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측의 한미FTA 재협상 요구가 예상되는 가운데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딜레마에 빠졌다.
지난 4월 한미FTA 협상 타결 선언 이후에도 미 의회에서 한미FTA 비준 열쇠를 쥐고 있는 상원 맥스 보커스 재무위원장원(민주당)과 하원 찰스 랭글 세입세출위원장(민주당), 세입세출위 산하 샌더 레빈 무역소위원장(민주당) 등은 한미FTA 협상 결과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지속적으로 ‘재협상’을 요구했다.
사실상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과 요구할 경우 한국 정부가 재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했던 바이다. 미 의회와 민주당의 신통상정책 합의라는 구체적 변수가 생겼지만, 어차피 결과는 예상 가능했던 시나리오다.
문제는 재협상 여부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분위기, 정부가 어떤 명분으로, 어떤 내용을 들고 협상에 나설 것인가를 관망하는 자세 그리고 재협상으로 뭔가 더 따낼 수 있을까 하는 헛된 기대가 팽배해 지고 있는 분위기다.
한미FTA 협상 결과를 ‘낙제’로 평가했던 범국본의 딜레마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이미 재협상 요구가 있을 것을 예상했고, 정부가 재협상에 나설 것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렇다면 범국본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재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한미FTA 협상 원천 무효’를 외쳐야 할까. 아니면 ‘재협상’을 ‘기회’로 활용해야 할까.
범국본이 본, 미국의 신통상정책과 재협상 요구
범국본은 17일 ‘미국의 신 통상정책, 그리고 재협상요구 어떻게 볼 것인가’의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김지형 전쟁과신자유주의를반대하는재미협의회(KAWAN) 활동가는 “2006년 미국이 7626억 달러의 무역적자 신기록을 세우면서 위기의식을 갖게 됐고, 지난해 11월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신통상정책이 나오게 됐다”며 미국 내 흐름을 설명했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민주당이 제시한 신통상정책에 합의함에 따라 6월 말이 기한인 TPA(무역권한촉진법)이 연장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했다.
이어 “FTA와 WTO를 통상정책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 민주당은 TPA가 연장됨으로써 파워가 더 커진다고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2008년 미국 대선이라는 미국 내 정치구도에서 한미FTA 재협상 주장과 신통상정책 등 이 등장했음을 강조했다.
신통상정책에서 노동과 환경 기준이 강화된 경향과 이를 이유로 한미FTA 재협상 요구가 거론되고 있는 것에 대해 강철웅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한미FTA가 비정규직을 확산시키고, 구조조정 압력과 사회양극화를 촉진하여 노동기본권 행사를 근본적으로 제한할 것”을 재차 강조하며, “노동권을 한미FTA와 연계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강은주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도 “현재 미국의 신통상정책은 지속적이고 가능한 생태와 환경에 관심이 있는 내용이 아니”라며 미국 내 정치용으로 해석했다. 강 연구원은 ”환경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의지라면 구지 FTA를 통하지 않고, 교토 의정서에 가입해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노동과 환경에 대한 기준 강화는 미국의 노동계와 환경 운동계를 달레기 위한 민주당의 액션일 뿐이고, 2008년 미 대선을 바탕으로 신통상정책이 등장했고, 이런 기본권 강화 방안은 한미FTA의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한미 양국이 즉각적으로 보장해야 할 기본권이라는 주장이다.
여과 없이 진행된 토론회..범국본의 행보는?
이날 이해영 범국본 정책기획단장은 범국본이 택할 수 있는 선택사항들을 나열했다. 이 내용이 담겼던 배포 자료에는 비공개 내용이 포함돼 있어 수거되기도 했다.
이해영 기획단장이 제시한 안은
A. 재협상 반대
B-1. 전면 재협상
B-2. 범국본과 국회 비상시국회의, 정책자문단 등이 분리 대응하는 형태.
