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책8]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

1945년 해방부터 1961년까지 (임송자, 선인, 2007)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임송자, 선인, 410쪽, 2007.2.28)

이 책은 2007년에 출판돼 낡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 임송자는 이 책을 1945년 해방 공간 노동운동의 태생적 한계인 '보수적 기원'에 맞춰 서술하면서 반세기도 더 지난 얘기를 쏟아냈다.

운동가가 아닌 학문하는 사람인 임송자의 꼼꼼한 분석 덕분에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을 한발짝 떨어져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엊그제 3월10일 한국노총이 63주년 창립기념식을 열었고, 그 자리에 집권여당의 원내대표와 야당대표 등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렇다면 그 한국노총은 63년 전 어떻게 탄생했을까. 임송자의 얘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저자 서문에서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

현 시기 노동운동의 과제는 보수성 극복이다. 이러한 과제 수행을 위해서는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노동운동의 발전을 저지시켰던 요인이 무엇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성도 그 기원을 찾자면 1945년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1945-1961년까지를 시기대상으로 삼고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 기원을 추적하고자 한다.

저자 임송자는 경기대 사학과, 성균관대에서 미군정기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연구로 석사, 대한노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책을 낼 2007년엔 성균관대 사학과 BK21 사업단 연구교수였다.

서장. 문제제기와 연구방법

1. 문제제기


미군정기 반공.反전평의 기치를 내걸고 태어난 대한독립촉성노농총연맹(이하 대한노총, 1946.3.10 결성때 명칭)은 우익 정치인과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노동자 대중의 계급투쟁을 외면한 채 노동운동 탄압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50년대 노동자대중이 계급형성에 실패한 구조적 요인을 찾기 위해선 대한노총 연구가 필수적이다. 해방 후 전개된 노동운동에서 노동자대중은 계급형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 50년대엔 노동운동의 혁신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노동법 제정이란 유리한 객관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은 침묵했다. 왜일까?

다만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반공 통제 속에서 노동자들은 대한노총이란 외피를 두르고 저급한 수준이나마 간혹 노동투쟁을 전개했다. 조방, 대구 대한방직 쟁의 등이 그렇다. 50년대 후반 노동쟁의가 많아지고 대한노총 안에서 조합주의의 일정한 흐름이 나왔다. 대한노총의 어용성과 자유당 종속에도 기층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어졌다. 59년 전국노협의 건설이 그 작은 결실이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 자유당 권력에 종속돼 노동운동의 본질을 왜곡한 대한노총 연구가 중요하다. 이는 현 시기 노동운동의 보수 기원을 밝히는데도 중요하다.
조돈문은 ‘50년대 노동계급의 해체 - 노총의 호응성 전략과 노동자들의 저동원’이란 연구에서 노동조합들이 선택한 전략은 국가와 자본에 맞선 노동자 동원을 통한 전투성보단 허용된 제도 틀에서 활동하는 체제내화를 선택해 계급형성이 실패했다고 밝혔다.(<경제와 사회> 29호, 1996년 봄호)

이 책은 다음 여섯 가지를 중점 밝힌다. 첫째 미군정기 대한노총의 결성과정과 反전평 활동을 살핀다. 대한노총 내 우익정치세력을 집중 살핀다. 둘째 기존 대한노총 조직변화를 밝힌다. 1953년 노동법 제정때 대한노총이 어떻게 변했는지, 54년부터 58년까지 최고위원제가 1인 위원장제로 변한 요인을 살핀다. 셋째 대한노총이 노동조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 살핀다. 대한노총이 벌인 여당지지, 반공활동에 집중한다. 미약하지만 대한노총의 노동활동도 살핀다. 넷째 대한노총과 정당(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살핀다. 다섯째 59년 전국노협의 결성 의의와 성격을 통해 대한노총의 대안조직일 수 있었는지 점검한다. 여섯째 대한노총의 파벌대립의 원인과 구조를 분석한다.

2. 연구방법과 자료

여기선 저자 임송자가 참고한 자료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 <한국노총(대한노총)> 대의원회,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등 회의자료
- <노동공론> 71년 12월호부터 72년 11월호 연재된 노동운동회고 정담(情談)
- <주한미군정보일지> 1~6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 <주한미군주간정보요약> 1~5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 미군정기 신문 : 노력인민보, 독립신보, 전국노동자신문, 조선인민보, 해방일보
- <자료 대한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17권)

제1장. 보수적 노동운동의 형성

1. 해방후 노동상황과 진보적 노동운동

1) 노동상황


노동자 수는 1944년 6월 30만520명에서 1946년 11월 12만2159명으로 59.4% 줄었다. 47년 3월 노동자 총수는 13만3979명이었다. 대신 46년 11월 15일 현재 남한의 실업자 총수는 약 110만2천명이었다. 이마저도 신빙성 없다. 실제 실업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2)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1)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결성


전평 준비위는 1945년 9월 26일 열렸다. 45년 11월 5~6일 중앙극장에서 16개 산별노조와 합동노조 21만7073명을 대표해 전평이 결성됐다. 결성대회는 긴급제의로 조선노동자계급의 수령이요 애국자인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 메시지, 연합국 노동자에게 감사 메시지, 교란자 이영 일파 박멸 결의, 박헌영 동무의 노선 절대지지 등 4대 결의를 채택했다.

(2) 전평 조직활동

경성콤그룹계가 주도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은 전평을 당의 ‘보조단체’로 인식했다. 조선공산당 간부가 전평 간부를 겸임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연구자들의 반대 주장도 꽤 있다.

(3) 노동운동

전평은 미군정기 3년 동안 1946년 9월, 47년 3월22일, 48년 2월7일, 48년 5월8일 등 4차례 총파업했다. 총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통일에서 더 나가 무장폭동으로 발전했다. 미군정기 노동쟁의는 1946년에 170건, 47년에 134건, 48년에 37건이었다. 방직공업과 인쇄업이 강했다. 인쇄업의 잦은 파업은 당시 출판문화 사업이 좌익에 의해 독점된 걸 반영한다.

2.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결성

1) 우익세력과 노동자 조직화

(1) 우익청년단의 노동조직 활동


대한노총은 전평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을 우익정치가들의 반공논리로 와해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왔다. 노동단체임을 표방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은 아니었다. 우익청년단이 전평 소속 노조를 와해시킨 다음 그 자리에 대한노총을 세우는 방식을 주로 썼다. 우익청년단은 해방 직후 심각한 실업으로 실업청년이 많았고, 월남한 청년들의 범람에 기인했다.

대한노총의 실질 모체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독청)은 1945.12.21 천도교회관서 40여 청년단체 500여 대표자가 참석해 출범했다. 40여 청년단체 통합은 한민당의 청구계 윤보선, 유진산, 김산 등이 주도했다. 독청은 겉으로 임시정부를 지지해 반탁투쟁에 가세했다. 그러나 속으론 이승만 한민당 노선에 더 가까웠다. 독청 위원장 전진한(錢鎭漢)은 독청에 노동부를 만들어 홍윤옥(洪允玉)을 부장으로 해서 노동문제를 전담시켰다. 홍윤옥 김구(金龜, 백범 김구와는 다른 인물) 등은 용산 영등포의 철도에 침투했다. 경성전기(경전) 정대천(丁大天)과도 관계했다. 45년 말 철도 용산공작소 김제희(金濟禧)가 김구와 연결돼 독청 용산공작소 지부를 만들었다.

전평은 일제 때 노동운동의 축적기반과 해방 후 노동운동의 고양 속에 노동자들을 대규모 결집시킬 수 있었다. 전평의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은 넓게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우익은 노동단체를 조직할 만한 인물이 없어 전평에 맞서기 위해 당시 범람하는 실업자와 월남한 청년들이 모인 우익청년단체를 이용했다. 우익 노동단체는 공장주, 기업가, 경영인들의 적극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의 활동자금은 대부분 한민당과 기업가 군정 관리들에 댔다. 우익청년단은 기업 안에서 테러활동을 벌이며 기업주와 공생했다. 독청이 대한노총 조직을 만들었다면, 다른 우익청년단체 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과 서북청년회는 대한노총의 조직 확대에 공헌했다.

(2) 우익정치인의 노동문제 인식과 노동조직 활동

우익정치인들은 대한노총 건설에 깊숙이 개입했다. 처음 우익정치인들은 노동자 조직화에 별 관심 없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문제로 좌우대립때 노동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대한노총 조기 조직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는 전진한 홍윤옥 김구(金龜)였다. 전진한은 한민당 발기위원, 한민당 노농부위원, 민족통일연맹 노동부장을 지내 이승만.한민당계였다. 그는 한민당 창당때 이탈했지만 미군정기에서 이승만 노선에 충실했다. 국민당 청년부 차장이었던 홍윤옥과 한독당의 농민부장을 지냈던 유기태(劉起兌)는 국민당 세력으로 본다. 김구(金龜)도 옛 국민당 세력이다.

국민당의 노동문제 인식은 국민당 위원장이던 안재홍(安在鴻)의 사상에서 알 수 있다. 안재홍은 45년 8월16일 성명에서 ‘인민대중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대중을 지도대상으로 봤다. 민중의 내적 에너지를 민족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변혁의지로 파악한 게 아니었다. 그는 계급대립보다는 초계급성을 강조했다. 안재홍이 1945년 10월17일 밝힌 ‘국민당 정책’에서 “조선 내 일본인 기업은 공사를 막론, 국가에 회수해 국영 또는 민영으로 이관할 것이다. 노자관계는 국가가 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해 노자협조주의를 드러냈다. 이런 노자협조주의는 이후 대한노총의 이념으로 채택됐다.

백범 김구 중심의 한독당의 노동 인식도 국민당과 유사하다. 백범은 상해 임정 초기 지도부 대다수가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를 계속 배척했다.
한민당은 주로 대지주 내지 자산가들이었고, 식민통치에 부일협력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민당 ‘창당선언문’에는 노동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이 제일 먼저 우익노동단체 조직에 나섰다. 홍윤옥이 국민당쪽 조직가였다. 홍은 해방때 29세로 원산의 사상감호소에서 석방돼 안재홍 밑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구상했다. 김구(金龜)는 홍윤옥과 함께 대한노총 조직결성을 주도했다. 김구(金龜)는 독청 청년부장으로 군정 노무과 책임자였던 박택(朴澤)을 찾아가 전평을 억제하기 위해 노조운동에 나설 뜻을 밝히고 조직에 들어갔다. 박택은 일제하 조선총독부 광공국 근로부에서 징용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뒤에 노동부 차장(지금의 차관)까지 했다.

2) 대한독립총성노동총연맹 결성과 초기 조직

(1) 결성


전평에 대항할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우익의 급조 속에 나온 게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었다. 1946년 2월 중순 수표동 기독교예배당에서 우익 노조 결성 준비회의가 열렸다. 미군정은 독청이 우익노동단체를 만드는데 적극 협력했다.

대한노총은 백범 김구와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우익계 정치인이 참석한 가운데 1946년 3월 10일 시천교당에서 결성대회를 열었다. 위원장에 홍윤옥, 부위원장에 김구, 이일청을 뽑았다. 이승만 백범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은 고문이 됐다. 당시 강령에는 “노자간 친선을 기함”이라고 적고 있다. 결성대회엔 노동자보다는 청년운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일한 노동자는 용산공작소의 김제희였고 경전에서 우익노조를 만들다 전평에 의해 해고된 정대천, 이상진 등 몇 사람이 있었다. 대한노총은 그 모체가 ‘독청 노동부’ 정도였다.(해방일보 46년 3월 31일자) (전진한錢鎭漢, ‘나는 이렇게 싸웠다’ 무역연구원, 1996년, 292쪽)

(2) 초기조직

서북사무국을 두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대한노총은 1946년 메이데이 결의문에서 “오늘 조선은 프로혁명기가 아님은 물론이니 계급투쟁보다도 민족의 해결기”라고 밝혀 노조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대한노총은 1946년 메이데이 이후 전평과 대결만을 목표로 삼은 것에서 방향을 바꿔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세력이 내부에서 생겼다. 위원장 홍윤옥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세력이 그들이다.

그러나 홍은 메이데이 동원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1946년 메이데이에는 대한노총의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에 3천명,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전평의 행사엔 3만명이 모였다. 대한노총 메이데이 기념식에서 조소앙은 “건국을 위해 8시간 이상 노동해야 함”을 역설했다. 잠시 조시원 위원장 체제가 있었지만 46년 7월 다시 홍윤옥 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체제로 바꿨다. 당시 대한노총은 용산 영등포 인천에 조직을 갖고 있었고 그 외엔 거의 조직이 없었다. 46년 5월26일 우익지도자 엄항섭은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대신 하루에 16시간, 필요할땐 심지어 24시간 노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홍윤옥과 김구(金龜)는 이런 대한노총의 흐름을 내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대한노총 안에서 이승만.한민당 세력은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홍윤옥과 김구(金龜)를 위협했다. 이에 맞서 국민당 세력은 전국근로자동맹을 만들고, 한독당도 독자 노동자세력화에 나서 한국노동자자치연맹을 만들었다. 이 자치연맹은 일제때 무정부주의 운동을 일부 계승이었다.

3) 9월 총파업과 전진한 체제

1946년 9월23일 낮 12시 부산 철도공장에서 파업을 단행했다. 24일 오전 서울 철도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처음엔 전평뿐만 아니라 대한노총 산하 조합원들도 참여해 하층통일전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한노총 지도부는 즉각 통일전선을 무너뜨렸다.

대한노총은 전평의 9월총파업 직후인 24일 부서를 개편해 이승만을 대한노총 위원장으로 3일간 추대한다(이후 고문으로 추대). 1946년 9월27일 이승만은 대한노총 지도부들과 파업대책을 논의한 뒤 대한노총은 파업에 맞서 직장 사수 내용을 담은 담화를 낸다.

