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박김형준 다산인권센터 활동가가 쓴 글이다. 그는 “그들이 손에 쥔 ‘화염병’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세상을 향한 ‘절규’”였다고 썼다.
▲ 고 이상림 씨의 며느리 정영신 씨 |
2007년 말부터 용역과 부딪혀야 했다. 꼬박 1년, 불특정한 서울 시민 일가족이 특정한 철거민이 되었다. 살다가 살다가, 어떻게든 살아보려다 몰리고 몰려 맨 마지막에 가서야 두드리게 된다는 곳, 그게 망루였다. 칠십 노인은 망루에 오른 지 25시간 만에 30년을 살아온 분신같은 마을 입구 건물 옥상 위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노인의 아들, 정영신 씨의 남편은 용산철대위원장이다. 그는 입원 중에 구속되었다. 정영신 씨의 이야기를 받아적었다.
용산에서 30년을 살아온 시아버지
시아버지(고 이상림 씨)다. 72세. 30년을 용산에서 살았다.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기침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자전거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가볍게 운동을 한 후에는 바로 가게(레아호프)를 향했다. 호프집은 저녁 장사, 남편(이충연, 용산철대위원장)과 나(정영신)는 보통 새벽 3시쯤 집으로 들어왔다. 시아버지는 잠긴 문을 열고 환기를 하고 청소를 했다. 노량진 수산시장과 경동시장을 들러 시장도 봐주었다. 시아버지에게 레아호프는 분신이었다.
호프를 하기 전에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전재숙)와 갈비집을 하며 조카를 데리고 살았다.
남편과 만난 건 2003년 경이었다. 연애를 시작했다. 강변역 등지에서 노점상을 하며 돈을 모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악세사리도 팔고 옷도 팔며 한푼 두푼 모았다. 쉽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점점 힘에 부치고, 손님도 많이 줄었다. 신랑과 나도 노점상을 계속 하기에 여의치 않았다. 같이 뭉치자 해서 시작한 게 호프였고, 식당 공사에 들어갔다.
30년이 넘은 건물이었다. 빚을 내고, 집 전세금을 빼서 새로 짓다시피 공사를 시작했다. 어떻게든 공사비도 아끼려 애썼다. 시아버지가 자제를 사오고 남편은 페인트칠을 했다. 시어머니는 밥을 지었다. 온 가족이 달라붙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 달에 걸쳐 공사를 했다. 테이블도 직접 다 만들었다. 진짜 공을 들인 가게다.
2006년 10월에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는 깔끔했다. 시어머니가 주방 음식을 하고 내가 홀을 맡았다. 온가족이 달라붙어 일을 하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었다. 장사는 동네에서 손꼽힐 정도로 잘 되었다. 희망이 보였다. 빚 이자 내고, 대출금 내고 그러고도 시어머니 생활비와 가족 생활비가 나왔다. 몇 년 고생하면 빚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쉬시라 하고 우리가 하면 될 것 같았다. 연애 5년 만인 작년에는 결혼을 했다. 행복, 희망 같은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가게를 오픈한 지 4개월 후인 2007년 2월 조합이 설립되고 4월에 재개발사업 시행 인가가 떨어졌다. 2007년 10월 조합총회가 열렸다. 이주 및 주거 이전비 지급안과 철거업체가 선정됐다. 통상 사업인가 기간이 3-4년은 걸린다던데, 인가가 떨어진 지 불과 한 달 만에 용역이 들어와 상주하기 시작했다.
사업 승인이 나기 얼마 전에 감정단이라며 찾아왔다. 가게 시설이 얼마나 들었냐고 물어왔다. 뭔지를 몰랐다. 그러더니 사업인가가 났다. 좀 지나니 우편물이 하나 날아왔는데 거기 감정평가 금액이 쓰여 있었다. 터무니 없는 금액이었다. 무슨 근거냐 물었더니 답이 없었다. 권리비는 인정을 안 해도 시설비는 인정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기준이 없었다. 레아호프는 많이 줬으니 조용히 하라는 거였다. 이 사람들 하고는 대화가 안 되는구나 싶었다. 그전부터 구청과 용역이 같은 패거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던 터였다. 그쪽에서 대화를 피했다. 대화를 하려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게는 목이 좋다. 참사 건물 맞은 편에 있다. 시어머니가 식당을 했을 때도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시설비를 빼고 권리비만 1억5천만 원이 오갔다. 레아호프 가게 공사를 하면서 시설비가 꽤나 들었다. 거물을 새로 지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쳐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가 없었다. 대책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들 동병상련의 그 사람들 밖에 없었다. 시아버지도 신랑도 열심히 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는 그래도 장사도 잘 되고 하니 많이 주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막상 터무니 없는 금액을 받은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현재 여관을 하는 분은 감정평가가 불과 2백만 원 나왔다. 그것 받아 어디 가서 뭘 하겠나. 노점상은 아예 안 나왔다. 그분들 권리금 주고 자리 사서 들어왔다. 옛날에는 구청에서도 와서 한 달에 얼마씩 치고 그랬다.
