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계기로 국방부도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듯 했지만, 군대는 여전히 성소수자들에게 있어 인권의 사각지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선임병 등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온 피해자에 대해 군당국이 오히려 피해자의 성정체성을 문제 삼으며, 2차 가해와 인권침해를 일으켜 온 사실이 동성애자 단체들에 의해 폭로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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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당국, 성폭력 피해 호소하자 "부대에 마음 둔 사람 없냐?"
동성애자인권연대,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등 성소수자인권단체들에 따르면, 지난 1월 입대한 A씨는 선임병과 하사관 등에게 수 차례에 걸쳐 성희롱을 받아왔다.
이들에 따르면, 하사관 B씨는 피해자 A씨에게 '한 침낭에서 같이 자자, 오늘 밤에 내 침대로 와라'고 지시했다. 또 장교 C씨는 A씨를 강제로 침대에 눕히고, 위에 올라탄 채로 목에 침을 바르는 등의 행동을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A씨는 군의관과의 면담과정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과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고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군당국은 A씨를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그의 성정체성을 문제 삼고 나섰다.
"너네끼리는 너 같은 애들을 바텀이라고 한다지?"(군병원 군의관)
"부대에 특별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없냐,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느끼느냐"(해당부대 대대장)
"동성애자와 관계는 몇 번 해봤냐, 니가 업이냐 다운이냐?"(군병원 군의관)
성폭력 피해에 시달리던 A씨는 상담과정에서 오히려 각종 인권침해와 2차 가해에 시달리게 된 것.
수차례에 걸쳐 군병원에서 진료 아닌 진료를 받던 A씨는 지난 6월 군 당국에 의해 모 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됐다. A씨는 이곳에서 수차례에 걸쳐 자살·자해를 기도하는 등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를 보였다. 이후 A씨는 군 당국에 의해 군 부적응 병사들을 일반 병사들과 격리시켜 생활하는 '비전캠프'에 입소하게 됐다.
성소수자단체, “군, 직무유기와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 여지없이 드러나”
성소수자인권단체들은 24일 이 같은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국방부 앞에서 열고, 이번 사건을 군대 내 성희롱 피해자인 동성애자 병사에 대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규정했다.
성소수자단체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군대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군대가 가지는 계급, 위계질서 중심의 악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동성애자에 대한 군의 편견이 결합된 전형적인 인권침해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설사 피해자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군대 내 성희롱.성추행 사건으로 가해자들을 엄중하게 다스려져야 할 사건"이라며 "그런데도 가해자들을 처벌하기는커녕 피해자의 성정체성만을 문제라고 보는 것은 군대의 직무유기이자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단체들은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성폭력 사건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병사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처럼 시늉을 하던 군대의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전혀 변한 것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 당국, 스스로 만든 ‘동성애자 관리지침’도 위반
지난 해 군대 내 동성애자 인권침해 문제가 이슈화되자 국방부는 '병영 내 동성애자 관리지침'이라는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국방부 지침은 그간 성소수자단체들로부터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관리지침 중 '인성검사 결과 동성애 성향 잠재자로 분류 시 집중관리', '동성애자들의 병영 내 유입.확산 차단대책 미비', '이성애자로 전환 희망 시 적극 지원' 등의 내용은 지침 시행 배경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이번 사건으로 그나마 국방부 지침이 담고 있었던 '동성애자 차별 금지' 등 선언적 규정조자 전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이와 관련해 이종헌 친구사이 대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똑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보면, 군은 작년 이후 만들어진 '병영 내 동성애자 관리지침'의 내용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방부 지침을 보면 '성폭력 사건 발생 시 엄중처벌', '성경험·상대방 인적사항 등 사생활 관련 질문 금지' 등의 규정이 있는데, 이번 사건에서 군은 이 모든 조항을 위반했다"고 덧붙였다.
현재 A씨는 자살시도나 극단적인 행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모 대학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이날 단체들은 이번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고, 국가인권위에 긴급구제조치를 요청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해당부대와 국방부에 △성폭력 가해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청원휴가 △'병영 내 동성애자 관리지침' 폐기 △인권단체들과 논의를 통한 군대 내 인권지침 마련 등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