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행동이 주류를 바꾼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광우병 쇠고기 협상과 이후 정부 대처에 반발하는 대중행동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미숙함과 불가피함이 뒤범벅된 채 대응하지만 추락을 어찌할 수 없다. 손학규 대표는 눈치를 살피며 수시로 말 바꾸기에 급급하다. 의회에서 진보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진보정치의 모습도 왜소하기 짝이 없다. 한 번의 거리 정치가 수년 간 고착된 제도 정치질서를 요동치게 한다. 거리의 정치는 운동권이라고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완군 님의 표현대로 집회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직업데모꾼’이라면 그나마 최선을 다하는 모양세다.
지난 10년, 주류 질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놓고 만들어졌다. 신자유주의와 어떤 이해관계에 있는가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가 나뉘었고, 그들 사이에 재생산의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며, 제도적인 것부터 문화적인 것까지 일상 삶을 지배하는 룰이 작동되었다. 이 강력한 시스템과 룰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신과 체념의 반복 속에 재빠른 현실 순응이 생활의 지혜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주류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광우병 쇠고기 협상과 정부 대처에 반발하는 대중행동은 이처럼 고착된 주류를 일시에 불편하게, 안절부절 못하게,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처럼 주류를 본격적으로 거스르는 대중의 행동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역동적이다.
우익이 5만 10만의 대중을 동원해서 태극기로 도배를 하고 펼치는 시위의 역동성과 결이 다르다. 민주노총이 규모의 경제마냥 동원하는 관성화된 조합원 집회와도 분명히 결이 다르다. 우익이 반공냉전에 근간을 두고 반세기 동안 누려왔던 이익을 되찾기 위해, 맹목적인 애국을 위해 떠드는 소리에는 진정한 의미의 역동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 조합원의 자발적 참여의 모티프 없이 산별 노조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한 식의 조합원 동원으로는 주류를 바꿔내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 우익의 자식들, 노동자의 자식들이 스스로 나서 대한민국의 삶에서 느끼는 ‘억울함’을 표출하고, 공간을 만들고, 거리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자마자 주류는 급물쌀을 일으키고 만다.
촛불과 함께 등장한 대중행동과 거리 정치의 효시는 미장갑차 살해에 대응한 투쟁. 시위 참가자들은 두 중학생의 죽음과 이후 미국과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보며 분노의 응집과 확산을 반복했다. 이 투쟁은 이윽고 민주화세력 순도 100%의 참여정부를 탄생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십수만 개의 촛불, 이 촛불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희구와 열망으로 기록되었다. 그해 총선에서 민주당은 의회권력 장악이라는 쾌거를 맛보았다. 이처럼 이 땅에서 촛불은 정치 그 자체였고, 고착되는 주류 정치질서를 시시때때 흔들어놓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광우병 쇠고기 협상에 반발하며 행동에 나선 대중을 향해 ‘공권력’과 ‘배후 찾기’에 골몰하는 보수정권의 태도는 익히 이해하고도 남을 만 하다. 고비마다 촛불에 데어 트라우마(외상)에 시달려온 보수세력, 눈앞에 유사한 장면이 다시 펼쳐지자 회피하고 싶고, 종결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 앞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이들은 아직 배후를 찾지 못한 듯 하다.
그런데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미장갑차 살해 사건과 탄핵 때 촛불을 들었던 그 대중들이 다시 청계광장에 모이는 건 아니다. 두 중학생의 죽음과 미국과 한국 정부의 대응에 분노했던 촛불과 의회민주주의의 폭거 앞에 분노했던 촛불은 행정권력과 의회권력 장악의 정치적 성과로 수렴됐지만, 그리고 지금도 유사한 모양을 띠고 있지만, 그 촛불이 다시 켜진 것은 아니다.
파병 때 그랬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파병을 결정했다. 두 여중생의 죽음 앞에 촛불을 들었던 대중들은 배신감에 경악했다. 김선일 씨 등 연이은 죽음 소식에 대중들은 허탈감을 쓸어 만지며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국익과 국제사회와의 약속, 비전투병 파병과 전후 재건 동참을 강조하는 정부의 선전과 이데올로기 앞에 촛불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
참여정부는 집권 중반기를 경과하며 한미FTA를 추진했다. 주한미군의 기동군화를 요점으로 하는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한미FTA에 대한 찬반 논란이 전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평택 주한미군 이전 추진에 따라 대추리 도두리 주민의 생활 근거지는 쑥대밭이 되었다. 집권 초반에 던진 선진노사관계로드맵은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큰 반발없이 완성됐다. 물론 대중의 저항은 이어졌다.