9월총파업은 대한노총에서 홍윤옥 체제가 가고 이승만.한민당계의 전진한이 등극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평을 죽이고 대한노총을 육성하겠다는 미군정의 의도는 9월 총파업으로 호기를 맞았다. 독청 위원장이고, 민족통일총본부(이승만이 만듬) 노동부장이던 전진한이 대한노총 위원장이 됐다. 이승만은 9월총파업 직후 3일간 대한노총 위원장으로 있다가 물러나면서 전진한을 위원장으로 추천했다. 국민당의 홍윤옥을 도태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대한노총은 1946년 10월29일 중집에서 홍윤옥 김구(金龜)를 임원명단에서 뺐다. 전진한이 대한노총을 완전 독점했다. 홍윤옥은 1946년 10월 31일 전진한 규탄성명을 내고 대한노총에서 탈퇴한다. 이때 김구는 홍윤옥과 함께 행동하지 않고 남았다. 전진한은 1946년 10월29일 중집에서 나중에 비리의 온상이 된 ‘소비조합’을 첫 사업으로 내놨다.

이승만.한민당 세력의 주도권에 맞서 안재홍을 배경으로 한 유기태가 ‘전국근로자동맹’을 만들었다. 여기엔 안재홍과 박열(朴烈,1922년 불령사를 만들어 1923년 일본 황태자 암살기도로 구속돼 사형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돼 20년간 옥고, 1938년 3월 감옥에서 변절해 1945년 10월 아끼타 형무소를 나와 극우파로 변절한 아나키스트)이 앉았다.

‘전국근로자동맹’은 46년 9월총파업이 일어나자 “금차 남조선 일대에 걸친 파업행위에 관하여서는 적색계열의 매국적 파괴적 정치모략”이고 “적색 불순분자를 소탕 배제치 않고서는 도저히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행복과 번영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는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한성일보 46.10.6자 ‘파업은 파괴적인 모략! 근로자는 건국의 전위로’) ‘전국근로자동맹’과 ‘전국노농조합총동맹’은 안재홍의 영향하에 만들어져 유기태가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국근로자동맹은 ‘전평타도’라는 점에서 대한노총의 조직목표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이들은 미군정의 노동정책도 비판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대한노총은 47년 3월 17-18일 시천교당에서 1차 전국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전진한의 개회사, 백범 등 내빈 축사 다음 이승만, 트루만, 4상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했다. 이튿날 ‘러취’ 군정장관 대리의 축사와 국내정세보고가 있었다.

대한노총 1차 전국대대의 선언문은 “편향적 자본주의 세력의 형성을 배제하며 계급독재적 정치조직을 배격”한다며 “건설적 노동운동을 전개”한다고 밝혀 노자협조주의를 노골로 드러냈다.
1차 대대에서 채규항(蔡奎恒, 일제때 조선노동총동맹 중집위원, 조선공산당원,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 조사부위원이다가 변절)과 유기태를 부위원장을 뽑은 건 ‘전국노농조합총동맹’(유기태의 지도)을 대한노총으로 합류시키기 위한 안배였다. ‘전국노농조합총동맹’의 대한노총 합류는 미군정 노동부가 실시한 경전의 대표노조 선거가 계기였다. 정대천을 위원장으로 한 경전자치노조는 1947년 1월 25일 전국노농조합총동맹에 가입했다. 대한노총 결성에 참가했던 정대천이 여기 가입한 것은 전국노농조합총동맹을 대한노총으로 흡수통합하려는 의도였다. 대한노총과 전국노농조합총동맹은 47년 4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합했다.

전국노농조합총동맹의 대한노총 합류는 대한노총내 내부갈등을 첨예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대한노총에는 전진한, 유기태, 채규항 3파전이 벌어졌고 전진한이 항상 유리했다. 미군정의 지지와 이승만의 후광을 입은 전진한 세력은 막강했다. 대한노총은 46년 9월총파업 직후 세력확장을 강력 추진, 47년 메이데이땐 훨씬 많은 인원을 동원했다.

47년 대한노총의 메이데이 행사엔 전진한의 개회사에 이어 채규항 부위원장의 격려사, 이승만의 내빈축사, 이승만 대미외교 성공에 감사문 낭독, 그린 AFL(미국노동총동맹) 회장에 보내는 메시지 낭독이 있었다. AFL은 공산주의자와 협력에 반대해 세계노련 참가를 거부했다. AFL은 1949년 12월 세계노련에서 나와 영국의 TUC, 미국의 CIO, 네덜란드의 NVV와 함께 국제자유노련(ICFTU)를 만들었다.

47년 대한노총 메이데이 행사에선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해고 반대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실천됐는지는 극히 회의적이다. 대한노총이 최저임금제나 8시간 노동제를 위해 기업주나 군정당국과 투쟁한 적은 미군정 전기간을 통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일관되게 전평타도운동만 했다. 대한노총은 결의문에서 ‘모리배 박멸’을 외쳤지만 내부 임원들은 사욕을 채우려고 모리배와 결탁하거나 군정과 야합해 극심하게 부패했다. 대한노총 임원들은 공공연히 경영주에게 접근했고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압박하려고 관리자와 적극 협력했다. 군정에서 필수품을 특별배급 받아서 노동자에게 분배한다며 그 물건을 팔아 사욕을 채웠다.

다분히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비판이겠지만 김구(金龜)는 대한노총 임원들의 부패를 적극 폭로했다. 47년 6월 중집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김구(金龜)는 “고위 공직자, 경영주, 첩이 있는 노총 임원들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진한의 지지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진한과 김구의 충돌은 계속됐다. 1947년 7월 해소책으로 위원장을 대체하는 최고위원회를 만들어 전진한 유기태 조광섭 박중정이 최고위원을 맡았다. 1947년 8월 30일 대한노총 산하 농민총국이 분리 독립해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대한농총)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한노총과 대한농총은 동일노선을 유지하며 긴밀하게 양측 의장단의 집단지도체를 만들어 유대했다. 대한농총의 분리는 채규항이 전진한에게서 분가한 것이다.

1948년 1월 10-11일 대한노총 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조직체계는 다시 위원장제로 바꿨다. 전진한은 김구가 대의원대회의 임원선거에 참가하는 걸 막으려고 경찰에게 김구와 안병성을 체포하도록 했다. 김구와 안병성은 도피하다가 선거 때 지지자와 함께 대회장에 나타나 부위원장에 당선됐다.

1948년 메이데이 행사는 미군정이 전평의 행사를 불허해 대한노총만 열었다. 이날 군정장관 딘 소장은 “갖은 난관을 과감히 극복하고 직장을 사수해 준데 치하해 마지 않는다”고 밝혀 대한노총과 미군정의 돈독한 관계를 드러냈다.

3.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조직체계

1) 조직확장과 조직현황


대한노총은 결성때 노조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총연맹’이라고 했지만 한 개의 연맹도 조직하지 못했다. 우익노동단체의 급조에 지나지 않았다. 46년 메이데이 행사 참패이후 대한노총은 조직확대의 필요성에 절감하고 46년 5월12일 독립전취국민대회 직후 일부 청년단원을 중심으로 좌익언론인 ‘조선인민보, 조선중앙일보, 조선공산당, 전평,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사무실을 급습했다. 바로 이날 철도 경성공장에서 대한노총 운수부 경성공장지부연맹 창립대회를 열어 이우면(李遇冕)을 위원장으로 뽑았다. 이게 철도노조의 전신이다.(동아일보 1946.5.15, 5월13일 3천여 철도노동자가 경성공장에서 전평계 노조를 해체하고 대한노총에 가입했다고 보도했지만, 해방일보(1946.5.17)는 허위기사라고 밝혔다.)

1946년 9월총파업 전까지 대한노총은 모두 합쳐 조선주조오류동공장, (철도) 운수부 경성공장분회, 영등포지구연맹, 영등포연맹 용산공작소분회, 도시제사, 조선피혁, 인천자유노조, 조선제분, 인천지구연맹, 유한양행, 해상연맹에 불과했다.

9월총파업은 대한노총에겐 조직확장의 계기가 됐다. 1946년 9월23일부터 전평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대한노총은 전평과 대결해 조직을 상당히 확장했다. 대한노총은 파업이 10월 항쟁으로 이어지자 전평파괴 활동과 더불어 지방조직도 만들었다. 파업 진압 후 좌익진영은 엄청 타격받았고 전평 지도자가 대량 검거돼 대한노총 조직은 급부상했다.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인정받는 노동단체로 전평 총파업을 저지하고 미군정에 적극 협력했다. 그러나 전평의 하부조직은 여전히 남아 현장 장악력은 강했다. 1946년 11월 전평은 24만6777명, 대한노총은 5만7228명이었다. 대한노총은 철도파업 파괴에 성공했으나, 철도를 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대한노총에 대한 강한 저항이 일어났다.

대한노총의 본격 진출은 1947년 3월22일 전평 총파업으로 전평이 또 큰 타격을 입은 후에야 가능했다. 47년 3월말 세계노동조합연맹 대표가 방한했을 때 전평 지도 대부분이 투옥되거나 도피중이었다. 대한노총 조직확장의 또하나 특징은 47년 10월 좌익 소탕을 위해 200명으로 구성된 ‘건설대’를 영남에 파견한 점이다. 말이 건설대지 깡패조직에 다름없었다. 47년 10월 6일 대한노총 건설대가 부산에 가서 폭력으로 47년10월13일 부산철도국을 대한노총 운수부연맹 부산지구지부(위원장 신홍영申弘榮)를 만들었다. 대한노총 운수부연맹은 48년 1월 30-31일 36개 지부를 대표해 234명이 모여 대표자대회를 열어 김민(金民) 위원장, 김용학, 조진춘 부위원장을 뽑았다. 건설대는 대구, 마산에서도 똑같은 짓을 했다.

이때 조직확장은 ‘대표노조선거’라는 방식을 택했다. 대한노총은 46년 9월, 47년 3월 두 번의 총파업으로 경전 내 전평이 급속히 약화되자 투표방식으로 대표노조를 선정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노동부(이대위 노동부장) 당국과 접촉해 대표노조선거를 승인받았다. 대표노조 선거에서 대표권을 획득한 노조는 전종업원을 대표하는 노조로 회사와 교섭할 배타적 권리를 얻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본격 복수노조 시대 교섭권 정비를 앞두고도 노동부의 이 같은 작업이 재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군정의 단체교섭 선거요강이 공포되자 전평 산하 경전노조는 러취 군정장관을 만나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결국 선거는 대한노총 경전노조만 참가해 강행됐다. 그럼에도 전평의 방대한 세력은 쉽게 소멸되지 않았다. 김중열은 “전평의 최후 아성이던 상동광산이 1949년 함락되자 비로소 전평은 전국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회고한다.(김중열, ‘노동 일화 정담’ 1-3, <노동공론> 1972년 4-6월호) 따라서 전평은 48년 정부수립 후에도 잔존해 있었다.

대한노총은 조직 부풀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47년말 미군정 통계에 의한 대한노총 조합원은 8만4363명으로, 전평이 유명무실해진 최고 전성기때도 10만명을 넘지 못했다. 이는 대한노총의 조직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2) 조직체계

대한노총은 전평에 맞서려고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우익정치인들이 만든 것으로 위로부터 하향 방식으로 결성됐다. 먼저 연맹체를 만들고, 우익청년단체의 전평파괴 활동으로 조직을 확장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대한노총은 지역별 체제를 근간으로 했다. 김중열은 “대한노총 출범 당시 공산세력이 하도 강해 산업별조직 보다 지역별 조직으로 발족했다”고 회고한다. 대한노총의 지역별조직은 전평 타도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택한 것이다.

대한노총은 1947년 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산업별조직과 지역별조직을 병행했다. 대한노총은 1948년 1월 2차 대대에서 규약을 바꿔 산업별체계를 선언했지만 산업별 위원회라는 부수 기구를 만들었을 뿐 조직은 여전히 사업장 내지 기업별노조를 중심에 둔 지역별 체제였다.

4.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와해

1) 후원세력


대한노총은 미군정, 우익정치인, 우익청년단, 경찰의 적극 원조로 줄곧 전평타도 운동을 전개했다. 우익정치인들은 설립 초부터 대한노총을 원조했다. 미군정 공보부 자료(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G-2 W/S'2, 149쪽)에 따르면 이승만 23만엔, 안재홍 18만3700엔, 차고동 15만1646엔, 기타 8415엔으로 나와 있다. 우익정치인들은 지방순회 방문이나 공장시찰에서 대한노총의 조직확장도 적극 지원했다.

미군정 노동조정위원회 5인 위원 중 김도연, 김준연, 홍성하는 한민당 인사였다.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한민당 노선을 추종했고 이승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대한노총 위원장 등 임원인 전진한 채규항 황기성은 이승만이 만든 독립촉성국민회 임원을 겸했다.

경찰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 중장의 경제고문이고 미소공위 미국 대표 중 한사람인 번스는 “경찰은 대한노총을 지원했다. 전평은 엄중한 감시를 받고, 전평 노조원은 체포되거나 일제 검거후 강력하게 처벌받았다”고 회고한다.(리차드 로빈슨, 정미옥 옮김, ‘미국의 배반’ 과학과 사상, 1988, 119쪽) 경찰은 친일파 우익에 장악됐다. 한민당원이던 조병옥과 장택상이 미군정 경무부장과 수도경찰청장으로 있었다. 조병옥은 “경전, 용산철도, 인쇄노조사건에 강력한 조치를 위하는 반면 전평 해체에 성공한 민족진영의 노동단체로서 대한노총을 육성시키는 근본방침을 세워 우익노동운동가들로 하여금 진정한 노동운동을 전개하도록 했다”고 회고했다.(조병옥, ‘나의 회고록’ 어문각, 1963, 156-157쪽)

대한노총원은 경찰업무도 대신했다. 46년 10월 27일-11월2일 사이 인천 부평 소사지역 경찰서는 좌익의 공격에 대비, 우익청년그룹과 대한노총 조합원 600여명을 모집, 방위병이나 정찰병으로 이용했다.

우익정치인과 경찰의 대한노총 지원은 미군정의 적극 비호에서 가능했다. 미군정의 대한노총 지원 육성은 대한노총내 이승만.한민당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도록 했다. 초기 대한노총에는 국민.한독당 세력과 이승만.한민당 세력간 분열이 있었지만 이승만 세력이 결국 헤게모니를 잡았다.

