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20주년을 맞는다. 누가 잊으랴. 승리의 6월이었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기억에 선연하고, 6월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환청이 들리는듯 하다. 87년 6.29 항복 선언은 민주주의 투쟁의 쾌거로 세계 계급투쟁사에 기록되었고, 한국 사회 민주주의와 개혁을 향한 출발점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그날 이후 네 번의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는 반세기동안 민중의 삶을 점령해온 반공-냉전주의 세력을 역사의 뒤켠으로 몰아세우는 저력을 발휘했다. 참여정부 집권 마지막 해에 맞게 되는 6.10항쟁 20주년, 행자부는 10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민주인사, 행정부 각료, 각계 주요인사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 차원의 첫 공식 기념식을 갖는다. 6.10항쟁을 기념하는 국가기념일이 지정되었고, 갖가지 기념행사와 토론회 등 풍성한 축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6.10항쟁을 만들었던 민중들 어느 누가 기념과 축제의 주인공이 아니랴. 그러나 다시 묻는다. 오늘 민주주의와 진보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6.10항쟁 20년이 지난 지금, 진보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
'유연한 진보' 논란에서 진보는 극단적으로 희화화되었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아 나선 자본과 선진화 담론의 결탁은 우연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위기와 용세계화론이 만나 전방위 자유무역협정이 추진된 것도 필연의 산물이다.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계급투쟁이라는 진실은 은폐되고, 급진적 이념은 낡은 시대적 인식으로 멸시하는 풍토가 지배적이 되었다. 20년의 민주주의와 개혁은 피로도가 다했고, 민주주의와 개혁의 볼모로 잡힌 진보는 심각한 정체성 훼손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6.10항쟁 20년,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자본의 질주를 제어하지 못한 채 진보의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참여정부를 위해 등장한 참평포럼은 자본에 굴복한 자유주의자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민주주의의 화신을 자임하고, 촛불 신화를 만들어온 자유주의자들의 신자유주의 권력화는 한미FTA 타결로 정점에 이르렀다. 참여정부의 국가전략은 시장을 넓히기 위한 전략, 기업하기 좋은 환경, 지속가능한 기업환경, 시장친화적인 사회, 비전2030으로 압축된다. 사실상 자본의 국가전략이라 할 참여정부의 비전에는 사회구성원의 생존의 문제와 삶의 가치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유주의자들의 선택은 비극을 초래했다. 부동산과 투기가 추앙받는 사회, 자살률, 저출산율, 소득격차, 노동시간, 사교육비 지출 모두 OECD 1위인 사회가 되었다. 천재 1명을 만들기 위해 1천 명의 보통사람을 희생시키고, 부의 대물림과 서열을 고착화하는 입시 경쟁체제를 진보라 부르고, 영리법인과 민간의료보험 허용으로 의료산업 선진화를 혁신으로 명명하는 사회, 정보통신산업 발전을 명목으로 한 정보통신망법 개정과 통신비밀보호법 시행 예고로 국가의 감시체제와 정보인권 침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국정 치적을 홍보하는데 가공할 물량을 쏟아부으면서도 국민의 알 권리는 깡그리 무시하는 나라를 만들어놓았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후퇴하며 자본에 민주주의의 혼마저 내다준, 대한민국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평화, 개혁, 진보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다.
지난 20년, 민족주의 운동이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한 실천에 주목한다. 분단을 고착화하고 그로부터 계급적 이익을 구가한 반공-냉전주의와 싸워온 민족주의는 대한민국 진보의 중요한 축을 차지했다. 반미자주, 민주주의, 통일을 위한 헌신적인 활동은 시시때때 귀감으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오늘날 민족주의 운동 경향은 대중운동의 주도적 위치를 점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운명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민주주의 발전과 계급구성의 변화에 조응하는 위치를 찾지 못한 채 혼동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띤다. '우리민족'의 강조와 민족주의의 과잉은 신자유주의 모순 심화에 따라 형성된 저항 주체에 대한 왜곡을 부르기도 하고, 민족의 이익을 우선함으로써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와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범민련 기관지 '민족의진로'에 실린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는 민족주의 과잉에서 기인한 극단적인 인식이 엿보이는 사례다. 이주노동자와 성소수자에 대한 배타성의 표현은 단순한 해프닝이나, 범민련 기관지 차원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남북간 평화와 통일을 눈앞에 둔 시기, 한반도 평등평화를 위한 노력은 남과 북 사회구성원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종류의 계급적 억압과 착취를 폐절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노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치환되거나 폄하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신자유주의축적체제의 모순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자 바야흐로 자유주의, 민족주의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개량 확장과 복지 실현의 맥락에서의 반신자유주의 주장은 그 한계와 맹점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바 있다. 초국적자본 이동이 자유로워진 시대, 미 제국주의의 전쟁 책동이 지속되는 조건에서 반신자유주의는 반제, 반자본 변혁의 세계화를 위한 실천이어야 하고, 신자유주의정치 일반과 자본 축적체제 모두를 넘는 전략적 구상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20년 전 계급투쟁의 목표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 실현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데 있었다면, 앞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넘는 사회구성원의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연대의 권력 형성을 직접적인 과제로 삼아야 한다. 자유무역협정으로 자본운동이 가져올 위험천만한 사회 문제를 예측하는 가운데, 교육, 의료, 물 등 사회공공성을 지키고 사회화 전망을 모색하는 실천과 지속가능한 생태와 여성주의 실천, 민주주의와 인권 침해에 맞서는 저항, 그리고 한반도 사회구성원 모두의 균등한 삶의 질을 구현하기 위한 평등평화전략으로서의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새로운 진보의 걸음을 내딛을 때다.
20년 전 불렀던 ‘그날이 오면’은 자본과 권력에 저항한 수많은 열사와 희생자의 염원을 담은 노래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청 앞에서 수십억 원을 들인 대규모 기념행사와 축제가 벌어지는 오늘, 열사들이 꿈꾸었던 그날은 과연 이루어진 것일까. 다시 청주대 청소용역노동자 폭력이 빚어지고, 노점특별관리대책 철회 기자회견 참석 노점상은 불법 연행되고, 공무원노동자는 정부의 탄압에 맞서 종합청사 옆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비정규법 시행을 코앞에 두고 비정규직 탄압이 하루도 거를 날이 없다. 20년이 지난 6월 거리의 풍경이다.
노동자를 자본 위기의 희생양으로 삼는 비정규법 시행, 거짓말과 왜곡으로 점철된 자유무역협정 추진과 생명 경시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미국과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 강화로 한반도 평화에 역행하는 평화번영정책... 이처럼 민주주의 20년의 자화상은 초라하다 못해 파국을 예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오늘 6.10항쟁 20주년 ‘국민이 꽃 피울 희망의 대한민국’은 누구의 가슴을 쓸어내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