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전후를 돌아보며

[기자의 눈] ‘기계적 매뉴얼 ’에 그친 반성폭력 내규

고우영 만화와 민주노총, 그리고 여성주의

중학교 다니던 때다. 아버지는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한 손에 스포츠 신문을 들고 오셨다. 아버지가 다 보시고 놔둔 스포츠 신문은 이내 내 손에 들어왔다. 당시 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는 꽤 인기였다. 변변한 성교육 한번 받지 못했던 청소년에게 스포츠 신문의 자극적인 기사와 사진, 고우영의 성인 만화는 10대의 성적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그 만화에서 여성의 몸은 대상화 됐고, 가부장적인 의식이 넘쳐 흘렀다. 부끄럽게도 나의 성인지적 감수성은 딱 그때 스포츠 신문에서 끝났다. 남성과 여성은 평등해야 한다는 교과서의 명제는 시험의 답안일 뿐이었다. 자라는 동안 구체적으로 삶에서 인식과 행동으로 그걸 드러내진 못했다.

많은 언론이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 분개하며 거침없이 민주노총에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다. 차분하게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조건과 위치를 얘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 고우영 화백의 만화가 다시 인기다. 몇 일전 모 방송사의 아침 프로그램에 나온 한 남성은 고우영 만화에서 자신이 성지식을 쌓았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일지매>의 담당 PD는 현대적 감수성을 가진 만화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나에게 고우영 만화는 여성의 벗은 몸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 담긴 왜곡된 성적 코드가 있던 야한 만화로 기억된다.

몇 일 동안 한국사회는 두 개의 모순에 뒤섞였다. 한쪽에선 남성이 가진 권력과 폭력에 희생당한 피해생존자를 위로하고, 가해자가 속한 민주노총에 맹비난이 돌았다. 다른 한쪽에선 가부장적 사회와 여성의 몸에 대한 은근한 대상화를 은연중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만화 열풍을 긍정으로 소개했다. 물론 만화는 만화 일 뿐 따라하지 말자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잘못된 성 인지는 언제든 여성에 대해 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 은폐하는데 이용된다.

'기계적 매뉴얼'에 그친 반성폭력 규약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한국의 남성(노동자)이 다시 성 인식을 돌아보라고 권한다. (물론 민주노총이 진상조사와 치열한 반성을 하는 건 당연하고) 운동사회 안에서 반성폭력 운동이 시작된지도 10년. 운동사회는 성폭력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과 매뉴얼(반성폭력 내규)이 일정 갖춰져 있다.

몇 년 전부터 운동사회에서 해마다 하는 반성폭력 교육도 관례로 자리잡았다. 그 사이 남성 활동가들은 성 담론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지난 5일 민주노총 건물 1, 2층에는 하루 종일 성인지적 관점과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날 민주노총이 낸 해명 자료는 피해자와 그 대리인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성인지적 관점, 여성주의, 피해자 중심주의 등의 단어들은 제도로 굳어져 절차적 매뉴얼로만 자리 잡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가부장성을 버리지 못했고 성폭력 해결과정 역시 수습에만 치중했다. 그런 민주노총은 공식 확인도 안해줬는데 먼저 보도했다며 참세상까지 힐난했다. 취재처의 공식 보도자료와 확인해주는 것만 쓰는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인권운동 사랑방이 12일 낸 성명서는 민주노총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드러낸다. 인권운동 사랑방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뒤 민주노총은 사건을 ‘해결’하기보다는 ‘수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 임원들이 성폭력 해결의 공식 절차를 밟기에 앞서 가해자를 제명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건을 수습하려는 과정은 그 자체가 바로 성폭력 사건의 은폐와 축소이다”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조직 내 반성폭력 규약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내규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습하기 위한 기계적 매뉴얼 일 뿐이었다.