46년 8월 미군정 공보부는 대한노총에 대해 “전평이 민족주의 결여 때문에 더 불신임받게 되면 노총은 이득이 될 것이다”고 평가했다.(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G-2 W/S'2, 155쪽) 미군정은 대한노총내 이승만.한민당 세력이 지도력을 얻는 게 대한노총을 육성하는 방안이라고 인식했다. 미군정의 이런 계획은 9월총파업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대한노총은 9월총파업 수습에서 이승만을 3일간 위원장으로 추대했고(조선일보 46.10.2자), 이승만은 전진한을 내세워 철도파업을 해결토록 했다.

46년 7월23일 미군정 법령 97호(대표노조선거)도 대한노총 지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미군정은 전평에 몰려 있는 노동자를 우익 대한노총으로 끌기 위해 중간단계로 복수노조의 존재를 암암리에 장려했다. 법령 97호의 “자기가 선택한 대표자”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후 대한노총은 97호를 이용해 경전이나 운수부 해원노조에서 ‘대표노조선거’라는 방법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미군정은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을 진압한 직후 46년 12월 9일 통첩 ‘노동조합 등에 관한 질의 응답에 관한 건’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노조의 정치운동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평을 겨냥했다. 그러나 정작 노조를 악용해 정치운동을 벌인 이들은 우익 정치모리배들이었다.

2) 행동대원

대한노총의 전평타도 직접 행동대원은 3부류였다. 첫째는 노동자가 아니면서 대한노총에 들어와 활동했던 우익청년단원이다. 대한노총 동양방적(인천, 이후 동일방적)노조는 만들 때 월남한 지주 아들들이 모인 평안청년회 김광일(金光一), 박청산(朴靑山), 김관호(金觀浩)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우익청년단이 직접 대한노총 조직을 만들어 대한노총 산하 지부장을 맡은 사례도 있다. 광복청년회 강갑수는 대한노총 철도연맹 이리지부장이 됐다. 강갑수는 9월총파업때 이리지역 파업분쇄에 적극 가담했다.

둘째 노동자들을 회유 협박하는 방법이다. 대한노총은 화재로 집과 옷과 양식을 잃은 50호 왕십리 주민들에게 “대한노총에 들어오면 집을 사주고 돈을 빌려 준다”고 선동했다.(해방일보 46.3.31자, ‘노조 간판을 가진 자본가조합이 나왔다! 소위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정체에 대한 전평 선전부 발표’) 46년 6월 영등포 한성피혁에선 전평분회를 깨려고 170명을 대한노총에 강제가입시켜 분회를 만들었다. 열흘도 안된 6월21일 노동자들은 대한노총 가입이 폭력에 의한 강제였다고 폭로하고 대한노총을 탈퇴했다.(전국노동자신문 46.7.5자, ‘반동 대한노총을 공장에서 축출, 한성피혁에서 전원 탈퇴’) 폭력으로 대한노총에 강제가입시킨 사례는 영등포 삼영제과, 오류동 조선주조공장에도 있었다. 9월총파업 수습후 경인지역에서 전평노동자 1700명이 체포됐다. 이때 대한노총 수습위가 보장하는 사람들은 석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한노총 가입을 강요했다. 강제 가입은 47년 3월22일 총파업 이후에도 있었다. 영월마차탄광노동자들이 3.22총파업 후 대한노총에 강제 가입했다가 500여명이 대거 성명을 내고 탈퇴, 전평으로 복귀했다.(노력인민보 47.7.25자) 이에 대한노총은 마차 지서장과 야합, 탈퇴한 노동자 20여명을 검거했다.

셋째 대한노총은 전평에 반감을 가진 공장의 관리자를 조직했다. 이는 대한노총이 노조가 아니라 공장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反노동자단체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성전기에서 해방전 15년동안 일하던 정대천을 중심으로 우익노조가 만들어졌다. 동양방적(인천)도 관리자가 대한노총 동양방적 인천공장노조를 만들었다. 부산의 한 방직회사에선 사장이 곧 노조위원장이고 그 회사 청년단장인 경우도 있었다.(박지향, ‘한국 노동운동과 미국 1945-50’, ‘경제사학’, 92.12월호, 119쪽) 영등포 기린맥주공장엔 생맥주부서의 직장이, 인천 동양방직에선 직포 부서 관리자 정승태가, 다복면주식회사에선 공장 총관리자인 남조연이 대한노총 지부장 분회장을 맡았다. 따라서 대한노총의 공장지도부는 대부분 관리직 사원들로 구성됐다.(스튜어트 미첨, 김금수 옮김, ‘한국노동문제의 상황과 인식’ 풀빛, 1986, 267-268쪽)

3) 사례

전평은 우익청년단과 대한노총의 테러와 폭력, 전평파괴에 맞서 46년 5월 자위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한노총은 전평세력이 강했던 경방, 경전, 동방, 철도경성공장에서 집중 폭력을 가했다.

(1) 경방

경성방직 1400여 노동자는 해방직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공장주 김연수(인촌 김성수의 친동생)와 싸웠다.
전평은 “경방은 조선부르주아의 대표 기관인 만치 이 투쟁의 승패는 곧 전조선 노동계급의 승패에 관련되는 것이며 금후 조선노동계급의 시험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해방일보 45.10.25자 ‘우리 전민족의 반역자 김연수를 매장하라’)
김연수는 공산주의자가 배후에서 경방파업을 조종하여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미군정에 허위보고했다. 이에 미군정은 광공국 차장과 미군헌병을 출동시켜 탄압했다. 김연수는 임금인상 요구에 돈이 없다며 공장 폐업위협과 함께 5명을 해고했다. 이때 경방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기구인 공장위 운영하게 자발 조업했고, 생산성은 크게 향상됐다. 46년 8월부터 경찰과 우익청년단체가 결탁해 경방 내 전평제거에 적극 나섰다. 김연수는 노측 교섭위원 10명을 절도죄로 신고해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46년 8월21일 서북청년회 중심의 우익청년단 200여명은 경방 상무 이준묵(李俊黙)과 짜고 경방 전평분회를 깨려고 공장을 습격했다.(전국노동자신문 46.8.30자, ‘야수적 착취와 테러 도당에게 경방노동자 천오백 궐기’)

‘전국노동자신문’은 8.15기념으로 광목 1통씩 배급해 달라는 노동자 요구에 회사가 테러단을 공장에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조선, 동아일보는 전평 산하 노조원들이 공장에 취직된 서북청년들의 작업을 방해한 것에 분개해 서북청년들이 나선 것이라고 보도했다.(조선일보 46.8.22자, 동아일보 46.8.23자) 이준묵은 만주의 삼양사(김연수, 김성수 일가가 일제 만주국에 세운 농장) 시절부터 노무관리에 밝아 46년 6월 전평 와해를 위해 경방에 상무로 임용됐다.(경방70년편찬위, ‘경방 70년’ 1989, 135-136쪽) 김연수는 얻어맞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경찰에 넘겼다. 직접 폭력을 휘두른 평안청년회 김성주와 함북청년회 반성환은 수도경찰청에 연행됐지만 장택상 청장은 ‘폭력의 원초 도발자는 전평’이라고 판정해 이들을 격려했다.

47년3월31일 세계노련(WFTU) 대표단이 노동자 생활실태와 노조활동을 조사하려고 경방을 방문했지만 김연수의 기숙사 시찰방해와 테러단의 폭력으로 중단됐다.(전국노동자신문 47.4.8자) 계속된 테러로 전평이 위축되자 결국 47년 4월5일 대한노총이 경방지부를 만들고 강규성 위원장과 손태원 이정희 부위원장을 뽑았다.

대한노총은 경방내 전평세력이 거의 제거되자 세 과시를 위해 김연수와 대립해 노사분규를 일으켰다. 그만큼 김연수에겐 뜯어먹을 게 많았는 소리다. 분규의 계기는 47년 9월 경방 영등포공장의 ‘청부식 임금제’ 도입이 화근이었다. 청부식 임금제는 고정급 일당을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김연수 김성수 일당의 선진고도 경영기법 중 하나다. 그러나 이 파업은 미군정청의 포고령 5호(파업 자체를 범죄로 규정)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2) 경성전기

경성전기주식회사 노동자 5300명은 해방직후 ‘경전파업단’을 만들어 일본인 경영자에게 생활임금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군정과 협상 끝에 450만원의 생활수당을 쟁취했다.

전평은 45년 11월 5일 경전에 노조를 만들어 전평의 중추세력으로 키웠다. 한편 회사는 노동자들이 좌익행사엔 불참토록, 우익행사엔 적극 참여토록 하는 전략으로 나왔다. 회사와 짜고 경전에서 적극 우익노조를 만들려 했던 이는 정대천이다. 정대천은 해방 15년 전부터 경전에서 근무하던 관리자급이었다. 정대천은 46년 1월25일 전평규탄대회를 열어 노조를 깨려 했으나 실패하고 본인 등 14명이 전평의 요구로 해고됐다. 정대천은 46년 10월17일 10개월 만에 복직했다. 이때는 9월총파업 여파로 경전에서 전평이 약화되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9월총파업에 나선 경전 노동자들은 46년 10월1일 경찰에 의해 노조위원장 등 200여명이 검거됐다. 정대천은 대한노총 서북청년회 등 테러단의 폭력 비호 속에 46년 11월22일 경전자치노조를 만들었다가 47년 4월6일 대한노총 경전노조로 이름을 바꿔 대한노총에 들어갔다.

이후 경전에선 전평 산하 노조와 대한노총 산하 2개 노조가 내부에서 격돌했다. 노동부는 47년 4월9일 경전대표노조선거 실시방침을 발표했다. 전평은 항의하고 선거를 거부했다. 이에 정대천은 테러단을 동원해 “대한노총에 투표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하고 폭행하는 등의 선거운동을 펼쳤다.(전국노동자신문 47.4.22자, 테러로 예비운동) 결국 47년 4월19일 대한노총만 선거에 참가해 대한노총 경전노조 찬성 3260명, 반대 394표로 경전에 대한노총 교두보를 세웠다. 투표결과는 경전내 전평세력이 46년 9월, 47년 3월22일 총파업으로 상당히 세력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대한노총 경전노조는 47년 6월16일 1차 정기대대에서 정대천을 위원장으로 하고 감찰위원회를 만들어 전평 소탕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평세력은 경전에서 완전 소멸되지는 않고 산발 투쟁을 벌였다.

(3) 인천 동양방적(이후 동일방적)

미군정은 45년 10월 22일 최남(崔楠)을 동방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최남은 일제때 요정 국일관과 백화점의 모태였던 부녀상회를 운영한 거상이었다. 동방은 46년 메이데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5월5일 일요일에 일하라고 했다. 노동자는 즉각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노조간부 윤한수 김정애 등 7명을 검거하라고 경찰에 연락했다. 회사는 이들의 검거를 틈타 대한노총 가입을 강요했지만 투쟁으로 막았다. 회사는 몇 일 뒤에도 같은 짓을 벌였지만 전평은 막아냈다.(전국노동자신문 46.5.10자, 용감한 인천동방 노동자, 반동노조 모략을 분쇄) 회사는 석방된 노조위원장 윤한수와 김정애를 서울 본사로 전근시켰다. 두 사람을 거부하고 싸웠지만 결국 해고당했다.

노동자들은 46년 5월25일부터 해고자 복직 등 10개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무장경관(헌병)을 동원해 노동자를 기숙사에 감금시켜 폭행했고, 파업은 한달만에 실패했다. 대한노총은 8월3일 영등포 대한노총원과 인천의 평양청년회원 700여명을 동원해 회사의 도움 속에 대한노총 동방인천공장노조를 만들고 채경석 위원장과 김병학 최정한 김정신을 부위원장으로 뽑았다.

대한노총 동방인천공장노조는 간부사원과 경비대원 중심으로 만든 신우회가 핵심이었다. 이때 폭력배로 동원됐던 평안청년회 김광일(金光一)과 박청산(朴靑山) 김관호(金觀鎬)는 이때부터 동양방적과 인언을 맺었다.

(4) 영등포 조선피혁

영등포 조선피혁공장(1300명)은 일제때 군수공장이었다. 해방 후 자체 관리운영위가 일본인에게 정식으로 공장을 인수해 45년 10월8일부터 조업했다. 조선피혁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경영은 순조로웠다. 생산율은 해방적과 비교해 2배가량 올랐다. 노동자들은 정치투쟁에도 적극이었다. 미군정은 노동자 지지를 받던 박인덕 사장을 파면하고 46년 4월10일 조균훈을 새 관리인으로, 부장환을 보조인으로 파견했다.

부장환은 노동자 송대근(宋大根) 박영순(朴榮淳)을 해고했다. 부장환은 조피에서 대한노총 노조를 만들려고 노동부를 여러 번 찾아 다닌 끝에 46년 7월12일 대한노총 조선피혁분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한노총원과 전평조합원 사이 갈등은 심했다. 46년 8월 대한노총원이 조선피혁 수위총무 송규철(宋圭喆)을 집단폭행 끝에 죽였다. 46년 10월 이후 전평은 크게 약화되고 전평간판이 내려졌다. 다수 노동자가 대한노총에 가입했다. 47년 2월4일 노동자 200명이 전평 재기를 목적으로 움직였지만 대한노총은 ‘응원대’를 동원해 노동자 3명을 납치 구타했다. 경찰도 2천명이나 동원돼 전평계 노동자 230명을 검거해 일단락됐다.

(5) 경성 철도공장

철도국 경성공장 심사과에 있던 보성전문 출신 홍현기(洪鉉基)는 임도제(任道濟, 남로당원), 김병제(金秉濟, 이후 변절) 문교식 박경모 정태수 등과 함게 45년 10월 19일 운수부 경성공장 종업원동맹을 조직했다. 이후 전평 경성공장분회로 개편했다. 이때 건국청년회 국민당청년부원들이 전평을 깨려고 철도 경성공장에 침투했다. 이들 청년단체는 전평노조에 반감을 갖던 공장간부와 결탁해 전평노조 해체계획을 세웠다. 우익 청년단체는 46년 1월 7일 테러단 300명을 동원, 전평 경성공장분회를 습격했다. 이들은 46년 5월12일 대한노총 운수부 경정공장지부연맹을 만들어 이우면을 위원장으로 뽑았다. 동아일보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전평노조를 해체하고 3천여 노동자가 대한노총에 가입했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46.5.15자) 그러나 이 기사는 허위였다.(해방일보 46.5.17자)

9월총파업 당시 경성공장 3700명 중 대한노총원은 800명 정도였다. 철도공장에 인접한 경성기관구는 6백여명의 노동자가 집결된 전평의 요새였다.

