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말 국민들은 반세기만에 처음 정권교체를 만들어 줬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2000년 10월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을 늘려 주식시장을 떠받치겠다”고 발표했다. 월급쟁이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연금을 나락으로 치닫는 주식시장의 불쏘시개로 내놨다.
2001년 회계 부정으로 인한 엔론의 몰락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미국인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이었다.
자사주를 50살까지 처분 못하도록 제한했기 때문에 엔론의 노동자 1만7천여 명은 자사주가 2001년 초 80달러에서 그 해 연말 단돈 36센트로 폭락해 99% 이상의 손실을 봤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노동자가 그런 고통을 당했다. 반면 경영자들은 주가 하락기에 자사주를 처분해 손실을 최소화하거나 엄청난 차익을 챙겼다. 난파선 엔론의 선장, 제프리 스킬링 전 최고경영자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친에너지 기업 정책으로 주가가 급등한 2001년 초 스톡옵션을 행사해 5천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챙겼다. 분노한 엔론의 노동자들은 자사주를 처분할 수 있도록 소송을 걸었다.
지난 90년대 미국인들은 퇴직 이후의 연금 수혜액을 미리 확정지을 수 있는 기존 연금제도의 장점을 알면서도, 큰 저항 없이 연금제도의 민영화와 시장화를 수용했다. 1983년부터 시작된 주가의 고공 행진에 도취되어 주식투자형 신종 연금제도에 내재한 위험을 가볍게 여겼다. 스스로 취업 기간 중에 재원을 적립해서 노후생계비를 저축하는 방식인 개인적립형 기업연금(소위 ‘401(k)’)이 크게 확대되었다.
회계부정 스캔들로 인해 미국 노동자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투자자가 됐다고 기뻐했지만, 투자자라고 모두 똑같지 않았다. 대형 투자자와 경영자들은 부실이 공개되기 전에 미리 문제의 주식과 채권을 처분해서 손실을 차단했지만, 정보력에서 밀리는 노동자들은 속수무책으로 금융자산과 일자리를 송두리째 날렸다.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의 사례야말로 주식시장의 버블에 기대어 연금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그 어리석음의 구렁텅이로 전 국민을 몰고 간 게 노무현 정권이다. 철학도 원칙도 없이 법전 쪼가리만 주워섬기면서 입만 나불대며 보수꼴통들의 뒤만 따라다니는 노무현 정권에게 역사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역사는 노무현 정권을 “재정 부담을 피하겠다고 공적 연금의 주식투자를 확대했고, 퇴직금 제도를 없애고 영미형 기업연금을 도입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정권”으로 평가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시장만능형 연금 개혁으로 대형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전 사회로 일반화시켰다. 결국 노동자의 노후 대책까지 투기장으로 몰아넣었다.
철학 없이 집권한 노무현 정부는 임기 시작과 동시에 경기부양책의 하나로 기업연금제의 조기 도입을 발표했다. 결국 지난 2005년 12월부터 퇴직연금제를 도입했다. 그 잘난 한겨레신문은 2005년 11월 10일자 14면엔 <'노후 안전판' 노동자가 설계한다>며 축하기사를 실었다. 집권 후 첫 방문한 언론사라는 영예에 부끄럽지 않은 기사였다.
임기 말 노무현 정권의 연금 파괴는 가히 살인적이다. 지난 7월 연금 급여율을 1/3이나 뭉텅 잘라냈다. 지금은 연금 기금운용위원회마저 주식투자 전문가로 채우겠다고 한다. 급기야 지난 14일엔 노무현 정권이 임명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산자부장관, 석유공사, 가스공사 사장이 나란히 서울 강남의 리츠칼튼 호텔에 모였다. 이 정신 나간 위인들은 ‘자원개발사업 기본투자계약서’를 체결했다. 내년부터 10년간 총 20조원의 국민연금을 해외 유전이나 가스광구에 쏟아 붓겠다는 거다. 보다 못한 중앙일보가 나서 “안정 운용이 최우선이어야 할 국민연금으로 자원개발 사업에 나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중앙일보 12월 17일 E1면)고 우려했다.
- 덧붙이는 말
-
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