사랑방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형식들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성별 간 권력관계에 대한 근본적 반성, 구성원 전체의 감수성을 키우는 인권교육과 성평등교육, 남성중심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해체할 수 있는 조직구조 개편,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조직문화 혁신 등의 노력을 반드시 함께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애써 만든 규약과 제도는 형식과 문서만 남은 채 성폭력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비대위가 진정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누구를 위한 '조직보위'인가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조직보위 논리가 여전히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비대위가 구성되는 날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은 민주노총이 정권과 보수언론으로부터 조직보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맞는 말이다.

근거 없는 민주노총에 대한 공격이 연일 계속 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민주노총의 지도력을 상실하거나 투쟁동력을 잃을 경우 그 고통은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조직의 보위를 해치려는 주체는 보수언론과 정보기관이다. 피해자가 조직 보위를 해치는 주체는 아니다.

조직 보위 문제는 두 가지로 드러났다. 하나는 수배된 위원장을 숨겨 준 피해자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위원장 은신을 도운 다른 간부들을 보호하려고 피해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가라는 태도였다. 이 부분에서 피해자 대리인 김종웅 변호사의 말을 들어보자. “이미 수사기관은 다 알고 있었는데 허위진술을 하면 피해자는 더 위험해 질 수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피해자 보호 논리로 자체 진상조사에 들어갔지만 논의 과정에서는 조직보위 논리도 작동했다. 그러나 사건을 쉬쉬한다고 해서 조직은 보위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으로 지도부를 사퇴한 민주노총 한 부위원장은 사건이 첫 보도된 날 근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민주노총이 최소한 1월 21일 대의원대회에서 성폭력 사건이 있었음을 우선 알리고 진상조사로 이 사건을 해결중임을 사실을 밝히고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오히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리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조치를 전 조직적으로 꼼꼼하게 한 뒤 뼈저린 반성을 했다면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은 보위됐을 것이다. 조직내, 그것도 중앙의 핵심간부가 가해자인 성폭력이 있다는 사실을 조직내 공개하는 것과 피해자 보호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후자를 위해 전자를 포기했다. 피해자 뒤로 숨어 버리는 조직보위는 조직 망치기일 뿐이다.

이 사건 이후 수십년 동안 썩어 문드러진 대형 어용노조 안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겠다며 민주노총으로 조직전환을 준비중인 한 노민추 활동가는 “현장에서 더 이상 민주노총에 가입 얘기를 꺼내지 못 하겠다”고 했다. 그는 성폭력이 있었지만 그 처리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신속한 만이라도 보였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토로했다.

비대위 구성의 상상력 그리고 강경파

비대위 구성을 알린 참세상 기사의 덧글에는 비대위에 남성들이 대부분이라는 지적이 있다. 각 연맹과 지역본부가 비대위에 힘을 싣기 위해선 연맹과 지역본부 임원들이 들어오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러나 비대위의 외연을 좀 더 넓히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비대위는 성폭력 진상조사 외에도 현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무엇보다 비정규, 여성,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2-3월 투쟁 조직화의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비대위 구성에 현장 조합원이나 여성, 비정규직이 참여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18일 있을 중앙위원회가 더많은 상상력이 불어넣었으면 한다.

또 조선일보와 문화일보 등 보수신문은 이번 비대위 구성을 강경파 주도의 온건파 지도부 사퇴 압박과 현 비대위가 강경파라는 식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임원 사퇴 의사를 밝혔던 전병덕 부위원장은 지도부 총사퇴 논란이 정파논리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 남아 계시겠다는 분들도, 사퇴하신 분들도 모두 민주노총을 위한 진정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퇴한 지도부 중 한 명도 “이번 사퇴 해결과정에서 독단이 한 계기가 되서 사퇴하지만 남은 사람은 독단이고 나는 선하다는 이분법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총사퇴를 요구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이나 모두 어떻게 책임을 지고 사태를 해결할지 입장이 달랐을 뿐이다.