9월총파업을 무력 진압한 대한노총은 47년 1월18일 용산 부우회관에서 대한노총 운수부연맹을 만들고 우차진 위원장, 조진춘 김용심을 부위원장으로 뽑았다. 이어 대한노총은 철도 지방조직 확장에 나섰다. 특히 좌익세가 강했던 경남엔 대한노총의 ‘건설대’가 맹활약했다. 47년 10월6일 ‘건설대가 부산에 들어와 10월13일 부산철도국 산하를 묶어 운수부연맹 부산지구지부(신홍영 위원장)를 만들었다. 대한노총 운수부연맹은 48년 1월30-31일 대표자대회를 열어 김민 위원장, 김용학 조진춘 부위원장을 뽑았다.

(6) 9월총파업

대한노총은 9월총파업이 일어나자 9월24일 파업대책을 협의하고 9월28일에 확대회의를 열어 우익정당, 우익사회단체, 우익청년단체와 협력해 전평총파업에 반대하는 직장 복귀투쟁을 벌였다.

대한노총은 청년단원들과 함께 장택상 수도경찰청이 지휘하는 3천명의 경찰과 서울 철도의 모든 외곽선을 포위, 압축해 들어갔다. 이들은 농성장에 난입해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해산시켰다. 대한민청 유진산의 경호책이었던 조희창은 “철도파업 중심지인 용산역 기관구가 제1목표였다. 전반 작전계획은 장태상 청장이 총지휘했죠. 대한민청은 김두한 감찰부장을 선두로 정예대원을 출동시켰다”고 회고했다.(이경남, ‘분단시대의 청년운동’상, 삼성문화개발, 1989, 246쪽) 이때 1700여 노동자가 체포됐다. 대한노총은 수습위를 만들어 신원을 보장하는 600명을 10월8일 1차로 석방시켰다.

(7) 47년 3.22총파업과 48년 2.7총파업

전평의 철도쪽은 46년 9월총파업때 붕괴돼 대한노총 운수부연맹이 장악했다. 47년 3.22총파업때는 정대천의 대한노총 경전노조가 파업 저지에 나서 총파업 이튿날부터 철도를 정상운행시켰다. 이때 대한노총은 지역 철도조직 건설에 나섰다.

전평은 유엔한국위원단의 내한을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을 전개했다. 전평 핵심이던 조선해원동맹은 48년 2월7일 오전 7시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에 대한노총 해원노조와 부산지구연맹은 파업을 깨려고 선박에 들어가 파업주동자를 색출했다. 대한노총 해원노조 김서규 김사욱이 지휘하고 선박침투공작은 김호진이 맡았다.
전평은 5.10선거 저지를 위해 48년 5월8일 총파업에 나섰다. 이때도 대한노총은 5.10선거 지지 선봉에 섰다.

제2장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노동총연맹

1. 정부수립 이후 보수적 노동운동의 내부갈등

1) 유임 지지파와 유임 반대파


대한노총은 정부수립을 맞아 새 국면에 직면했다. 반공, 반전평의 공동목표로 뭉쳤던 우익정치가와 자본가들이 대한노총과 틈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한노총은 우익청년단과 갈등도 표면화됐다. 대한노총 조직내 파벌대립도 심화됐다.
정부수립 후 대한노총은 두 파벌로 나눴다. 9월총파업 수습에서 위원장으로 등장해 주류가 된 전진한(유임지지파)와 이에 대항한 비주류파(유임반대파, 혁신파, 3월파)가 그것이다. 반 전진한 세력은 안으로 또 갈렸다. 김구와 유기태는 공동전선을 폈다. 그러나 김구(金龜)를 중심으로 한 유임반대파의 일부가 혁신위를 만들었다. 유기태 등은 혁신위에 가담하지 않았다. 김구와 유기태는 49년 전국대의원대회를 앞두고 다시 공동전선을 폈다.

주류 전진한과 비주류의 갈등은 이렇다. 전진한이 이승만 정부 초대 사회부장관에 임명됐다. 이에 전진한이 맡고 있던 대한노총 위원장직을 겸임여부를 놓고 유임지지파와 유임반대파로 분열됐다. 유임반대파는 미군정기 한독당.국민당 세력으로 이들은 김구와 유기태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들은 전진한의 유임에 반대하면서 대한노총내 세력확보에 나섰다. 격전장은 48년 8월 26-27일 대한노총 임시대의원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대한노총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에서 대한노동총연맹으로 바꿨다. 이 대회에서 김구는 전진한의 위원장 유임은 대한노총을 관제 노동조합화하는 것이라며 적극 반대했다. 김구 등은 유임에 반대하며 총퇴장했다. 퇴장 뒤 찬성파만 남아 전진한을 위원장에 유임시키고 부위원장에 유기태 등을 뽑았다. 이어 대한노총은 48년 8월28일 중집에서 김구 김관호 등 반대파를 제명시켰다.

2) 전국혁신위원회

김구를 중심으로 혁신위가 구성돼 전진한파와 반대파의 대립은 극렬했다. 혁신위는 경전노조 운수부연맹 서울철도와 각 지방노조도 가담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안병성 인천연맹위원장과 송원도 부산연맹위원장이 혁신위에서 이탈했다.

혁신파는 대한노총을 그나마 민주 개혁하려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혁신파는 49년 1월 영등포에서 정화위를 만들어 조광섭의 횡령을 고발했다. 또 49년 4월엔 유경원 인천지구 노조위원장도 횡령죄로 고발하는 등 대한노총 간부들의 부패에 저항했다. 유경원은 하역부 하청업자였지 노동자는 아니었다.
기존 연구는 혁신위의 주장을 과도하게 평가했다. 혁신파는 전진한에 반대했지만 이승만 정치노선엔 충실했다. 대한노총 초기에 한독당계로 분류된 이들 혁신파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해 납북협상에 나섰던 한독당과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다.

3) 3월파와 4월파

김구와 유기태는 48년 8월 임대에서 전진한 위원장 유임반대의 공통입장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혁신위를 만들어 혁신 선언할 때 유기태는 김구와 거리를 두었다. 김구와 유기태는 다시 49년 3월 전국대대에서 단일전선을 형성했다. 이들은 대대에서 유기태를 위원장 후보로 내세웠다.

49년 3월25-26일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열린 대한노총 3차 전국대의원대회에는 전진한 세력과 유기태.김구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구는 12명의 경호를 받으며 대회에 참석해 “대한노총이 정부 지배를 받고 있다”고 비난했다. 임원선거 결과 유기태가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투표결과는 전진한 198표, 유기태 219표, 김중열 2표였다. 부위원장에는 김구 등이 뽑혔다.
전진한이 패한 원인은 김구.유기태의 결집도 있었지만, 48년 12월19일 前 청총 위원장이며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인 유진산이 자기 관사에서 수도경찰청 무장 경관대에 검거된 걸 계기로 전진한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사회부장관직을 내놓은 돌출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3월 전국대대에서 패배를 인정했던 진전한은 이를 번복해 3월대회를 부정하고 4월에 전국대대를 재소집했다. 이게 유기태.김구의 3월파와 전진한의 4월파 갈등이다. 전진한 지지파의 명분은 대의원선정이었다. 철도에 배정된 대의원 57명을 공정 배분하지 않고 42명을 철도 중앙에서 임의로 뽑았다. 철도 조합원의 3/4가 지방인데 15명만 배정했다. 또 철도 대의원으로 배정된 자들이 제명당한 자,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많았다는 명분도 있었다. 누가 뽑더라도 대한노총 대의원이 대부분 그런 인간들이었지만 문제가 됐다. 전진한의 4월파는 49년 4월21-22일 시천교당에서 전국대대를 열어 전진한을 위원장으로 뽑고 비리로 도마에 올랐던 조광섭을 감찰위원장으로 뽑고 3월파 3명을 제명했다. 이에 3월파는 유기태 위원장 명의로 3월대대 결의를 충실 이행할 것을 표명했다. 대한노총은 동일한 이름의 위원장 2명이 존재하게 됐다.

4월파는 49년 4월23일 영등포 소재 용산공작소 감투대와 경전노조 전위대를 동원해 대한노총 사무실에 들어가 3월파 임직원을 내모는 실력전을 벌였다. 다음날엔 3월파에서 철도연맹 경성공장 서울공작창 전위대 300명을 동원, 회관 탈환에 나섰다.
49년 5월14일 이승만은 유기태.김구의 3월파가 합법이라고 사회부 노동국장에게 하명했다.(동아일보 49.5.17자) 3월파와 4월파 분열은 49년7월20일 이승만의 중재로 봉합될때까지 반년 가까이 계속됐다. 이승만이 제시한 해결책은 양파 합동으로 최고위원제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에 3월, 4월파는 각 5명의 최고위원을 뽑았다. 이로서 정부수립 후 끊임없이 야기된 대한노총 내부분열은 노총의 총재인 이승만의 지시로 미봉됐다. 이승만은 대한노총 창립때부터 줄곧 고문이나 총재였다.

대한노총은 3월, 4월파 분열 속에서 노동자 권리는 돌보지 않았다. 심지어 4월파 간부는 조선전기업 쟁의 해결을 구실로 서민호 사장(국회의원)과 금전거래도 했다.

4) 전진한 체제의 확립

49년 7월 대립이 봉합됐지만 분열이 완전 제거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전진한과 유기태간 대립은 증폭됐다. 50년 3월 전국대대를 앞두고 김구는 좌익혐의로 체포돼 대회 전날 석방됐다. 50년 3월 대대는 최고위원제 유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이 문제로 대한노총은 또 분열했다. 다가온 5.30 민의원(2대 국회의원)선거도 주요 관심사였다.
50년 2월24일 사회부장관은 대회를 앞두고 대한노총 간부회의를 개최해 파벌을 막아보려고 했다. 대한노총 간부회의는 정부의 사회부장관 주재로 종종 열리곤 했다. 이 자리에서 전진한은 위원장제도를 주장했고, 유기태는 최고위원제를 주장해 합의점을 못 찾았다.

50년 3월 10-11일 전국대대는 시천교당에서 열렸다.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 개헌문제가 나오는 등 정국이 어수선할 때였다. 대대 결과 위원장제가 다시 채택돼 전진한이 위원장에 뽑혔다. 부위원장 안병성은 전에 혁신위 쪽이었지만 부위원장을 대가로 전진한 지지로 돌아섰다. 주요 직책 중 하나가 감찰부장이였는데 의약품을 취급하는 유한무역회사 관리자이자 사장이었던 박중정이 맡았다. 감찰부장은 원래 노조 복지를 다루는 직책이었는데 노동자들의 좌익사상을 조사는 걸로 임무가 바뀌었다. 50년 3월12일 열린 대한노총 중집은 혁신위 쪽을 완전 추방시켰다. 대한노총에서 전진한 체제가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한국전쟁 덕분이었다. 김구, 유기태가 전쟁통에 피살, 납치돼 전진한의 대항세력이 소멸했다.

2. 한국전쟁기 조직변화

1) 조직파괴와 조직변화


대한노총은 전쟁기간 중 별 활동을 못했다. 노총은 전쟁으로 51년 열릴 5차 전국대대를 개최할 수 없었다. 각 도와 산별대표자회의로 대신했다.

2) 내부갈등과 대립

대한노총은 조선방직 쟁의와 51년 12월23일 자유당 창당으로 분열했다. 조방쟁의에서 정화위원회파(정화파)와 조방대책위원회파(조방파)로 분열했다. 대한노총 정화파는 ‘원외자유당’ 영향을 받아 정치파동에 이용됐다. 원외자유당은 조방 내 민의동원본부를 두고 파업 노동자들을 ‘딱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관제단체로 조직해 정치테러 습격에 활용했다. 이 단체는 노조원을 참칭해 사이비 노조원들을 대거 동원했다.(김영태, ‘도큐멘타리 노동운동 20년 소사’6, 노동공론, 72년 5월호, 154쪽)

51년 12월15일~52년 3월13일까지 전개된 조방쟁의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하권, 역비, 1999년, 502~505쪽) 조방쟁의는 대한노총이 내부혁신으로 진정한 노동운동의 새 방향으로 나갈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노총 지도부는 조방쟁의를 하나의 헤게모니 쟁탈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런 분열 속에 대한노총 52년 정기대대가 열렸다. 조방쟁의와 자유당 결성으로 분열된 대한노총 파벌싸움은 정기대대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전진한 중심의 조방파는 52년 5월27일에, 주종필.조광섭 중심의 정화파는 52년 5월31일에 대대를 따로 열었다. 이승만은 5월31일 이외의 대회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대한노총 대대소집권자는 위원장 전진한이었지만 이승만의 월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진한과 조방파는 이승만 담화로 5월27일 대대 추진을 중단했다.

사회부장관은 5월27일 대통령을 만나 대한노총 대대문제를 협의했다. 김용택 사회부차관은 두 대회를 모두 인정 못하고 쌍방대표와 타협해 6월 9일 대대를 합동으로 연다고 담화를 발표했다.(동아일보 52.5.30자 ‘대한노총 6월9일에 개최’) 그러나 주종필(철도연맹위원장, 운수부연맹 감찰위원장).조광섭(영등포연맹위원장) 중심의 정화파는 이승만의 지시대로 31일 대대를 열어 임원을 뽑았다. 최고위원으로 이진수(李鎭洙, 현직 국회의원으로 새로 영입, 노동자 아님) 조광섭 주종필 조용기(전진한 밑에서 부위원장) 박중정(3월파 감찰위원장)이 뽑혔다. 정화파는 새로 영입한 국회의원 이진수, 전진한의 주류파였으나 전진한과 결별한 조광섭, 조용기, 3월파에 속했던 주종필, 박중정 등으로 구성했다. 이진수는 제헌의원을 거쳐 5.30선거에서 또 당선된 정치인이지만 이때 대한노총 정화파가 영입했다.
전진한의 조방파는 사회부장관의 지시대로 52년 6월9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대대를 열고, 위원장 전진한, 부위원장 조경규 임기봉 김중열을 뽑았다.