A안을 들고 나설 경우 ‘본협상’ 뿐만 아니라 ‘재협상’에서도 얻을게 없다는 주장은 가능하지만 재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허 한 메아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B-1안으로 전면 재협상을 주장하는 것은 기존의 한미FTA ‘협상’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요청하는 재협상이기 때문에 내용 여부와 상관없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이날 토론자들이 무게를 실은 것은 B-2안의 분리대응 방안이다. 이 경우 범국본은 명분과 ‘한미FTA 협상 백지화’를 주장해 온 운동 단위들을 챙기고, 국회에서 사실상의 ‘재협상’ 요구안을 마련해 협상단에게 요구하며 전술적 보폭을 맞추는 형태이다.
A안의 경우 재협상의 정세도 못 읽는 ‘꼴통’ 범국본으로 낙인 찍힐 수 있지만, B-2안의 경우 범국본이 ‘꼴통’이 된다 하더라도 국회를 중심으로 전술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4대 선결 조건 전면 무효화, 무역구제 재협상 제로잉 조항 개정, 농업 분야 민감품목 관세 양허 제외 또는 유보 인정, 네거티브리스트, 레쳇조항 전면 재검토, 스크린쿼터 미래 유보 확보, 방송쿼터 축소 반대, 지재권 전면 재협상 등 그간 범국본이 요구했던 내용들을 다시 재협상의 과제로 올리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일전에 <참세상>과 인터뷰를 진행했던 이해영 범국본 정책기획단장은
“재협상을 해야 한다, 그게 확실하다고 할 때 노무현 정부가 어떻게 할까? 재협상 할 것이다. 또 끌려 나가서 자신들이 전리품으로 내세웠던 것들을 수정 변경하도록 요구받을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 또 진보진영이나 개혁진영은 뭘 어떻게 할 것인가, 난감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아무튼 문제의 핵심은 상대가 미국이라는데 있다”
며 상황에 따라 한미FTA 전면 반대를 외쳐온 운동진영이 '한미FTA 재협상' 국면에서 직면하게 될 답답함을 털어 놓은바 있다.
사실상 범국본이 16일 ‘한미FTA 원천 무효’의 성명을 냈고, 평가 토론회를 개최하고, 전략 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모으는 자리를 만들었다 해도 사실상 타결선언 이후 개점휴업 상태였다는 '정체'에 대한 평가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이날은 토론회는 범국본이 ‘한미FTA 원천 무효, 백지화’의 성명을 낸 이후 진행된 토론회인 만큼, 범국본이 택할 결과가 너무 분명해 보였다. 또한 '원천 무효', '기회'의 활용, '전술적 접근' 등 토론 과정에서 전략과 전술에 대한 고민이 선택사항으로, 난상토론으로 기술되면서 범국본의 딜레마가 여과없이 드러났다.
실익 없는 재협상..전술적 활용이 가능한가
토론자로 참석한 박상표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편집국장은 “재협상 했을 때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관철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개성, 비자쿼터 등 거론되고 있는 조건부 내용들의 경우도 의회 소관이라 재협상을 한다 해도 얻어 올 것은 없다”며 재협상 결과 또한 미국 측의 요구가 대거 관철되는 형식적 협상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남희섭 지적재산권대책위 대표는 “한국 협상단이 곤란한 위치에 진퇴양난에 몰려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 신통상정책 합의로 TPA(무역촉진권한)이 연장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미국의 경우 기한이 풀렸지만 올해 말 대선이 있는 한국이 오히려 시한에 쫓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대로 협상을 하고, 제대로 된 내용이 국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는 당연해 보인다.
또한 남희섭 대표는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꼼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 대표는 “정부 협상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할까를 보면 재협상 일정을 잡고 미국이 요구하는 분과별로 협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며, “협상 문구 수정하는 형식으로 내용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말 그대로 ‘문구’장난, 형식상 사이드 레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여론의 공격을 피해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딜레마에 빠진 범국본. 선택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드러내 놓고 난상 토론으로 전략을 모았던 범국본은 향후 어떤 선택을 할까. 범국본의 이후 행보와 액션이 궁금해진다.
한편, 김종훈 한미FTA 한국측 수석대표는 18일 “미국의 일방적 재협상 요구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면서도 “그러나 미국이 요구하는 내용이 양국에 모두 이익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엄밀히 따져보겠다”고 말해 사실 정부가 '재협상 불가'의 입장에서 '조건부 재협상'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