문화일보는 12일자 5면 머릿기사에서 임성규 비대위 체제에 강경파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다른 보수신문은 차기 선거에서 강경파가 우세할 것이란 분석까지 곁들였다. 이런 지적에 대해 한 연맹의 실장은 “애초 비대위 위원장 제안은 금속노조 위원장에게 먼저 갔으나 금속노조가 쌍용차 등 산하 지부의 구조조정 저지 투쟁 때문에 맡기 힘들어 그 다음 규모가 큰 공공운수연맹으로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라 정파 구도로 볼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물론 제안 이면에 흐르는 숨은 함의까지 캐면 정파 대립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계산해서 제안하고, 또 계산해서 수용할 상황은 아니었다.

강경파가 비대위를 장악했기 때문에 2-3월 투쟁을 강경하게 할 것이란 주장도 안 맞다. 민주노총은 이미 중앙위와 대의원대회에서 경제위기에 대응해 총고용보장을 요구하고 조기 임단투 준비를 해 나가려고 2-3월 투쟁을 결의했다. 비대위는 이 결정에 따를 뿐이다.

현재 민주노총 비대위는 경제위기로 인한 총고용문제와 비정규직, 여성, 중소영세 노동자의 일할 권리를 지키기 위한 과제 앞에 서 있다. 동시에 성폭력 사건의 철저한 진상조사와 조직 전체적으로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찰의 과제도 크다. 2개월 여 기간 동안 비대위 활동에 따라 민주노총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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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 여성주의 , 반성폭력 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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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김용욱 기자님. 참세상의 보도태도와 방식에 대해서도 좀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제목에서 드러나는 제도언론 못지 않은 선정성,
    인터뷰 대상선택에 대한 전혀 고려없음,
    동일한 사실이라도 무엇이 우선인지가 전혀 판단되지 않는 기사들.
    민중언론 참세상의 보도내용은 다른 제도언론과 다를지 몰라도
    보도태도는 제도언론과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실수라고 생각하기에는, 혹은 미처 고민하지 못해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계속 반복되는군요.
    계속 참다가 한마디 적었습니다.

  • 장길산

    근거 없는 민주노총에 대한 공격이 연일 계속 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민주노총의 지도력을 상실하거나 투쟁동력을 잃을 경우 그 고통은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조직의 보위를 해치려는 주체는 보수언론과 정보기관이다. 피해자가 조직 보위를 해치는 주체는 아니다.
    - 이 내용을 보니 당신들은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차라리 마늘하고 쑥을 들고 21일간 동굴에 가서 사시지요! 그럼 인간이 되려나... 어떻게 자신들의 치부를 다른쪽으로 돌리려는지...

  • 장길산

    그리고 당신들이 언제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을 했는지 묻고 싶소! 늘 대기업 귀족노조의 습관성 파업을 일으켜 하청업체를 연쇄 도산시키지 않았소! 정말 가증스럽소!

  • 투쟁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을 했는지 묻고 싶소! 라고??
    당신이 비정규직 투쟁에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를수밖에.
    부족함이 있고 더욱 열심히 해야하겠지만,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대응하고 있는게 민주노총 아닌가? 당신같은 인간들은 비정규직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귀족노조,정규직노조라고 꼬림말붙이며 노동조합을 까는게 목적이지.

  • 닥쳐라

    제발 민주노총이 노동자 투쟁의 선두에 섰고 어쩌고 저쩌고를 말하지 말라. 벼랑 끝에 서 있는 피해자 앞에서,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해 온갖 비방과 비난을 당할 걸 알면서도 앞으로 '커밍아웃'한 피해자 동지의 상태를 생각해보라, 그 용기 아닌 용기가 너무도 처량하고 절박하지 않은가... 섬뜩한 폭력들을 내내 당하면서도 그걸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 동지의 심정을, 그 절박한 심정을...몇 번이고 칼로 자기 심장을 도려내고 있을 그 동지와, 그 동지의 고립된 투쟁을 무시와 은폐로 외면하는 민주노총에 대해서 좀 생각이나 해보라. 이 따위 글들로 나불대는 너희들이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