결국 대한노총은 완전히 둘로 분열했다. 정화파가 최고위원제를 채택한 반면 조방파는 위원장제를 채택했다. 이승만 권력에 대항하려 했던 조방파와 이승만에 영합하려 했던 정화파간의 대립이었다. 대한노총 중앙의 분열에 대해 일부 하부조직은 반발했다. 52년 3월 철도연맹 전국대대에서 기존 위원장 주종필이 재선하지 못한 건 주종필이 정화파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3) 전국통일대회

정화파와 조방파라는 대한노총의 분열을 타개하려고 주무부서인 사회부장관은 52년 10월7일 지역과 특수연맹 대표자들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통일수습대책위’를 만들어 52년 10월28일 전국대대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통일수습위가 전진한과 주종필을 제명하겠다고 발표해 버려 대한노총은 정화파, 조방파에 이어 통일수습위 등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말았다.

통일수습위는 전진을 배제하려는 이승만의 의중을 읽고 사회부가 주도해 만든 조직이다. 주종필의 조방파는 통일추진위를 만들어 수습위원회마저 두 개로 분열했다. 결국 통일수습위와 통일추진위는 52년 10월30일 사회부장관실에서 연석회의를 열어 두 위원회를 해체하고 52년 11월 8-9일 통일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11월 8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열린 통일대회는 최고위원 ‘3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으나 ‘약간명’으로 하자는 철도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최고위원에 송원도(조방파) 조경규(조방파) 이진수(정화파)를, 감찰위원장에 박중정 김영주를 추천했으나 모두 사퇴해 결국 김두환에게 돌아갔다. 조직부장은 종요한 자리라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아 결국 제비뽑기로 변용상이 결정됐다.(노동운동회고 정담(鼎談), 대한노총결성전후 7, 노동공론, 72년 6월호, 208쪽) 결과적으로 조방파 인물들이 대거 대한노총을 장악했다.

이승만 지시대로 전진한 주종필이 제거됐으나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정치 의도대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비록 조방쟁의는 실패했어도 조방쟁의에 적극 동참했던 조방파가 대한노총 중앙 임원으로 대거 등용됐다.
이승만이 왜 주종필 마저 제거하려 했는지 의문이다. 이승만은 52년 10월31일 ‘대한노총 통일을 위한 지도자에게 권고’라는 담화에서 “분파행동하는 사람은 모두 제거하겠다고 표명했다. 그렇더라도 주종필(철도 출신)은 전진한과 달이 이승만 정치노선에 충실했던 정화파였다. 이승만은 52년 11월8일 대한노총 통합대대에 “대의원들이 최고위원 3인을 뽑아 내게 천거하면 그중 1인을 택하여 1년 동안 자유당 중앙위원의 책임으로 시무케 할 것”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러고도 대한노총이 노동자조직인지 의심스럽다.

이승만에게 제거된 전진한은 대한노총 통일대회가 끝난 11월10일 “관권과 돈으로 강제 소집된 불법대회였고, 대부분 유령단체 대표가 날조한 유령대의원 대회였다”며 통일대회를 부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새로 뽑힌 송원도 조경규 이진수 최고위원과 김두한 감찰책임위원은 제각기 정치적 발언권을 높이려고 서로 반목 대립했다. 52년 전쟁때 수도가 부산인 점을 감안, 대한노총 세력판도가 부산부도노조의 주도권 장악에 좌우됐다. 정치적 야심을 품은 이들 중앙간부들은 제각기 부산부두노조를 발판으로 조직침투작업을 계속했다.
부산부도노조는 김희봉(金熙鳳) 윤효량(尹孝亮), 안필수(安弼洙))의 3파로 분열했다. 김두한과 조경규는 김희봉에, 이진수는 윤효량에, 송원도는 안필수와 연결해 파벌대립을 일삼았다. 이들에게 노동문제는 늘 뒷전이었다.

3. 조직체계

1) 조직 재정비


48년 정부가 수립되자 기업주는 대한노총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정부수립 후 새로 정비된 조직은 전쟁으로 상당수 파괴됐다.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는 작업은 전쟁이 소강상태인 52년부터 진행됐다. 대한노총은 산하 노조를 재정비해 각지에서 노조를 새로 만들었다.
기업주들은 대한노총의 조직확대를 저지하려고 파괴행위를 감행했다. 그러나 부산부두노조는 달랐다.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아 조직도 건재했다. 그런데 내부 파벌대립은 어느 때보다 심해 조직정비는커녕 헤게모니 쟁탈전만 계속했다.

2) 조직체계

대한노총은 지역별 체제와 산업별 체제를 병행했다. 지난날 혁신파는 지역별 조직체계를 산업별 조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파가 제기한 산업별 조직체계는 49년 3월 전국대대에서 규약수정으로 채택됐다. 그러나 대한노총이 산업별 체계를 채택한 것은 혁신파의 활동으로 이뤄진 건 아니다. 49년 대한노총 대다수가 산업별 조직체계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대대에서 산업별 조직체계 채택론이 당시 주류파였던 전진한 쪽에서도 나왔다. 따라서 혁신파가 산업별 조직체계를 주장한 반면 전진한은 지역별 조직체계를 고수하려 했다는 이전의 연구는 재고돼야 한다.

산업별 조직을 건설한다고 했지만 대한노총 산업별 연맹이 실제로 제기능을 했는지는 극히 회의적이다. 산업별조직은 실제 기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전히 대한노총의 중심 조직구조는 지역별 체제였다.

3) 조직현황

국제무대에 파견된 대한노총 지도자들은 조합원 수를 터무니없이 과장했다. 49년 국제자유노련 런던회의에 참가한 전진한은 대한노총 회원을 300만명으로 주장했다. 국제자유노련의 실사계획을 알아챈 전진한은 80만명으로 낮췄지만 이 숫자도 과장된 것이다. 이런 저런 연구를 종합해 볼 때 전평이 붕괴된 정부 수립 후에도 대한노총 조합원은 10만명을 약간 넘는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한국은행 조사부, 경제연감 55년판, 대한노총 조합원 7만7124명) 주한미대사관 일등참사관 로버트 터커가 미 국무부에 보낸 半연간 보고서(58.8.28)에서 대한노총 조합원 수는 50년에 13만명이던 것이 한국전쟁으로 53년에 11만2천명으로 줄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 숫자가 비교적 실제와 유사했다.

4. 대한노동총연맹의 활동상

1) 노동계를 압박하는 요인들


대한노총이 노동단체로 제대로 기능하려면 미군정기 대한노총의 구성원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우익청년단원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에도 조직내 우익청년단원이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익청년단원은 자본가와 밀착해 노동활동을 탄압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49년 10월29일 사회부 노동국장 전호엽(全浩燁)은 “현재 각 직장에는 대개 노조 외 청년단 부인회 등이 조직돼 있다. 이들의 제재와 간섭 때문에 노조의 정상 발전에 많은 장애를 주고 있다”고 밝혔다.(동아일보 49.10.30자, 노조발전 노력, 全 노동국장 談)

좌익이 남한에서 물러간 시점에 대한노총과 우익청년단의 공조는 파괴되어 가고 있음에도 우익청년단은 여전히 각 직장, 공장에 남아 노조활동을 압박했다. 각 직장에 조직된 청년단이 노조로 재조직된 경우도 있었다. 기업주가 노조 파괴를 위해 적극 청년단을 조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전업 사장 서민호(국회의원)는 대한청년단을 회사에 들여 자신이 단장으로 취임하고, 이들을 이용해 노조위원장 최용수와 부위원장 김문규를 감금폭행하는 등 노조파괴에 주력했다.
미군정기 대한노총과 우익청년단의 공조라는 유산이 정부수립 후에도 이어져 대한노총 간부는 대한청년단의 간부직을 겸하고 있었다. 우선 전진한 위원장이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해 48년 12월9일 만들어진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으로 있었다.

한편 현장에선 노조와 청년단의 갈등이 점차 심화됐다. 노사 분쟁때 대한청년단은 회사를 대변해 적극 간섭했다. 50년 1월17일 전업노조 부위원장이 부당해고되자 복직투쟁이 일어났다. 이 회사 청년단은 ‘서울신문’에 부위원장 복직요구를 노골 비난하고 노조원이 공산주의자라고 몰았다.
노조와 청년단의 갈등이 악화되자 대한노총은 청년단을 직장에서 몰아내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49년 6월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도 노조활동을 막는 주요 요인이었다. 50년 3월 국민보도연맹은 철도연맹을 결성해 전평 소속 철도노조원 5천명을 포섭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우익으로 철저히 개조된 사람들이라 노조활동마저 방해했다. 국민보도연맹은 많은 공장에 지부를 갖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과 노조 사이에도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을 직접 입안했던 오제도는 “대한노총은 노동자들의 복지와 안전을 위한 운동이기에 우리는 그 점에서 어떤 마찰이 없다”고 발언했다.(1988년 12월 ‘말’과 인터뷰)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은 노조 활동을 많이 간섭했다. 대한청년단과 국민보도연맹은 각 직장에서 노동활동을 제어, 파괴했다. 사회부는 49년 10월 대통령 명령으로 대한노총을 제외한 어떤 단체도 직장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에도 50년 3월까지 이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치지 않는 대한노총 내 파벌투쟁이었다. 중앙의 파벌투쟁으로 정부수립 후 노조결성, 노동법 투쟁, 공무원법 수정투쟁 등에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악영향을 미친 경우도 많았다. 전쟁 중 일어난 조방쟁의가 파벌투쟁의 대표 피해자다. 대한노총 내 파벌 대립과 부패 간부들 때문에 조방쟁의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획기적이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2) 입법활동과 대한노동총연맹

(1) 헌법제정과 이익균점권


파벌대립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대한노총이 벌인 헌법제정 과정의 활동, 공무원법 수정투쟁, 귀속재산처리법 수정투쟁, 노동법 제정 촉진운동은 미군정기와 대조를 보인 성과다. 이는 노동활동으로 조직방향을 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제헌헌법 17조와 18조는 다음과 같다.
17조(근로의 권리의무, 근로조건의 기준, 여자와 소년의 근로의 보호)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근로조건의 기준은 법률로써 정한다. 여자와 소년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18조(근로자의 단결권, 이익균점권)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법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정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헌법에 ‘이익균점권’이 포함된 건 대한노총 활동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대한노총의 주장에, 무소속 의원들의 노력으로 채택된 것이다.

(2) 법령 제정과정에서의 활동

대한노총은 공무원법, 귀속재산처리법 수정투쟁을 전개했다. 공무원법 초안의 36조는 “공무원은 공무 외 일을 위한 집단행동을 하여서는 아니된다”였다. 이에 대한노총 철도연맹은 당장 노조활동이 금지된다며 대한노총의 존폐가 달린 문제에 대통령 건의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대한노총이 낸 국가공무원법 수정안은 부결되고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대한노총은 귀속재산처리법안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전진한(당시 보선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은 귀속재산의 우선 불하권자로 “종업원이 된 조합대표자”를 넣자고 제안했다.(자유신문 49.11.12자) 전진한의 제안은 여러 수정안과 병합해 우선 불하권자로 “종업원조합”으로 수정됐다. 이 수정안은 국회를 통과했으나 조선재산인연합회(전경련의 전신)의 맹렬한 반대로 정부가 ‘종업원 조합’을 삭제하고 단순히 ‘종업원’이라는 단어로 바꿔 제정했다.

3) 48년 5.10선거, 50년 5.30선거 참여와 자유당 창당

(1) 5.10선거와 대한노동총연맹


5.10 선거는 해방 후 남한서 실시된 첫 보통선거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남북 분립과 민족 분열을 야기한 이승만의 집권만 정당화시킨 선거라는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승만.한민당 등 극우세력은 선거를 적극 환영하며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중도파와 좌익은 단독선거가 민족을 분열시킨다며 불참했다.

대한노총은 5.10선거에 대비해 48년 3월24일 선거대책위를 만들었다. 한독당, 구 국민당, 한민당계가 대한노총 안에서 대립했지만 결국 전진한을 중심으로 한 확고한 이승만.한민당 체제가 영향력을 발휘해 5.10선거에 적극 참가했다. 5.10선거에 대한노총은 자체에서 12명, 대한농총은 10명의 후보를 세워 대한노총은 1명, 대한농총은 2명을 당선시켰다. 대한노총의 당선자는 위원장 전진한(경북 상주 을구)이었다. 대한노총원임을 안 밝히고 입후보한 인물까지 합치면 5명이다. 이후 전진한은 사회부장관에 발탈돼 위원장 겸임문제로 내분에 휩싸인다.

(2) 5.30선거와 대한노동총연맹

2대 국회를 구성할 총선거가 50년 5월30일 있었다. 대한노총은 50년 3월10-11일 전국대대에서 적극 참여를 결의했다. 대한노총의 5.30 선거강령 대부분이 농민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농민이 인구대다수였던 현실에서 농민표를 의식한 것이다. 결국 대한노총은 노동자들의 권익신장과 정치의식을 높이려고 선거에 참여한 게 아니라 소수 간부들의 권력획득 목적으로 참여한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대한노총 출신 출마자 수는 자료마다 각각 다르다. ‘대한민국선거사’는 41명으로, 한국노총은 4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원장 전진한은 제헌국회에서 당선된 상주 을구를 자기 친형인 전준한(錢俊漢)에게 물려주고, 자기는 부산갑구에 나왔다. 여기서 전진한은 부산의 거물 기업가 김지태(부산일보, 부산mbc 소유), 혁신세력인 임갑수 등 11명이 겨뤄 3등으로 낙선했다. 전진한은 52년 2월5일 보선에서 경남 부산시 무(戊)구에서 당선됐다.
하여튼 50년 5.30선거에서 대한노총은 부위원장 안병성, 홍양명, 조용기, 감찰부위원장 정대천 등 4-5명을 당선시켰다.

