 보편적이기도 하다... [출처: 여성주의저널 일다] |
대중의 욕망은 에네르기 같은 것인데, 그 에네르기가 특정한 국면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얼굴 모습을 띤다. '천 개의 고원'처럼 고원을 이루되 고원의 양식들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때로는 애국적이기도 하고, 국수적이기도 하고, 선량하기도 하다. 동일한 대중/다중의 동일한 에네르기가 왜 그런지를 살펴야 한다. 바로 거기서 그 조건을 깨는 것이어야 한다.
'대중의 욕망'이 시사하는 바, 에네르기가 왜곡 굴절되는 조건을 깨뜨려야 한다는 지적은 중요하다고 본다. 지식인의 역할을 놓고 정말 깊이있는 자기 진단을 해야 할 시기이다.
결정적인 조건 중 하나가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대중/다중의 판단의 메뉴를 제공하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정신과 개념을 제공해야 한다. 대중/다중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해야 한다. 그게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걸 제공하지는 않으면 대중/다중이 무언가를 판단할 어떤 것도 봉쇄되어 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다중에게 사후적인 판단에 잣대를 들이미는 건 비겁한 일이다.
PD수첩이 취재윤리 문제로 쏠렸을 때 '그거 아니다' '저거다' 하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런 걸 안 하지 않았는가. 대중이 '취재윤리' 문제에 쏠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중/다중은 자신의 과오를 돌아본다. 과오라고 판단되면 냉철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 그런데 지식인은 안 그런다. 기껏 수구매체 이야기나 하고, 연구꺼리 이야기나 하고 그런다.
전규찬 교수가 15일 쓴 한겨레칼럼, '죽음의 언론플레이는 그만'을 잘 읽었다. 죽음의 수사학을 말했다. 그 글에서 "PD수첩을 포함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협박 수단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황 교수 연구 업적을 깎아내리려' 하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마녀사냥”꾼이라고 폄훼한 '김대중칼럼'으로 죽음의 수사학은 끝내야 한다"고 했다. 황우석 사태 한 가운데서 '죽음' 이야기가 횡행한다.
우선 그 글에서 죽음이란 걸 부각시킨 건 '김대중칼럼'만을 고려한 건 아니었다. 황우석 사태와 관련해서 회자되는 시나리오의 하나로, 황우석 교수가 마지막으로 취할 옵션 중 하나가 자해소동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황우석 교수 스스로 "연구실에서 죽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개인 자문위에서도 "죽인다" 라는 말을 입에서 입으로 퍼뜨리는 모습이었다.
난자 공여에 따른 윤리문제와 논문 진위를 가리는 본질적인 문제를 PD수첩의 취재윤리 문제를 들어 분위기를 돌릴 때 '죽이러 갔다'고 했다. YTN 보도에서, 조중동에서 하나같이 그 카피를 대문짝만하게 뽑았다. 김대중칼럼은 그걸 교묘하게 증폭시켜 죽음이 주는 공포감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죽임을 가져오는 원인제공자(PD수첩팀)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기피감을 만들고 공권력의 처벌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의 수사학은 진실과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 위험하므로 대충 덮어야 한다는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이건 우리 내부자들에 대한 외부의 테러와 같은 전형적인 이분법을 보인다. 부시가 끊임없이 미국을 제국화하는 것도 이런 죽음의 수사학에 해당한다. 김대중칼럼은 의도적으로 이 죽음의 수사학을 사용했다. '죽음'을 동원, 우리로 하여금 약간의 상처를 받더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와 신념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죽여버리는 고도의 장치다.
황우석 팀이 죽음의 공포감을 부르고, YTN이나 다수 매체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죽음의 레토릭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김대중의 '보통사람들'이란 게 아주 교묘한데, 진보 좌파가 보통사람을 파쇼적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버렸을 때 전략전술적으로 보통사람, 즉 선량한 사람을 그 자체인 것처럼 땡겨내는 이 무시무시한 화술이 놀라웠다.
김대중칼럼과 죽음의 수사학이 난무할 때 진보적 언론과 지식인 그 수사를 덜어내고자 하는 노력을 제대로 못했다. 죽음과 공포가 은폐하려 한 진실과의 대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주눅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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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운동 시민운동 진영에서 진행한 12월 1일 토론은 늦지 않은 개입이었다고 생각한다. 보통 매체들 거의 무시하며 안 다뤄서 브레이크 거는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안을 보는 또다른 시각을 제공했던 중요한 토론회였다.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본다. 그 후 언론정보학회가 13일 토론회를 했다. 그런데 만약 그때까지 국면 전환이 안 되었다면 과연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냐는 거다. 뻔하다. PD저널리즘 죽이고 있었을 거다. 지금 할 일이 아니다. 언론 비평 모니터링 하는 작업도 필요하지만 그게 진보적 언론학자들, 언론운동 단체들, 진보적 학계가 나와서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너무 싱거웠고 허접한 이야기로 보였다. 한마디로 위험스럽지 않았다는 거다. 좀더 위험하게 발언하고, 우리 사회가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학계가 짚어주고 그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현실을 바꿔나가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공적 토론, 뒷북치는 언론, 그거 뭐하는 거냐. 면피하는 것 밖에 안 된다. 그 시점은 'MBC win, YTN lose'를 판단하고 사태의 본질을 추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언론학자나 비평가들이 할 이야기는 YTN 이야기 대범하게 짚어내고, 왜 그랬나를 용기있게 따지는 거였어야 했다. 그랬으면 사태 해결은 또 며칠 앞당겼을 거다. 그런 부분 주저주저하는 게 아쉬웠다.