용역과 부딪혀,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되고
용역이라는 사람들과 부딪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근 한 용역이 참사가 있은 후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작년 7월 1일에 있었던 일이다. 분하다.
시아버지와 주민 3분이 현수막을 걸기 위해 사다리에 올랐다. 투쟁이 살길이라는 현수막이었다. 대책없이 이주하라 하니 우리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는 열심히 했다. 내일이었으니까. 이를 보던 용역이 달지 말라, 내려오라며 소리를 쳤다. 4-5군데 열댓 명 정도가 있었다. 그냥 와서 사다리부터 끌어내렸다. 시아버지가 너희들이 무언데 그러느냐며 항의했다. 주위 사람들은 다칠까 걱정돼 말렸다.
용역은 시아버지의 급소를 잡아 댕겼다. 70 노인의 어른을 그럴 수 있나.. 말이 안 나온다. 주먹에 맞아 바닥에 쓰러져 옷이 찢기고,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백주대낮에 30살 먹은 건장한 남자가 70 노인을 때리고 끌고갔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카메라를 부셔버린다며 대들었다. 경찰도 안 왔다. 다 피신했다. 용역 한 명이 식식대며 대걸레자루에 갈고리를 달고 나타났다. 현수막을 찢었다.
▲ 7월 1일 벌어진 사건에 대한 주민 김진흥 씨의 진술 |
▲ 고 이상림 씨가 용역의 폭력에 당한 상처 |
그 용역은 갈고리를 들고 협박한 사람이었다. 만약에 시아버지가 입술을 뜯었다고 하면 피가 났을 거고 바로 병원으로 가서 조치를 취했을 거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저들끼리 자해도 하고, 이야기하면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예상하지 못하는 행동을 했다. 주민들은 그랬다. 사람이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상식적으로 30대 사람과 70 나이의 사람이 싸워서, 더군다나 누워있는 상황에서 입술을 잡아 뜯어 먹었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돌아가신 분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우리 가족에 대해 한마디로 시아버지와 신랑이 위원장이라는 이유 하나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사람이 해도 위원장이 했다고 뒤집어 씌우기 일쑤였다.
▲ 주민의 진술 |
다음 날 시아버지는 고소를 했다. 용역도 맞고소를 했다. 시아버지는 3주가 나왔는데, 용역은 4주 진단이 나왔다고 하더라. 시아버지한테 사전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잡으러 왔다. 도망을 다녔다.
장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레아호프는 여름이면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했다. 앞에 꽃가게에서 파라솔을 내놨는데, 한번은 용역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시비를 걸어왔다. 사장을 찾더라. 내가 사장이라 했다. 너 말고 남자 있잖느냐며 시비를 걸어왔다. 유리창을 차고 테이블을 밀고 그러더라. 경찰에 신고를 했다.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들도 겁이 나 신고를 하면 경찰이 오긴 한다. 오면 그들(용역)도 사람이고 하니 이해하라고 한다. 그게 전부였다. 보복이 두려워 다시는 우리 가게 오지 못하도록 경찰한테 부탁했다. 경찰은 알았다고 했지만, 그 뒤로도 건너편 꽃집에 일주일간이나 나타났다. 무서워서 안 나갔다.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사장이 없다고 하면 너희들 장사할 수 있을 지 두고 보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손님이라고 말하며 술을 달라고 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시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하면 할머니하고는 할 말 없다, 그년 데려오라 라며 일주일 간 횡포를 부렸다.
▲ 용역들이 길을 못 가게 막아선 모습 |
레아호프에서 집으로 가려면 골목으로 가야 한다. 집에 들어가기 전 4거리가 있는데 용역들이 서서 못 가게 했다. 집에 가야 한다고 하면 서 있을 권리가 있다며 비켜주지 않았다. 112에 신고를 했다. 용역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하니 경찰은 돌아다니라고 하더라. 밤에 길을 못 다니게 하고 편의점에 앉아 있다가 쳐다보면 와서 때린다. 우리도 사람이라 대든다. 그러면 주먹으로 때린다.
용역들이 들어오고 나서는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거의 매일. 동네에는 포장마차 하는 분들이 많고, 식당이나 꽃집 등 저녁 장사하는 분들이 많았다. 주민들은 동네 규찰을 서기 시작했다. 건장한 애들이 저녁 때가 되면 나와서 쌍소리 해가면서 동네를 휘저었다. 남녀노소도 없다. 잡히는 대로 했다.
▲ 용역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스프레이 그림.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그림과 같은 말을 하고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
▲ 용역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스프레이 그림.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그림과 같은 말을 하고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
한 번은 팬티 바람에 목검을 들고 나온 용역이 있었다. 거지같은 년들 회 쳐 먹는다면서 난리를 폈다. 끊임이 없었다. 망루를 하는 전날까지 계속됐다. 용역 회사 2개라 하는데 사실상 하나였다. 현암이나 호람이나 같았다. 숫자가 부족하면 서로 다 오라고 해 라며 부른다.