(3) 정당조직 운동과 자유당 창당

대한노총 주도세력도 정당조직운동에 적극 가세했다.
대한노총과 대한농총은 처음에 무소속 제헌의원을 중심으로 ‘대한노농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이탈했다. 이후 전진한의 대한노총과 채규항의 대한농총은 48년 10월 24일 공동으로 ‘한국노농당’을 만들었다.
‘한국노농당’은 뚜렷한 활동 없이 곧바로 해체한다. 이후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신당결성운동(한민당을 깨고 자유당 창당)에 휘말린다. 대한노총은 원내자유당파(조방파)와 원외자유당파(정화파)로 양분돼 분열의 극단을 보였다.

정화파(원외자유당)와 조방파(원내자유당)의 분열은 부산정치파동과도 연결됐다. 정화파는 조방내 민의동원본부를 만들어 땃벌데,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이승만이 내놓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킨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며(52.2.18) 테러를 자행하고 국회의원들을 협박했다. 52년 5월25일에는 경향신문사를 습격했다. 이때 전진한 김말룡 이갑성 송원도 우갑린 박중정 임기봉 등은 조방파였다.
51년 12월23일 오전 부산의 국회의사당에서 원내자유당파 오위영 엄상섭 홍익표 윤길중 등 90여 국회의원이 자유당 결당대회를 열었다. 오후엔 원외자유당파가 자유당 발당대회를 열어 이승만을 당수로 추대하고 부당수에 이범석을 선임했다.
자유당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을 표방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을 권력유지의 기반, 자유당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동원세력으로만 간주했을 뿐이다.

4) 이승만과 대한노동총연맹

이승만은 항상 노동자 복지를 립서비스했지만 노동자의 집단투쟁에 강력 반대했다. 노동자 파업에 경찰의 간섭은 “공공의 안정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했고, 거의 예외없이 자본가 측을 지지했다. (윤보선, 장면,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도 이 점에선 이승만과 똑같다. 따라서 이 땅은 60년 동안 사민주의 정권조차도 만들지 못했다.)

대한노총 총재로서 이승만은 대한노총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승만의 유시에 따라 대한노총 조직이 운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조 조직과정이나 대한노총 내분수습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결단과 영향력으로 여러 문제들을 봉합했다. 대한노총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뒷받침하는데 충실했다. 그 단적인 예가 내각책임제 개헌반대투쟁이다.

내각책임제 개헌론이 대두되자 대한노총과 극우 단체들은 50년 2월 15일 ‘전국애국단체연합회’를 만들었다. 대한노총은 50년 2월16일 “개헌안의 실현은 일당독재를 유도할 것이며 민주정치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개헌추진을 적극 반대했다. ‘전국애국단체연합회’는 50년 2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헌반대총궐기 국민대회를 열었다. 동원된 사람들은 대한노총 영등포지구 등 수천 명에 달했다. 대회는 “끝까지 투쟁해 대통령의 심금을 편안케 하여 드릴 것을 맹서한다”는 요지의 이승만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낭독했다. 대회의 결의문은 “국부 이 대통령 각하 영도 하에 일치단결하여 방공태세의 완벽을 기하며 조국수호를 엄숙히 맹서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노동단체가 반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했고, 대한노총은 여기에 부응해 반공투쟁을 지상 목표로 내세웠다. 이는 사이비 노동조직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 통제정책에 적극 부응했다. 노총 내부 분열이 아무리 극심해도 반공투쟁에 관한 한 일사불란했다.
대한노총은 49년 10월22일 대한노총 애국기 헌납위원회를 만들어 노동자 성금으로 국토를 방위할 애국기 도입 자금마련에 앞장섰다. 대한노총은 공휴일을 근로봉사일로 정하고 공휴일에 일한 임금을 49년 12월 15일까지 대한노총에 완납해 반공구국통일을 위한 비행기를 헌납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때 친일자본가들의 비행기 헌납운동을 연상시킨다. 49년 11월 6일 대한노총 목포연맹은 ‘노총호’ 비행기헌납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비행기 헌납금으로 산하 노조 전원이 1인당 100원씩 거출을 결의했다.(동광신문 49.11.9자) 나아가 대한노총은 각 직장에 호국전위대를 만들어 간부훈련소를 개설, 노동자들을 반공 전사로 키웠다.

제3장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의 자유당 예속화

1. 53년 노동법 제정과 대한노총의 조직변화

1) 노동조합법 제정과정

(1) 노동관계법 제정 경위


미군정은 당시 모든 혼란의 궁극 원인이 노동자들의 생간기관 접수관리운동과 그 배후를 조정하는 좌익단체라고 확신했다. 좌익의 노동운동을 규제하려고 만든 법령은 45년 10월30일 공포한 법령 제19호다. 19호는 1조에 ‘국가적 비상시기의 선언’이라고 명시해 좌익색출의 의미를 부여했다. 45년 12월8일엔 파업을 금하고 노동조정위원회(강제조정 중심)를 설치하는 법령 34호 ‘노동조정위원회 설립에 관한 건’이 제정됐다.

46년 7월23일 법령 97호 ‘노동문제에 관한 공공정책.노동부 설치’ 공포는 전평을 깨기 위한 ‘대표노조선거’ 방식을 염두에 두고 만든 법이다. 미군정기 각종 노동 관련 법안은 모두 좌익억압책의 일환으로, 그리고 행정 필요에 따라 마련한 것이다.
당시 군정법령 97호는 ‘민주주의적 노동조합운동을 지도 장려할 것’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적 노동조합’은 우익 노조를 뜻한다.

제헌헌법 정신에 입각한 노동법 제정 움직임은 한국전쟁으로 지연됐다. 전쟁이 치열하던 때에도 노동쟁의는 계속 일어났다. 51년 9월 인천 부두노동자 노임투쟁, 52년 초 조방 투쟁, 52년 영월 도계 장성 은성 화순 등 주요 광산노동자들의 체불임금 투쟁, 52년 7월말 부산 부도노동자 임금인상 투쟁 등이 대표적이다.

(2) 노동조합법 제정 과정

53년 1월 23일 제정된 노조법은 노조의 규약이나 총회 결의내용, 노조의 존속 등에 대해 행정관청의 간섭과 개입권을 인정했고, 단협 체결단위를 공장 또는 사업장, 기타 직장으로 한정해 진정한 산업별 교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한노총에게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2) 노동법 내용과 운용실태

53년 1월23일 노조법, 1월27일 노동위원회법, 1월31일 노동쟁의조정법, 4월15일 근로기준법이 제정됐다.

당시 제정된 노조법은 전문과 4장 52조로 돼 있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 2조 : 노조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며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등을 기하여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조직체 또는 그 연합체
- 6조 : 근로자는 자주적으로 놎를 구성하거나 가입
- 10조: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금하고 그 위반자에게 벌칙을 가함
- 11조: 노조 설립은 자유설립이지만 주무관청에 신고
- 13조: 조합규약이 법을 위반하거나 공익을 해하면 노동위원회 결의로 행정관청은 그 취소 또는 변경을 명할 수 있다.
- 33조: 노조 대표자 또는 위임받은 자의 교섭권 인정
- 34조: 노사는 단협체결을 정당한 이유없이 거부,해태 못함
- 35조: 단협 단위는 공장 사업장 기타 직장단위로 한다
- 39조: 단협 유효기간은 1년

노동쟁의조정법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 5조 1항 : 노사는 쟁의가 생겼을 때 그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쟁의행위를 할 수 있다. 공무원 쟁의행위는 예외로 함
- 5조 2항 : 쟁의 중 폭력이나 파괴행위는 못한다
- 6조 1항 : 안전시설의 정상 유지나 운행을 정지 또는 방해하는 행위와 전국 규모로 확대시켜 국민경제를 심히 위태롭게 하는 것은 쟁의행위로 할 수 없다
- 7조 1항 : 쟁의행위는 행정관청의 알선 또는 노동위 조정이 실패했을 때 할 수 있다.
- 31조 : 쟁의기간 중 쟁의와 관계없는 자를 채용할 수 없다.

노동위원회법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 3조 : 노동위 조직은 중노위와 지노위 또는 특별노동위원회
- 3조 : 위원회 구성은 근로자 대표 3인, 사용자 대표 3인, 공익 대표 3인
- 7조, 시행령 5조 : 근로자위원은 노조에서, 사용자위원은 사용자단체에서 추천한 자 중에서, 공익위원은 공익대표자 중에서 한다. 중노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지노위원과 특별노동위원은 주무부 장관이 임명한다.

근로기준법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 3조 : 근로조건은 당사자간 동등 지위에서 자유의사로 결정
- 4조 : 성별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대우 못함
- 강제노동금지, 중간착취 배제, 공민권 행사 보장 등
- 42조 1항 : 근로시간은 1일 8시간, 주 48시간을 기준
- 50조 : 만 13세 미만자는 사용 못함이 원칙
- 51조 : 여자와 만 18세 미만자는 도덕상 보건상 위험한 사업장에 사용 못함
- 78조 : 업무상 사망, 부상 또는 질병에 걸리면 그 정황에 따라 요양보상, 휴업보상, 장애보상, 유족보상, 장사비 등을 받을 권리 있다
- 27조 :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없이 해고하지 못한다.
- 28조 : 해고시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 지급, 계속근부연수가 10년 이상일땐 10년을 넘는 1년에 대해 60일분의 평균임금을 지급한다

노동관계법 제정은 국가가 노동운동을 통제할 장치를 법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조 설립에서 자유설립을 채택했지만 노조 운영에 국가가 간섭할 가능성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노동법 제정 공포에 따라 대한노총과 산하 노조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산부도노조는 새 노조법에 따라 도.반장 중심의 기성세력이 신분제적 제한선거로 유지하던 것을 넘어 비밀 보통 평등 직접선거로 대의원을 뽑을 수 있도록 규약을 바꾸는 긍정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노조를 직장별 또는 지역별로 구성할 수 있다’는 보사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주도권 쟁탈을 위한 조직 침투공작이 심했다.

자본가는 여전히 법을 무시하고 노조결성을 방해하거나 자기 이해를 대변하는 어용노조를 결성하려고 했다. 자본가들은 노조법을 위반해도 강한 처벌 규정이 없는 점을 악용했다. 단협 유효기간이 1년이라서 기업주들은 고의로 단협을 깼다. 보사부 집계에 따르면 58년 전국 400개 노조에서 단협을 체결한 노조는 68개에 불과했다.
노동위원회는 “소관 행정관청이 관리한다”고 하여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해 늘 정권 입맛에 맞는 결정만 했다.
노동쟁의조정법에서 행정관청이 쟁의가 발생하면 즉시 알선에 착수토록 규정했지만 실제 행정관청은 알선하지 않고 방관했다. 54년 노동쟁의 총 건수 27건 중 보사부가 알선한 건 14건에 불과했다.

근로기준법은 53년 5월10일 공포돼 8월에 실시됐지만 1년이 넘은 54년 10월에도 시행세칙을 만들지 못했다. 근로감독관을 배치하라는 요구는 50년대 후반까지도 지켜지지 않다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에서 8시간 노동을 규정했지만 많은 기업에서 10시간 이상 중노동이 다반사였다. 버스노동자는 하루 18시간 일했다.(경향신문 55.4.22자)
정부직할 기업체에서 임금체불은 심각했다. 석탄공사, 중석, 삼성광업, 대한중공업, 대한전업단 등 5개 정부직할 기업체체불임금이 20억환이었다.(경향신문 58.7.8자)

3) 대한노총의 조직변화

(1) 중앙조직


노조법은 53년 3월8일자 법률 제280호로 공포됐다. 시행령은 53년 4월20일 공포됐다. 법 시행일로부터 석달 내 각 노조는 임원을 다시 뽑고 행정관청에 신고해야 했다.
대한노총은 재조직을 위해 54년 준비위를 구성했는데 이때 정대천(경전노조위원장)파와 이진수(자유노조연맹)파로 분열했다. 정대천 김주홍(철도연맹위원장) 이준수(광산노련위원장) 등은 전국대회소집위원회(전대위)를, 이진수 오차진(철도 출신) 김순태(조방 민주파에서 변절) 등은 전국대의원대회 소집준비위원회(소준위)로 나눴다.

이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이승만의 유시를 받들고 있다며 서로가 정통임을 주장했다.(동아일보 54.3.25자) 집권 자유당은 정대천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진수를 거세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대천은 자유당내 2인자였던 이기붕과 연결돼 있었다. 김두한은 이진수를 거세하려고 이진수를 족청계라고 모함했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이진수에 대한 성토가 있자 중노위는 이진수가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진수가 위원장이던 자유노련을 해산시켰다. 이진수와 함께 53년12월6일 만들어진 자유노련은 자동 해산됐다.

박술음 사회부장관은 54년 3월22일 담화에서 ‘전대위(정대천)가 합법이라며 이를 중심으로 대한노총 중앙조직을 조직하라’고 강조했다. 자유당도 정대천의 전대위가 합법이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대한노총은 54년 4월1일 전대위(정대천) 대회에서 이름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라 바꿨다. 3인 최고위원제를 채택해 정대천, 김주홍, 김두한을 뽑았다. 당시 깡패 김두한은 준비위원도 아니면서 ‘토건(土建)노조’ 출신이라고 엉터리로 말하고 참가해 최고위원이 됐다.(노동운동회고 정담, ‘대한노총 결성전후’7, 노동공론 72년 6월호, 209-210쪽)

이 대회를 기점으로 46년 9월총파업 이후 주류였던 전진한 세력이 대한노총에서 사라졌다. 정대천이 장악한 대한노총은 자유당->이기붕->정대천이라는 라인선상에서 작동했다. 정대천 체제는 58년 김기옥체제가 성립될때까지 자유당의 비호를 받으며 권력을 장악, 유지했다. 54년 전대위 대회의 주요 변화는 사무총장로 규약을 바꾼 것이다. 최고위원제에서 사무상 모든 절차를 사무총장에게 집결시키고 단일화 했다.

대한노총은 대대 때마다 조합비(의무금) 납부를 강력 촉구했지만 납부실적은 부실했다. 조직 운영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 지원 특히 자유당 지원에 의존했다. 이로 인해 대한노총은 점차 자유당에 예속돼 갔고 관권과 결탁한 내부 임원들의 부패로 인해 노조 조직으로서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2) 하부조직

기업주이 노조법 위반이 많았지만 노조 결성에 합법성을 획득한 것은 노조 조직을 확대시켰다. 53년 노조 수 202개에 11만2731명이던 조합원이 1년 후 54년엔 396개 노조 14만2175명으로 늘었다.