12월 1일 토론회가 있은 지 얼마 안 돼 PD수첩 취재윤리 문제가 불거졌다. 안규리 교수와 YTN이 피츠버그에 갔다오고, 김선종 연구원의 인터뷰 방송이 나가면서 개혁적 언론운동단체 대부분이 낙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상당히 어리둥절하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대항담론 머리도 안 돌아가고, 대항담론 갖고 나갔을 때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며 양문석 정책위원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3-4일 동안 '취재윤리'에 묻혀 아무 것도 안 먹혔다. '죽인다' 담론 돌아가고, 브레이크 걸었던 것이 다시 무효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행한 소식을 접했다. 포기하다시피 한 인터넷에서 청년과학자들이 소통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통하면서 놀라운 진실을 발굴했다. 이데올로기나 정치 이런 것과 관계없이 진실을 찾아내고 있었다. 진실을 가지고 이 신화를 깨뜨린다는 청년과학자들의 성실한 모습을 보면서 아! 너무 주눅들 필요 없다. 청년들이 하는데 힘 빠져 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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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릭 홈페이지. 전규찬 교수는 청년과학자들이 영웅이라고 말했다. |
전통적 지식인들, 수구화된 지식인은 용도가 다 된 듯 하다. 특히 아쉬운 건 젊은 인문사회연구자들은 이번 사태에 뭘 하고 있나 하는 점이다. 기성학자들이 안 되면 지금 30대 아주 말 잘하는, 정말 현란한 레토릭 쓰고 그러는 30대들 지금 뭐하고 있냐는 거다. 납작 엎드려서... 학술적으로 급진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 강단좌파들...
진짜 모니터링을 할 거면 수구매체가 아니라 진보 좌파가 이번 사태에 어떤 수준에서 어떤 이야기하면서 개입했느냐를 모니터링 해야 한다. 평상시에 활발하다가 결정적인 위기 시점에 입 다무는 것 다 뜯어봐야 한다. X파일, 강정구 사건, 아펙 사건 쭉 보면 그렇다. 진보 좌파라고 했던 많은 선생들 중 몇 사람 빼면 죄다 포기하는 모양이다. 왜 노골적인 발언을 안 하나.
오마이뉴스 유창선이 나와서 진보를 향해 '일그러진 진보' '화석화된 진보주의'라고 떠들며 진보를 공격하는데도 진보 좌파는 침묵하더라. 그렇게 욕을 바가지로 먹는데도... 진보가 없거나, 아니면 있어도 그런 것에 분노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냉랭하거나, 아니면 그런 말 듣고도 눈치보며 용기를 못 내거나...
유창선칼럼을 보면서 진보와 구분하려는 리버럴한테도 분개했지만, 무능한 진보에 대해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언론, 표현의 자유 문제는 좌파의 의제가 아니라 리버럴의 의제이다. 그런데 한국의 리버럴은 지금 이걸 진보 좌파에게 미루고, 가장 중요한 의제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데 말이다.
황우석 연구팀은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 포진하고, 국가의 지원을 얻어 연구활동을 해왔다. 최근에는 아이러브황우석의 운영자가 황우석 사단의 주요 멤버인 것도 밝혀졌다. 황우석 사단과 국가-의료산업-언론과의 카르텔을 어떻게 볼 수 있나
12월 1일 발표할 때도 이건 과학과 자본과 국가의 삼각체제라고 했는데, 과학이 국가와 자본과 근친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 매체까지 넣어 4각동맹체제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YS DJ 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한국 사회 변화의 화두는 전문가 이름의 학자를 통해서 나온다. 정책적으로 정부가 채택하는 듯 하지만 그 배후에 진짜 주인공은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자본이 움직인다.
영상산업의 대부분도 그렇다. 거대자본 삼성이 개발해낸 정책 의제 이데롤로기를 자신들이 지원하고 후원하는 학자들 통해서 사회적으로 발산시키고, 그를 통해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되도록 하는 고리가 작동되고 있다. 고리는 다시 전문가와 연결되어, 미디어로 가서 칼럼을 통해 대중적 재생산을 강화하는 구조이다.