한미FTA 반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비정규법 개악 반대... 반대, 반대의 목소리를 이어갔다. 그러나 대중행동은 산발적이었다. 한미FTA범국본, 평택대책위, 민주노총과 비정규직투쟁 단위 등 조직된 저항은 대중행동의 역동성을 보듬고 키우고 확장하기에는 부침이 많았다. 한미FTA는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물이 흐르듯이 인수인계 되었다.
의회에서 민주노동당은 단상을 점거하며 저항했지만 힘에 부쳤다. 시시때때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의회적 수준의 정치공세를 펴는데 그쳤다. 좌파.. 대중투쟁의 기획자로, 촉진자로서의 좌파는 엄밀히 말해 현실 정치에 등장하지 못했다. 대중행동을 고대하는 진보정치는 고립무원에 빠졌다. 결과와 상태는 지난 대선, 총선에서 확인됐으며, 지금 광우병 쇠고기 협상 반대에 나선 대중행동 속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이 즈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황우석 신드롬이다. 황금박쥐로 회자되는 참여정부의 이너써클이 가동됐다. 이들은 황우석 신화를 꽃피우는 전위세력이었고, 대중은 환호했다. 황우석을 향해 환호했던 대중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분노했던 그 대중들이었고, 2002년 두 여중생의 죽음에 애도했던 그 대중들이었으며, 월드컵 4강의 축구 신화에 열광했던 바로 그 대중들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 대중의 가슴에 불을 댕긴 열망의 끝은 ‘신화’를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가장 우월한, 가장 지혜로운, 가장 창발적인, 가장 경쟁력있는 민족,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었다. 황우석의 진실을 고발한 피디수첩은 대중의 협박과 광고 단절에 시달렸고, X파일을 폭로한 이상호 기자는 사실상 국외자 신세가 되었다. 디워는 약소국 한국이 강대국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의 표상이었다. 삼성이 제공하는 한국경제의 스펙타클과 성장이데올로기가 갖는 휘발성은 막강했다.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의 운명을 예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대중들은 낙담했다. 어디서부턴가 정처 없이 추락하는 듯한, 무언가 불길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황우석 신화의 몰락은 불길함을 증폭했다. 막강삼성 이건희 일가의 법정 승리 소식은 안도감과 함께 불쾌감을 한꺼번에 쏟아놓았다.
미장갑차 살해 사건 때, 탄핵 때 촛불을 들었던 대중들, 이윽고 신화를 열망했던 대중들, 그 대중들은 지난 대선 총선에서 필시 침묵했다. 13가지나 되는 이명박 후보의 거짓말과 비리 의혹에다 광운대 BBK 동영상을 보면서도 이들은 미동하지 않았다. 투표하지 않는 젊은이를 향한 원성 섞인 하소연이 이른바 정치평론가의 입과 글을 통해 반복되었고, 민주화 이후 선진화 이데올로기와 경쟁력을 통한 경제살리기 선동은 대선과 총선을 관통하며 위력을 발휘했다. 대중은 뉴타운과 주식 투자가 주는 환각 속에서 고단한 일상을 견뎌내는, 말하자면 불안정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의 경계 위에서 이명박의 비즈니스프렌들리를 맹목적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자태를 감추지 않았다.
포름알데히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포름알데히드는 한강의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신자유주의, 처음에 그건 ‘효율과 경쟁’‘생산성과 이윤’과 같은 생소하고 추상적인, 어려운 이야기였다. 외환위기 때 그 자본의 위기에 대한 가장 지독한 자본주의적 처방으로서의 신자유주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당시 신자유주의 처방은 포름알데히드 마냥 훗날 어떤 괴물이 되어 현실에 등장하게 될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지배자들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를 대중들은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을 모았다. 구조조정을 받아들였다.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희구하고 싸웠다. 고난의 10년을 보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현실은 곤궁하고, 혜진예슬 양과 같은 비보의 9시뉴스를 맨정신으로 시청하는 건 감당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거짓말을 반복하는 참여정부를 보며 대중들은 짜증을 냈다. 평택 미군기지에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군인들의 군화발에 채여 쫓겨나는 모습도 애써 외면했다. 비정규직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비정규법 개악을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 와중에 참여정부는 자본과 동맹을 맺고, 미국을 받아들였다. 한미FTA를 추진하고, 전략적 유연성을 승인하고, 노동유연화의 끝을 봤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대한민국에 신자유주의 법제도를 완성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도 채 안 되어, 대중은 생물의 신자유주의를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쏟아놓은 포름알데히드의 결실이다. 이들은 촛불집회에서 말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짤리고 - 싼 꼬리곰탕 먹다 광우병 걸리고 - 의료보험 민영화로 보험 적용 못받고 - 죽으면 화장해서 대운하에 뿌려달라고.