2. 50년대 중후반 파벌대립의 양상

1) 50년대 중반기 파벌대립

(1) 정대천 대 이준수의 대립과 연합


46년 9월총파업으로 대한노총 주류였던 전진한이 53년 노조법 제정과 54년 전대위 대회에서 거세되고 정대천 세력이 부상했다.
54년 전대위 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뽑히지 못한 이준수는 55년 8차 전국대대를 앞두고 정대천에게 도전했다. 이준수는 정대천파의 비행을 들추는 방식이었다. 정대천과 이준수의 대립은 55년 4월 8차 전국대대에서 극으로 치닫는다.(경향신문 55.4.3자, 김윤환 김낙중은 현 대한노총 최고위원들이 관권에 타협하고 있다며 비판하면서 6개 산별연맹이 별도의 강력한 산별 노동단체를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55년 4월 1-3일 서울시 문화관에서 대한노총 열린 8차 전국대대는 자유당의 영향력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첫날 정대천 이준수 김용학(철도 감찰위원장, 철도 서울위원장)을 뽑았지만 다음날 사무총장 뽑을 때 출석대의원보다 투표수가 더 많아 부정투표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정대천은 회의진행에 불만을 춤고 전날 뽑힌 최고위원을 사임한다고 말하고 자파 대의원을 이끌고 퇴장했다. 퇴장 뒤 재투표에서 김순태(섬유노련 위원장)이 사무총장이 됐다. 최고위원제에서 사무총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대회 후 정대천은 무자격 대의원 문제로 4월 대회를 부정하고 대대 재소집 공고를 냈다. 김주홍도 정대천과 함께 했다.
이 파벌대립에서 자유당과 정부는 일방으로 정대천을 지지했다. 자유당은 수습책략으로 이준수를 정대천과 합작하도록 하고, 김용학을 고립시켰다. 정대천과 이준수는 55년 9월에 수습대대를 개최했다.(동아일보 55.9.15자 평온리에 진행, 노총 대의원대회 페막) 수습대대에서 정대천 이준수 김주홍(철도 출신)이 최고위원에 뽑히고 김용학은 밀렸다. 김주홍의 등장은 정대천에겐 또다른 라이벌의 등장이었다. 사무총장 선거에선 철도를 배경으로 한 이강연(철도연맹 부위원장)이 경정을 발판으로 한 정대천파 이상진(경전 부위원장)을 누르고 당선돼 김주홍 세력의 강력함을 드러냈다. 이강연 신임 사무총장은 김주홍파였는데 당선 얼마 안돼 55년 10월27일 타살됐다.(미 대사사관 일등서기관 에드윈 크론크가 미 국부부에 보낸 보고서 57.8.29) 이강연이 죽자 총부부장이던 정대천파이 이상진이 사무총장이 됐다. 55년 9월 수습 대대는 매년 4월이던 대대를 10월로 옮기고 임원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2) 정대천 김기옥 김주홍의 대립과 연합

정대천의 강력 라이벌이 된 김주홍(철도노련 위원장)은 57년 전국대대에서 정대천과 치열하게 싸웠다. 정대천은 ①김주홍쪽인 자유노련을 깨려고 인천과 부산에서 조직작업을 벌였고 ②김주홍과 자유당 반대파의 결탁을 폭로하고 ③김기옥과 연합을 시도했다.

김주홍은 대한노총 최고위원이란 자리 때문에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김주홍은 정대천과 달리 자유당과 밀착하지는 않았다. 김주홍은 민주당 유진산 의원, 노농당 당수 전진한 등 자유당 반대파와 라인을 갖고 있었다.
57년 2월 김주홍은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을 다녀온 뒤 4월29일 귀국해 57년 5월7일 “노동운동의 경제적 자립과 정치중립”을 주장했다.

김주홍이 실제 대한노총을 자유당으로부터 독립시키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김주홍과 연결된 유진산 미니주당 국회의원이나 노농당 당수 전진한은 대한노총을 만들때부터 상당히 기여한 인물로 대한노총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을 것이다. 김주홍은 자유당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김기옥은 54년 10월 부산통합부도노조 위원장 겸 통합자유노련 위원장으로 뽑혀 입지를 넓혀갔다. 50년대 대한노총 조합원은 대략 20만명 정도였다. 이 가운데 자유노련은 57년 7만명을 넘어 58년 7만9468명으로 대한노총 전체의 1/3이상을 차지했다.

정대천이 사용한 ① 전술은 실패했다. 정대천은 ②③의 전술을 사용한다. 정대천은 김주홍이 자유당 반대파와 연결돼 있다는 걸 자유당 고위관료에게 폭로했다. 정대천은 김기옥에게는 최고위원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해 김기옥은 정대천과 연합해 57년 전국대대에서 김주홍과 붙었다.
대한노총 57년 10월 25-26일 서울 서대문 농업은행(지금의 농협중앙회)에서 열린 전국대대는 민의우너 선거를 앞둔 중요한 대회였다. 대대는 파란을 일으켰다. 최고위원 선거에서 김주홍(철도위원장) 성주갑(경남 위원장) 하광춘(섬유 위원장)이 당선됐다. 정대천은 김기옥과 연합했는데도 김주홍에게 참패했다. 정대천파의 이상진 사무총장도 떨어져 이준수가 사무총장이 됐다. 정대천파의 차국찬 선전부장도 배제됐다. 김주홍은 철도 출신 강태범을 총무부장에, 유기남을 조직부장에 뽑아 조직세를 과시했다.

(3) 정대천 김기옥의 연합

패배한 정대천 김기옥은 대회를 부정하고 바로 57년 10우러 26일 농업은행 강당에서 별도 대회를 열어 김주홍 성주갑 하광춘이 모두 비자유당 인물이라서 자유당 기간단체인 대한노총을 운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57.10.27자)

정대천은 철도쪽 부정대의원 16명의 문제를 제기하며 대한노동조합총협의회(이하 대한노협) 결성준비위를 별도로 구성했다. 김주홍은 이런 비난을 일축했다. 정대천은 대한노협 결정준비위 성명에서 김주홍 성주갑 하광춘을 ‘노동 브로커’ ‘사이비 노동운동자’로 규정했다. 이때 정대천은 전업, 광산, 자유노련(김기옥)의 지원을, 기미주홍은 철도, 섬유, 경남노련의 지원을 받았다. 양파벌의 세력은 거의 대등했다. 이런 세력균형은 대립을 더 격화시켰다.

경향신문은 대한노총의 분열을 사설로 비판했다. “(정대천) 성명을 빌어말하자만 백만 노동자를 희생으로 팔아서 자신의 비대를 꾀하는 불순한 지도분자들 때문에 일어나는 내분이라는 점만은 긍정하고 싶다”(경향신문 57.10.30자)
수습을 위해 보사부장관과 노동국 관계자, 경찰수뇌가 비밀회합했다.(경향신문 57.10.29자) 55년처럼 정대천파가 다시 장악하도록 57년 10월 대대를 백지화하고 재소집을 유도하는 쪽으로 논의했다. 자유당은 대한노총을 자기 영향 하에 두기 위해서 정대천이 필요했다.

정대천(김기옥)과 김주홍간 대립은 57년 12월2일 양측 3명씩, 보사부 장차관, 노동국장의 회동으로 57년 12월 19-20일 대대를 재소집하기로 합의해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정대천파가 일방으로 대대 소집공고를 내 합의는 다시 깨졌다. 분열은 극으로 치닫고 보사부는 12월10일 부정대의원 문제로 10월대대를 무효라고 발표했다. 부정대의원 문제는 양파벌 모두 있었다. 그런데도 자유당은 정대천을 싸고 돌았다. 보사부는 12월 13일 양측을 재소집해 예정대로 대대를 다시 열어 최고위원을 3명에서 5명으로 늘려 뽑기로 합의했다. 이 통합대대는 57년 19-20일 경기도청 강당에서 열렸다. 선거 결과 정대천 김기옥 하광춘이주기 김용학(철도에서 55년 제명당한 놈)이 뽑혔다. 정대천 김기옥 연합이 성공하고 김주홍이 패했다. 김주홍은 자파에서 5명의 최고위원 중 하광춘 한 명만 건졌다. 이 하광춘마저 나중엔 정대천쪽으로 돌아섰다. 정대천이 자유당 정권의 비호속에서 다시 대한노총의 권력을 잡았다. 김주홍은 57년 12월21일 “나는 속았다”고 밝혔다. 김주홍은 철도 출신 김용학이 55년에 이미 철도에서 제명당한 인물이라며 이의제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2) 50년대 후반기 규약개정운동과 김기옥 체제

(1) 규약개정운동


57년 12월 통합대대에서 정대천과 엽합해 최고위원이 된 김기옥(부산부두 출신으로 자유노련 위원장)은 58년 전국대대를 앞두고 정대천에 반감이 있는 김주홍과 연합했다. 김기옥은 광산연맹 위원장 이주기까지 흡수해 규약개정운동을 벌였다.

김기옥의 규약개정운동 내용은 최고위원제를 위원장 중심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대한노총은 다시 규약개정파와 규약사수파로 나눴다. 규약개정파는 김기옥 김주홍 이주기였고, 사수파는 정대천 김용학 하광춘이었다.
대한노총은 58년 10월8일 상집에서 58년 전국대대를 10월 29-30일 부산에서 열기로 결의했다. 이에 정대천 하광춘 최고위원은 부산대회를 무기연기한다고 공고해 버려 양측은 충돌했다.

규약개정운동은 자유당의 절대 지지를 받던 정대천 세력을 내몰기 위한 것이었다. 김기옥은 규약개정운동이 정대천의 권력을 축소하기 위한 것임을 인정했다. 정대천 하광춘 김용학은 부산대회 무기연기를 주장한 반면 집행위원 13명 중 9명이 대회개최를 선언해 정대천은 절대 불리했다. 정대천은 자유당과 보사부장관에게 원조를 소호했지만 김기옥의 맞대응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자유당은 “부산대회는 예정대로 열되 규약개정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강제조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자유당은 경찰을 동원해 옥내집회도 허가제였던 당시 상황을 이용해 부산대회 허가 취소를 언급했다. 결국 김기옥은 절충안을 겉으로는 받아들여 예정대로 대회가 부산서 열렸다.

대한노총은 58년 10월29일 부산 국제극장에서 11차 전국대대를 열었다.(경향신문 58.10.30자) 시작부터 미군노조 대의원 15명 자격문제로 시비가 붙었다. 김기옥 이주기의 긴급동의로 규약개정안을 논의에 붙이자 안건채택문제로 양측은 격돌했다.(조선일보 58.10.30자) 안건채택 여부 투표에서 재석 대의원 470명 중 340명의 절대다수가 찬성해 규약개정안이 상정돼 가결됐다.(경향신문 58.10.31자 노총대회 일대 수라장화 / 1인지도제 규약수정 가결 / 김기옥씨파서 승리)
이어 임원선거에 들어갔다. 김기옥이 압도 다수로 위원장이 됐다. 김기옥 김주홍 연합이 성공했다. 이때 김기옥의 자유노련은 전체 대의원 558명 중 159명을 차지하는 거대 조직이었다. 김주홍의 철도도 3위의 조직세로 막강했다.

(3) 파벌대립의 성격

단위노조 대부분이 조합비(의무금)를 제대로 내지 않았기에 부정대의원은 어느 대회에서나 늘 있었다.

54년부터 58면 10월 대회전까지 정대천의 독주가 이어졌다. 정대천이 대한노총에서 세력을 유지한 배경은 자유당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이다. 정대천은 최고위원 지위를 이용해 자유당의 지시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지사나 명령에 앞서 자유당에 과잉 충성해 일반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자유당은 줄곧 정대천을 지지했다. 55년 4월 대대에 불만을 품고 대회장을 퇴장한 정대천을 일방으로 지지해 대회 재소집토록 배후작업을 펼친 것도 자유당과 정부였다.

50년대 중후반기 파벌대립은 이합집산이 심했다. 파벌대립의 원인은 첫째 대한노총과 자유당의 구조적 관계 때문이다. 대한노총 최고위원이면 자유당 간부가 되고 자유당 공천후보로 민의원에 출마해 정치로 나갈 등용문이 됐다. 따라서 대한노총 중앙간부라면 서로 앞다퉈 최고위원이 되려고 했다. 둘째 대한노총의 태생적 한계다. 노동자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한노총 지도자들은 정치와 이권에 보다 쉽게 접근하려고 그 통로 대한노총을 활용했다.
58년부터 대한노총 권력을 잡은 김기옥도 이같은 구조를 잘 알고 있어,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유당과 밀착했다. 김기옥 체제가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와 비서실장인 박찬일을 매개로 이승만을 접견해 58년 부산대회를 성사시킨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노동운동회고 정담, ‘대한노총 결성 전후10, 노동공론 72년 10.11월호, 149쪽)
김기옥도 이전의 정대천 전철을 되밟았다. 59년 10월 전국대대에서 김기옥이 채택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년 정부통령선거를 성공으로 수행하기 위해 우리들은 노동자 농미니의 정당인 자유당에서 추대한 정부통령 후보자의 당선을 위해 총역량을 주입하고 평소에 송경하옵든 각하를 지지하는 열의를 다시금 가다듬는 바입니다”고 이승만에게 충성명세했다.

3. 조직체계

1) 조직체계


대한노총은 58년 전국대대때 규약에서 위원장제를 규정하고, 제17조 2항에 “부위원장은 조합원 1만명을 초과하는 전국 산업별 직업별 노조연합체에서 1명씩과 도단위 지역노조연합체에서 1명을 대회에서 선출한다”고 했다.
혁신파가 비판했던 지역별 조직체계도 50년 내내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규약상 조직구조가 산업별 지역별 체제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산업별 조직이 기능하지는 않았다. 58년 규약에서는 정치위원회 대신 정치부를 신설했다.