PD수첩 등은 그런 부분을 드러냈다고 본다. 황우석 사태를 일면으로만 보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이런 실체를 드러내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나 싶다.
PD수첩 1차방송 이후 광고주들의 광고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어떻게 생각하나
어려운 문제이다. 순진하게 생각하면 여론의 동향에 기회주의적으로 영합하는 자본의 추수주의 문제로 보인다. 이건 공공방송의 존립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MBC 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상파와 매체 전체에 있어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사안이다.
솔직하게 여론 동향에 영합한다지만, 여론 자체가 황우석 팀에 의한 조작 플레이였다는 걸 감안하면 광고주의 광고 중단 소동은 '여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작된 여론'에 의한 일종의 조작일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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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브황우석 싸이트 대문 사진, MBC 광고 중단 선동에 이어, MBC 10대 가수상에 불참 태도를 보인 연예인을 반MBC 선동 수단으로 삼고 있다. |
황우석 신드롬의 배경에 국익이 따라다녔다. 황우석 교수는 과학자로서 늘 조국을 강조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국익과 연결된다는 걸 강조했고,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여야 의원모임도 국익을 강조했다. 이윽고 천 명이 넘는 난자기증 희망자들도 국익을 위해 기꺼이 난자 기증을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갈등이 커지는 데도 불구하고 국익 이데올로기가 만연하게 되는 데는 그만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봐야겠는데
개인적으로 국민이란 말을 혐오하고 싫어한다. 국민은 국가주의, 국가지성주의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 상징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2-30년대 일제 체제 하 천황 중심의 전체주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획된 개념이고 그래서 만들어진 주체이자 의식이다. 가정에서는 아버지, 나라는 대통령, 모두에게는 국가라는 무의식을 갖고 있는 거다.
이게 수구매체의 논리라는 건 부분적인 해석이다. 한국 근현대사 자체에 총체적으로 규정되는 문제이다. 민중의 무의식의 기저에 충효와 가화만사성이라는 국가와 결부된 민중 주체가 발견된다. 자동화된 무의식과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측면이다.
수구매체는 그 심성을 활용한다. 따라서 '국민' '국익' 레토릭에 대해, 역사적 근원인 전체주의적 호명의 위력에 대해 아주 주의 깊게 쫓아가야 한다. 최근 국익 이데올로기가 만연 되는 배경에는 한국 사회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을 내부적인 모순으로 안 풀고 외부적으로 밀어내려는 묘한 왜곡이 있다. 황우석 교수가 나쁘긴 하지만 미국놈, 일본놈 보다 낫지 않냐는 것이 은근히 깔려있다. 음모론 이야기도 그렇다.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에서 전체주의 국가주의와 내재적으로 결합된 것 뿐 아니라 우리 아닌 그들, 미국이나 과거 일본놈들과 대비하며 우리, 우리를 보호할 국가, 국익이라는 묘한 자기 봉쇄가 만들어진다는 거다.
한편 자본과 맞물려 한번 더 왜곡되는데, 대기업 광고 보면 드러난다. 대한민국, 태극기, 애국 이런 거 은근쓸쩍 다 내세우지 않나. 자본의 길이 한국의 길이고 우리 모두의 길이라는 뉘앙스가 얼마나 많나. 자본이 국익을 바로 꺼내지는 않지만 민족 애국 그리고 우리 의식 이런 걸 앞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이고 민중, 다중 모두의 이익이라는 등식을 완성시킨다.
노성일 이사장의 주장에 따르면 '줄기세포가 없다'라는 건데, 그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왜곡 굴절된 사회문화를 바로 잡고 이성을 회복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위해 우선 해야 할 일을 짚자면
지금 두 가지 옵션이 가능해 보인다. MBC에 의한 YTN 때리기와 진보와 리버럴에 의한 보수 수구 때리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건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이건 또 다른 역풍을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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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길은 진실은 규명해나가지만 각 영역이 자기 실패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보는 작업이다.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 진실 추구는 매체가 하겠지만, 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 광기에 포섭되고 포기했던 자기 무능에 대해 되돌아보는 게 필요하다.
언론운동 매체운동 관계해서는 이번 계기가 앞서 말한 대로 언론자유가 부실하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 사태를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진보적 매체운동이 당장 해야 할 고민은 기존 언론개혁운동에서 나아가 일련의 사태에 대한 '언론자유 없음'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앞으로 조선일보가 어떻게 나올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걸 기회로 삼아 노무현정권을 악착같이 물고늘어질 수 있다. X파일 건도 그렇고 진실 규명이나, 황우석 교수 윤리 문제는 해결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어찌 보면 더 큰 일이 남아 있다. 지금은 출구가 아니라 입구에 서 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후폭풍을 앞둔 전야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