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바닥에서 설을 맞이하다

한국화인케미칼노조, 진지하고 성실한 대화 한 번만이라도

“무조건 임금을 5%로 깎자, 상여금 200% 줄여라, 정년 2년 단축하자고 하니…. 기자님 같으면 어떡하겠어요?”

한국화인케미칼에 입사한지 올해로 25년째인 한 조합원은 한숨을 내쉬며 기자에게 역으로 질문을 한다. 올해 만 55세다. 57세로 되어 있는 퇴직연한이 회사 요구처럼 2년 단축을 한다면, 당장 회사를 나가야 할 판이다.

총파업 84일째인 한국화인케미칼노동조합이 서울 본사 상경투쟁을 하는 진양빌딩 7층 농성장을 24일 찾아갔다. ‘결사투쟁’이 적힌 붉은 머리띠를 맨 조합원 30여 명이 복도에 앉아 농성을 하고 있다.
  최종관 위원장

최종관 위원장은 바람은 너무도 작고 소박하다. 회사와 진지하고 성실하게 교섭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다. 지난 11월 3일 총파업이 들어가기 전까지 임금협상 11차례, 단체협상 8차례를 하도록 회사는 제시안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노조에서 처음 임금인상 요구안인 9.5%에서 6.5%로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회사는 아무런 제시안을 내지 않았다.

“대꾸가 있어야 양보를 하든지 협상을 하지요. 협상 기간 내내 어떤 제시안도 없더니, 파업에 들어가니까 제시안을 내놓는 거예요. 임금 5%로 삭감, 상여금 200%로 삭감, 정년 2년 단축. 이게 제시안 입니까? 무시를 하는 거지. 협상 테이블에 앉아 회사 측 안을 수용할거냐를 묻고, 아직 (노조가) 전향적인 자세가 되지 않았으니 말 할게 없다고 나가버리는 거예요. 이건 협상이 아니죠. 무조건 따라라 하는 거 아닙니까?”

한국화인케미칼은 우레탄수지를 생산한다. 매출 규모는 2천3백억 원이고, 2003년까지 20년 이상 흑자를 내온 기업이다. 거의 생산물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매년 수백억 원의 순이익을 냈다. 김대중정권 때 외자유치를 목적으로 설립된 다국적기업 BASF가 여수에 들어서면서 독점은 사라지게 됐다.

“독점체계가 무너져 회사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안다. 하지만 BASF가 들어온 지 10년이 넘어요. 2003년까지 경쟁업체가 새로 생겨도 돈이 남으니 경영진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어요. 2004년 적자가 되자,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리고,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거 아닙니까?”

  본사 사무실이 있는 진양빌딩

한국화인케미칼은 진양그룹 소속이다. 2004년 적자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진양그룹의 효자 노릇을 하며 이윤을 남겼다. 지금 농성을 하고 있는 진양빌딩도 본래는 화인케미칼빌딩이라고 불렸다. 적자로 돌아서자 빌딩 이름마저 바꿨다고 한다.

설이 눈앞에 다가왔다. 월급은 두 달 넘게 받지 못했다. 타결이 되지 않으면, 고향도 가족도 등지고 서울에서 설을 지낼 처지다. 지금은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13년 근무한 황두선 조합원은 설이 다가오니 가슴이 막막하다.

“저는 애가 하나라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죠.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는 자식을 두신 분도 있고, 아프신 분들도 있어요. 고향의 부모님께 조금씩 용돈을 부쳐 들였는데, 파업을 하고는 용돈도 드리지 못해요. 아버님이 제 소식을 듣더니, 돈을 부쳐 줄 테니 계좌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찌 그 돈을 받습니까?”

  7층 복도에서 농성 중인 조합원들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회사의 어려움을 나눌 생각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회사에서 대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다. 진양그룹을 키우고, 20년 넘게 순이익을 내는데 애쓴 노동자를 한두 해 적자가 났다고, 길거리로 내모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고 한다.

“협상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한다. 아무런 대꾸가 없으니 너무 답답할 뿐이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고 정년을 맞고 싶은 게 소원인데…. 청춘을 바쳐 일했는데, 유예기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는데, 기자님 어찌 해야 합니까?”

25년 한국화인케미칼에서 일했다는, 회사 측 요구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면 당장 쫓겨 날 판이라는 쉰다섯, 무척이나 이마의 주름이 깊던 조합원의 울먹이던 목소리가 농성장 밖까지 쫓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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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J

    본문 내용 중 "2004년 적자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진양그룹의 효자 노릇을 하며 이윤을 남겠다."에서 => "남겼다." 가 맞는듯..

  • 오도엽

    고맙습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