우리 집 앞이 주차장인데 용역은 거기다 컨테이너 3개를 갖다놓고 상주했다. 가게는 전면이 유리라 밖이 보이는데 주위에 계속 배회했다. 오죽하면 옆 가게가 이사를 나갔다. 옆 가게가 이사를 하니 거길 때려 부수고, 오물을 갖다 뿌렸다. 손님들은 냄새가 난다며 술 마시다가도 일어난다. 비둘기 죽은 거, 계란 썩은 거 던져놓고 가게가 난리다. 장사 하지 말라는 거다. 시아버지가 용역을 잡았다. 끝까지 따라가니 용역 사무실로 들어갔다. 112에 신고했다. 경찰은 30분이나 걸려 현장으로 나왔다. 증인도 있다. 세계일보 기자가 그걸 봤다. 사무실에 있으니 잡으라고 했지만 경찰은 잡으러 들어가지 않았다. 약 40분 후 그 용역은 뒷문으로 도망을 갔다. 경찰? 믿을 수 없다.
▲ 경찰을 불렀으나, 경찰은 길을 돌아서 다니라고 했다. |
▲ 레아호프 입구에 죽은 비둘기, 계란 등을 던진 모습 |
나는 철거민이지만 전철연 회원은 아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와 신랑은 회원이다. 신랑은 걱정되는 걸 나한테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늘 괜찮다며 안심시키곤 했다. 하지만 사람이 들어올 때가 됐는데 안 들어오고, 며칠 있으면 해결될 거라고 했지만 앞이 불투명해 보였다. 망루란 거, 몇 번 따라다녀 보았기 때문에 그게 무언지 안다. 철거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투쟁이다. 민주노동당이나 평화적 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주비 몇 푼 더 받도록 해주는 게 다였다. 그게 아니었다. 삶의 터전, 30년을 살아온 내 집, 내 가게, 내 삶이란 게 있다. 건설사와 조합과 당국은 건설 공원 부지에 가수용단지 만들어서 장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작은 소망조차 묵살했다.
▲ 폭행당한 이충연 용산철거대책위원장 |
19일 새벽, 시아버지와 신랑이 망루에 올라갔다. 올라간 후에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바닥에 경찰이 우체국까지 쫙 깔렸다. 가게 맞은 편 건물 옥상에는 용역과 경찰이 계속 물을 뿌렸다. 망루가 채 지어지지도 않았는데 아래층에서는 계속 시커먼 연기가 났다. 용역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엄청 맞을 거라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기도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을 줄은 몰랐다.
대화가 이루어질 줄 알았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줬어도 망루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거다. 그들은 끌어내 반 죽여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어보였다. 용역과 경찰이 내 옆에 서서 내가 누군지 모르니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2시간이면 끝난다는 식으로 말하더라.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찾아다녔다. 현장을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며 3시간이나 울며 매달렸다. 용산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따라갔더니 신원 미상의 시신이 3구가 있다고 했다. 왜 신원 미상이냐고 물아봤다. 시신이 너무 많이 훼손이 되어서 그랬다고 했다. 허락없이 부검을 했다. 국과수 결과 나왔대서 순천향병원으로 왔다. 한참 후 시신을 확인했는데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 시아버지 아니다,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다음날 시아버지가 맞다는 거였다. 지문이 나왔다는 거다. 미칠 지경이다. 지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신을 왜 하루동안 신원미상이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부검을 했나. 시어머니가 시신을 봤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처음에 한 번만 보여줬어도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는 거였다.
신랑 입원 중 체포, 구속
신랑이 체포되기 전 날 내과 의사는 29일 검사 결과를 보고 퇴원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매일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28일 엑스레이에는 가스로 인한 폐 염증이 나타났다. 코를 풀면 피가 나고 가래를 뱉으면 까만 재같은 게 나왔다. 체포되는 그날도 엑스레이를 찍고 이비인후과에 갖다왔다. 기브스를 한 무릎 붕대를 푸니 많이 부어 있었다. 엠알에이 찍어야겠다던 차에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퇴원 조치되었고 체포한다는 거였다.
▲ 망루... |
망루 왜 올라갔겠나
시아버지도 돌아가신 분도 가진 게 없어서 돌아가셨다. 살아보려고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살려고 들어간 거지 죽으려고 들어간 게 아니다. 원주민 다 내쫓고 땅투기에 눈먼 부자들만 득시글했다. 그렇게 무리한 요구였나. 30년을 한 곳에서 장사하고, 자녀가 학교에 다닌 터전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대체 그 돈 받아서 어디를 가서 뭘 하고 살 수 있겠나.
공사하는 기간만이라도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0.001%만 생각해도 해줄 거 같았는데, 용역 줄 돈은 있고 세입자한테 줄 건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망루에 올라가신 분들 한 번만 대화를 했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다.
이 분들 망루 왜 올라갔겠나. 왜 경찰이 처음부터 와서 진압하고, 용역이 경찰 방패를 들고 다니나. 조합과 이야기하기 위해서지 경찰과 싸우려고 올라간 거 아니다. 그 분들은 범죄자가 아니다.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이다.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억울한 사람들이 계속 생길 거다. 이젠 뭐가 진실인지, 뭐가 현실인지 분간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