999명의 열성이 1명의 우성을 만들고, 그 1명이 999명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신념, 이명박 대통령의 비즈니스 100일은 스펙타클했다. 0교시, 24시간 학원, 일제시험, 아륀지 소동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1명이 될 수 없는, 앞으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살아야 할 999명의 학생들의 가슴에는 반란의 교감이 뭉클뭉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386 언저리 기성세대들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젊은이들은 너희들이 뭔데 자신의 삶을 피곤하게 만드냐며, 간섭하느냐며 따지기 시작했고, 그 젊은이들을 옹호하는 학부모들은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이젠 좀 행복해지고 싶은데, 당췌 채워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건강하게 살고 싶은데 광우병 쇠고기를 들여온다 하니 설움이 북받쳐 올랐고, 협상 이후 정부가 하는 꼴이란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피땀 흘리며 쌓아놓은 민주주의조차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다. 생활의 권리, 행복하게 살 권리가 마구 침해받는다. 급기야 27일 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날 잡아넣으라’며 닭장차에 오르는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여기 운동권이 없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노선과 기치를 중시하는 운동권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조직된 운동, 엄밀히 말해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의 ‘대중행동’ 내지 ‘거리의 정치’는 2003년 열사 정국을 거치며, 2005년 한미FTA 저지 싸움을 경과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구조조정 반대 투쟁은 발전3사 투쟁과 대우자동차 매각 반대 투쟁을 거치며 사실상 소진됐다.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몰아부치면서 2003년 가을에 노동자의 연이은 분신과 죽음을 불렀고, 이 때 노동자는 공장을 넘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 이후 지금까지 노동자의 거리의 정치는 아주 간헐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명맥이 끊겼다.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의 투쟁으로 현실을 관통하고 있지만, 노동자와 시민이 거리에서 한 몸을 이루는 거리의 정치와는 결을 달리 한다. 선거 때만 바라보고 대중의 표를 기대하는 진보정치는 거리의 정치로서의 대중행동과는 멀어도 너무 멀리 있다.
2005년부터 06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한미FTA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대중행동의 가능성이 다시 확인됐다. 분명 그랬다. 한미FTA는 한미 양국 자본에는 유리할 지 몰라도, 협정이 발효된 후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할 대중 자신에게는 틀림없이 불리하게 느껴졌다. 거짓말을 하는 국책연구소와 국정브리핑,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기고만장에 질렸고, 무엇보다 빈곤의 심화가 주는 현실의 고단함을 해결해줄 방안으로 느낄 수 없었다. 반대 여론이 높았고, 범국본이라는 조직된 동원운동은 그런 대중과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금속노동자들이 한미FTA를 반대하는 총파업을 전개하기도 했고, 인권, 사회운동도 한미FTA와 평택 투쟁에서 대중투쟁을 확장하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자본과 국가간의 거대한 협상인데다, 워낙 미래 사회 운명을 다루는 일인지라 좀처럼 초점을 맞추기 쉽지 않았고, 범국본은 장기적인 연대와 투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뜻밖의 거리의 정치’가 맞다. 예상치 못한, 사후적으로만 예상했다고 우기게 되는 그런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그날 밤, 그러니까 24일 밤에 첫 연행 소식이 알려진 후, 25일 새벽에 아프리카티비와 인터넷뉴스를 보던 네티즌 100여 명이 첫차를 타고 광화문으로 나왔다. 25일 아침 광화문에 있던 사람들은 광화문이 해방공간이었다고 말한다. 그 해방의 거리에서 쉼없이 이루어진 정치토론의 결론은 ‘독재타도’였다. '청와대진격파'와 '청계집회파'는 모두 촛불파였고, 자주파와 평등파가 보여주는 정치적 잇권 다툼 따위는 애시당초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재협상을 요구하며 천막을 치고 폼세를 잡던 민주노총의 신세는 또 얼마나 처량했던가. 참여정부 5년과 이명박 정부 100일을 맞는 우리 사회 계급투쟁의 풍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