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인터넷을 배신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는 노사모 등 인터넷으로 조직된 여론의 덕을 보았고, 대통령 당선 후에는 탄핵 반대 촛불 시위로 위기를 넘었던 그였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막 꾸려진 2003년 벽두부터 인터넷 실명제가 추진되었다.
정보인권 운동 진영은 그때부터 실명제 반대운동을 벌여 왔지만 해마다 상황이 나빠져만 갔다. 가장 갑갑한 점은 일반 대중이 실명제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명제가 실제로 악플 방지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은 없었다. 실명제 도입으로 일반 국민들이 무엇을 잃을 것인지에 대한 차분한 성찰도 없었다. 실명제는 이용자 추적이 용이하도록 인터넷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었고, 이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와 그 수사기관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일방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유는 한 가지. "찌질이들 좀 안보이게 해주세요."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기술적인 편의성이 된 듯 하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사회에서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살이에 앞뒤 돌아볼 겨를이 없어진 탓일 게다. 돈 벌러 뛰어다녀야 할 때 교통만 마비시키는 집회시위의 권리가 좀 제한되면 어떠하고, 내 주차 공간을 침해하고 쓰레기로 집 주변 미화를 훼손하는 면상을 CCTV로 촬영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노동자 민중에게는 선거권도 주지 않았던 야만적인 부르주아적 인권 논리가 오늘날 다시 살아나고 있는 듯 하다. 인권은 나의 재산권을 옹호할 수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한 교양있는 시민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실명을 드러내고 발언하는 것에 아무런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주류적 존재들에게만 발언할 기회를 주겠다는 정책을, 대중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여론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이리라.
이명박의 당선은 이런 경향이 강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로부터 이어져온 신자유주의적 정보통신 정책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시장을 중심으로 계승-재편될 것이다.
개발주의를 부활시키려는 듯한 '경제 대통령'의 산업 정책은 '한반도 대운하'가 잘 알려져 있지만, IT 정책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와는 다른 산업계 지형 속에서 오늘날의 경제성장은 단순한 토건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에 유비쿼터스 IT 기술을 접목하고 '미래형 U시티'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명박의 IT 정책은 "디지털 최강국 코리아를 위한 IT 7대 전략"과 "국민고충 덜어드리는 3대 IT 민생 프로젝트" 공약에 집약되어 있다. 핵심은 최근 주목받는 IT 융합기술이다. IT 신기술 산업을 성장동력으로 삼아 투자를 끌어들이고 일자리도 늘릴 것이라는 계획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의 IT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한때 인터넷은 반란의 매체로 각광받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참으로 시장종속적인 매체임이 드러나고 있다. 자본 주도적인 인터넷 환경은 개방적인 기술적 속성을 뛰어넘는 폐쇄적인 한국형 미니홈피와 한국형 포털을 탄생시켰다. 세계적인 인프라는 세계적인 정보/연예 상품 소비자군을 형성했고, 본래 자유로운 복제가 가능했던 정보 상품은 이제 자본의 한도 하에서만 그 이용이 허용된다. 혹시라도 소비자들이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정보 공유라도 할까봐 정부와 시장이 합심하여 저작권 단속을 강화해 왔다.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해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부차시되었고 정부는 실명제를 의무화하여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민관의 수집과 이용을 확대하였다.
세계적인 속도로 추진된 이런 환경 변화의 배경에는 정부주도적인 정보화와 벤처 정책이 있었다. IMF로 인한 한국 경제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당시 김대중 정부가 만병통치약으로 제시한 것이 정보화였던 것이다. IT 벤처산업은 경기부양책이자 국가경쟁력이고 심지어 실업 해소책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보인권이라는 것이 고려될 리 없었다. 막무가내로 추진되던 정보화는 2003년 소위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논란 때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게 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대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최근 생체(전자)여권 도입을 둘러싸고 불거지는 문제는 인권이 아니다. 전국민 여권 재발급이라는 대목을 앞두고 계산기를 두들기는 시장의 관심이 지대하다. 그 외의 문제에는 무관심만이 팽배하다.
이 씁슬한 경험이 앞으로 5년 동안 확대재생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이명박 당선자가 7대 전략과 3대 프로젝트에서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방송통신 융합 환경에서 시장적 가치만이 최우선으로 간주된다면, 국민은 돈주머니를 가진 구경꾼으로 전락할 것이다. 케이블, 위성, 포털에 이르기까지 미디어 채널이 계속 늘어났지만, 그 많은 채널에서 그만큼 다양한 소수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연예정보가 반복재생되고 있지 않은가. 웹2.0의 참여적 담론 조차 포털의 시장 전략 속에 포섭되어 버린 인터넷 생태계의 처지로 미루어 짐작컨대, 융합미디어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주권은 요원할 지도 모른다.
이명박 당선자의 공약 속에도 개인정보 보호와 정보격차 해소라는 정보인권적 주제가 포함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안은 없다. 시장 정책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노무현 정부와 다르지 않다. 개인정보는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주민등록번호 유출과 같은 재산권 침해 관점에서 소극적으로 다루어졌고, 정보격차 해소는 공공 지원이 아니라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시장 창출의 차원에서 거론되어 왔다.
이명박은 여기에 더하여 권리 담론의 레토릭을 다 버리고 노골적인 IT 산업 전략의 일환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나 정보격차 해소를 비롯한 정보인권의 문제는 시장적인 방법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설립과 주민등록제도의 정비, 그리고 보편적 서비스를 비롯한 공공적 규제의 강력한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공공 규제를 거스르는 이명박의 IT 정책은 소위 'IT 민생 프로젝트' 공약에서도 잘 드러난다. IPTV를 통해 사교육비 경감, 규제완화를 통한 통신비 인하 등이 그것이다. 과연 IPTV가 사교육비를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규제완화가 통신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인가? 공공성은 안중에도 없을 시장의 정책으로 공공성을 달성하겠다는 데서 논리적 모순이 느껴진다. 공공성의 명분조차 시장을 위해 동원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안전하고 역기능 없는 IT세상'을 위해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사이버 폭력에 대처하겠다는 대목에선 다른 우려가 생긴다. 이명박의 '실용 정부'가 밀어붙일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는 기업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다. 국민의 여론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은 기술력의 지원으로 유례없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북한게시물이나 명예훼손, 인터넷 자료보관 등의 문제에서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취해온 입장도 규제 강화론이었다.
특히 저작권 보호를 위한 인터넷 실명제 확대 실시는 이명박 후보가 직접 밝힌 정책이기도 하다. 웹하드와 P2P(파일공유) 사이트에서 저작권을 침해하는 이용자를 용이하게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에 대한 규제는 풀지만, 일반 국민의 인터넷 이용에 대한 규제는 강화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불과 며칠 밖에 안 되었지만, 총선을 앞둔 선거법의 규제는 벌써 시작되었다. 이른바 180일 전 UCC 금지 말이다. UCC 뿐 아니라 패러디 이미지도, 댓글 토론도 자제해야 할 때이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바로 숨통이 조이는 이 상황이, 앞으로의 5년을 예고하는 듯 하다. 자본과 그를 위한 정부, 그들에게 동원되는 정보화는 우리의 정보 인권을 위축시킬 것이다. 정보인권 운동의 무너진 전열을 가다듬고 싸움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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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여경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