2) 조직현황

‘보건사회통계연보’를 근거로 대한노총 노조 수와 조합원 수를 보면 노조는 55년 562개에서 58년 634개로 오히려 늘었고, 59년에 558개로 다시 줄었다.

조합원은 55년 20만5511명에서 59년 28만438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조합원 수는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우선 정부통계가 엉망이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부정대의원 문제처럼 각 단위노조가 연맹에, 연맹이 대한노총 중앙에 조합원 수를 부풀렸기 때문이다. 자파 대의원 수를 의도적으로 과장해 주도권 싸움을 벌인 이들이고 보면 조합원 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4.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의 활동상

1) 사이비 노동활동


53년 9월 대한청년단이 해체돼 각 직장에서 청년단 조직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보도연맹도 전쟁을 거치면서 집단학살돼 조직이 무너졌다. 따라서 각 직장에는 노동활동의 제약요인이 사라지고 노동조직만 남아 노조활동에는 유리했다. 또 노동법이 제정, 실시돼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여건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한노총 간부들은 이런 조건을 활용해 명실상부한 노조조직으로 거듭날 기회를 포기했다. 간부 대부분은 대한노총 조직을 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으로 삼았고, 노동활동은 항상 뒷전으로 밀어넣고 오로지 헤게모니 쟁탈전에 여념이 없었다.

노총이 최저임금제 8시간노동제 등을 여러 차례 결의했지만 공문구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조직내 파벌대립은 노동쟁의에 자주 해악을 끼쳤다. 54년 7월1일 부산의 제3부두에서 군화작업을 담당하던 극동운수(주)의 하역권이 조선운수(주)로 넘어가자 노총 내 조직분규가 일어났다. 54년 7월3일 대한노총 최고위원이며 국회의원인 김두한 김익기 정대천 김주홍이 부산에 급파됐으나 아무 성과를 내지 못했다. 7월12일 다시 부산에 내려온 대한노총 최고위원 김주홍과 제3부두 노조 위원장 손우생이 김기옥을 유인해 테러를 가하는 극한 상태가 벌어졌다. 이 조직분규는 김희봉 중심의 기조존직과 조선운수로부터 재정 뒷받침을 받는 신진세력인 김기옥파간에 벌어진 내적 조직분쟁이었다. 여기에 대한노총의 중앙이 개입해 테러를 저질렀다. 조선운수와 교섭권을 확보한 신진 김기옥파는 결국 승리했다.

대한노총은 56년 5월 대구 대한방직 쟁의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기업주의 횡포로 불법 해고되고 있는데도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 헤게모니 투쟁만 몰두했다. 대한노총은 대한방직 쟁의때 상집을 열어 “전국적 파업을 단행”한다고 성명을 냈다. 그러나 겉치레에 불과했다. 대한노총은 전국파업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하는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였다.(동아일보 56.6.3자)

58년 10월29일 부산 국제극장에서 열린 전국대대에선 대한방직파업을 깨기 위해 회사와 연계돼 있던 대한방직의 어용노조 위원장 고일하를 조사통계부장으로 임명해 노동자 파업을 깼다.
나아가 대한노총은 노동자의 권리신장은커녕 중간착취기관으로 기능했다. 보다못한 보수언론이 이런 꼴을 비판하자 반성은커녕 언론사에 폭력을 행사했다. 조방감사 국회보고서에 따르면 조방의 어용노조 간부들이 강일매사장 문병금을 노동자에게 갹출해 사장에게 주고 그 일부를 노조간부가 착복하는 이리도 있었다.(경향신문 55.5.28자) 55년 9월 동아일보는 대한노총 철도노조를 근로자의 중간착취기관이라고 비판보도하자 대한노총 산하 철도노조는 9월7일자 동아일보의 지방수송을 일제 거부하였고 또 경전노조원은 동아일보사의 송전을 중단했다.(경향신문 55.9.9자)

대한노총은 사용자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고용주인 회사에서 조직한 어용노조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 대한방직 투쟁때도 그랬고, 조선운수의 어용조조를 지지하기도 했다. 보다못한 보사부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노총의 태도는 아마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56년 7월 11일자 사설에서 이런 대한노총의 꼴을 보고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를 악이용하여 노총간부의 이름으로 동료 노동자들에게 압력을 주거나 다른 정치세력의 앞잡이 구실을 하여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더럽히는 결과가 된다면 이런 노동운동은 차라리 없느니만 같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조선일보 56.7.11자 사설 : 노동조합과 이에 역행하는 노총)

대한노총은 55년 5월21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자유노련 4차 총회에 양파벌의 대표 정대천 이준수를 보냈다. 이때 자유당 국회의원 황성수가 동반했다. 55년 5월 20일 정용욱이 펴낸 책 ‘JOINT WEEKA’ 5권 157쪽에는 “황성수를 감시인(WATCHDOG)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유당 정권은 노총 지도자들이 외국 노동운동 견학을 제한했다. 갔다오면 외국 사정을 보고 크게 노동운동에 고무돼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2)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와 정당관계

대한노총은 양대 파벌의 중심인물인 전진한, 주종필이 52년 대회에서 이승만의 지시로 제거되면서 이전보다 더 정치권력에 밀착했다. 50년대 대한노총은 정대천에 의해 주도됐는데 정대천을 매개로 대한노총은 자유당과 주종관계가 형성됐다. 대한노총 분파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받고 있음을 곳곳에서 과시하는 충성경쟁을 보였다.

이승만의 담화에 따라 자유당은 대한노총 분열을 그때마다 압력으로 넣어 해결했다. 정부수립 초기나 자유당 초기엔 대한노총 분열 해결에 이승만이 직접 나섰지만 54년 5.20 선거를 거치면서 이승만.이기붕 체제가 들어서자 자유당에서 맏아 처리했다. 이때 주로 이기붕이 주도 역할을 했다.
50년대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기간단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그러나 이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우선 기간단체에서 ‘기간’은 어떤 조직에서 매우 중요한 ‘으뜸’이 되거나 중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대한노총은 자유당에게 중심도 으뜸도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기 주요 논객이었던 최석채는 <서민의 항장>(범조사, 1956, 220-222쪽)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숙어로 ‘기간단체’란 말이 자주 쓰인다. 자초는 언제부터인지 확실히 기억에 없으나 아마도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농민회 등 4대 대중단체가 자유당의 기간단체라고 불리워지는데서 오는 정치용어인 것만은 틀림없다.(55.5.11)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기간단체 산하단체가 아니라 자유당 권력에 복무하는 ‘예속단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중석은 정당의 기간단체라는 말이 정당운영이나 정책작성에서 일정한 발언권을 갖는다는 걸 뜻한다면 대한노총은 한번도 기간단체인 적이 없으며, 다만 권력에 복무하여 노동을 통제하고 권력의 필요에 따라 동원되는 자유당의 하부조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비, 1999, 505쪽)

대한노총은 노동단체로서 자율성을 잃고 자유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 동원체로 전락했다.
자유당의 재정 지원은 대한노총의 존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자유당은 대한노총이 본부건물을 사용하도록 허용했고 그 건물이 조직을 위한 수입의 원천이 되도록 빌려주었다. 55년 9월18일 창당된 민주당은 “정당 사회 노동단체 경제단체의 관제화 배격”을 정책으로 내세웠다. 민주당은 결성때부터 강도 높게 대한노총을 비판했다. 민주당의 56년 5월1일 노동절 성명은 “개인 또는 1개 정당의 정치적 이용도구가 된 것은 한국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유감천만”이라고 지적하면서 “관제에 빼앗긴 노동운동을 노동대중 자신의 손에 탈환함으로써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 향상하기 위한 노동운동의 본질에 돌아갈 결의를 굳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한노총내 일부는 56년 10월 노총 전국대대에서 반자유당 결집으로 세력화를 시도했다. 전국해상노련 이종남 위원장이 이종성 섬유노련 위원장을 포섭하고, 김기옥 김주홍이 이에 동조했지만 김주홍의 우유부단함으로 실패했다. 57년 전국대대에서도 자유단 반대파 결집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3) 자유당을 위한 정치활동

노조는 노동기본권의 확립을 위해 각종 사회경제정책의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따라서 노조의 정치활동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대한노총의 정치활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 대한노총의 정치활동은 이승만.자유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것이었고, 소수 몇몇 지도부들의 정치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

54년 총선에서 대한노총은 정대천 김두한 최고위원등 6명을 당선시켰다.
자유당은 56년 5월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에 이승만은 3선은 “민주주의에 배치되니 다른 인물을 내세우라”는 요지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승만 자신은 사사오입 개헌에 책임이 없고 집권연장을 위한 불법은 안 할 사람으로 보이려는 제스추어였다.(김낙중, 한국노동운동사- 해방후편, 청사, 1982, 231쪽)

대한노총 최고위원이고 전업노련 위원장인 정대천은 56년 3월6일 조합원들 동원해 ‘이승만 대통령 재출마염원 데모’를 벌였다. 대한노총은 3월 12일 긴급회의를 열어 “이승만이 대통령 재출마하지 않으면 3월13일 낮 12시 교통부문 총파업 단행”을 결의했다. 대한노총 전국대표자 60여 명은 “재출마 하지 않으면 직장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겠다”는 탄원서를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56년 3월13일 대한노총 경전노조를 시작으로 시내 전차가 낮 12시부터 2시간 동안 모두 멈췄다. 대한노총은 우마차까지 동원,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때문에 민의가 아닌 ‘우의(牛意) 마의(馬意) 데모’라는 조롱이 나왔다.

대한노총은 60년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해 제12차 전국대대에서 이승만 이기붕의 다시 정부통령 지지를 결의했다. 대한노총 경북연맹도 60년 2월 8일 2차 대대에서 이 결의를 받았다. 정대천이 위원장인 경전노조는 59년 12월 2일 임시대대를 열어 이승만 이기붕 당선에 총역량 집중을 강조했다. 대한노총은 60년 3.15 선거를 맞아 산업별 지역별 직업별 노조를 통해 조합원에게 부정선거를 지시했다. 대한노총 간부들은 자유당으로부터 수억 환의 선거자금을 받아 횡령했다.(조선일보 61.2.12자, 노총간부에 체포령, 부정선거자금도 횡령)

제4장. 노동운동의 새로운 희망과 좌절

1. 새로운 노동운동의 전개


대한노총 중앙조직이 자기역할을 안 하고 헤게모니 투쟁에 집중했을 때 하부 단위노조는 노동법 제정에 힘입어 각종 임금, 8시간 노동제, 노조결성 투쟁 등을 전개했다. 57년 45건(9394명 참가)이던 쟁의는 59년 95건(4만9813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이 투쟁들은 임금인상과 체불임금 투쟁이 압도 다수였다.

이 시기 투쟁의 특징은 철도 전기 체신 전매 등 국영기관과 석탄공사 조선공사 등 공기업 쟁의에는 탄압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반면 자유당 정권의 정치자금 염출이나 권력지택에 필요한 이해관계와 직결된 쟁의는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조방, 대구 내외방직,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대표 사례다.

특히 대구 대한방직 쟁의를 주목해야 한다. 대한방직은 조방의 대구공장이었다. 55년 5월 자유당 재정부장 설경동은 조상의 강일매 사장으로부터 대한방직을 받았다. 이때 설경동은 종업원 2600명을 일방 해고했다.(김낙중, 한국노동운동사- 해방후편, 청사, 1982, 203-207쪽) 이때 대한노총 경북연맹은 어용적 태도를 보였다. 노동자들은 반발해 대한노총 대구연맹을 만들어 김말룡을 위원장으로 뽑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의 주축이 됐다.

50년대 후반 민주노조 운동을 전개하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58년 전국대대에서 김기옥이 규약을 고쳐 위원장 1인 독재체제를 수립한 걸 계기로 투쟁했다. 김말룡(대구연맹)과 노응벽(석탄광연맹)은 58년 11월11일 보사부장관에게 규약개정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이의신청했다. 그러나 묵살됐다. 이 분쟁은 법원으로 옮겨가 분쟁은 계속됐다. 김말룡은 ‘규약개정’은 총회나 대대 결의사항이라서 2주 전 공공해야 하는데도 그 절차를 지키지 않고 당일 규약을 상정해 표결하는 불법을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또 최종자(부산연맹)와 김관호(대명광업노조)은 58년 8월27일자 보사부 장관 명의의 명령에 따르면 십장과 반장 위주로 구성된 노조는 노조법에 저촉되는데도 부산부두노조와 인천부두 중심의 자유노련 대의원이 전원이 이에 해당하는 ‘불법대의원’이라고 주장했다. 최종자 김관호는 김기옥 위원장 등 부산부두노조 간부 전원은 조합원의 노임을 중간착취하는 도반장, 십장, 반장이라서 근기법 36조와 3조의 중간착취배제 조항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부산부두노조와 인천자유항만노조는 노조법 3조를 어긴 노동단체라는 것이다.

김기옥은 59년 10월 전국대대를 앞두고 7월31일 대구에서 중집을 열어 김말룡 노응벽을 제명하고 분열을 조장한 정대천에게 경고했다.
반 김기옥파는 59년 7월 31일 대구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한노총 중집에서 ‘김기옥의 노임횡령사건’을 들어 김기옥 등 대한노총 간부들을 불신임시키려고 공작을 전개했다. 이를 알아차린 김기옥은 반대파인 부산부도노조 부위원장 김용후와 정한주 조직부장을 경찰이 연행해 회의에 못 오도록 했다.(김낙중, 한국노동운동사- 해방후편, 청사, 1982, 248쪽)

2.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 결성

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준비위원회


58년 대대에서 김기옥 1인체제가 성립하자 대한노총 분열은 극단으로 치달아 반 김기옥파가 대한노총과 별도 노조중앙조직을 결성하려고 했다. 59년 7월 김기옥의 중집결정에 맞서 반 김기옥파는 대구 천일여관에서 모였다. 집행위원과 산별대표자 등 90여 명이 모여 대한노총 탈퇴를 결의했다. 이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를 만들고 김정원 김성환 김말룡 한기수 신현수 노응벽 김규성 김영태 김경호를 준비위원으로 뽑았다.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의 정대천은 59년 8월14일 “김기옥이 이끄는 노동단체는 불법인 만큼 참 노동운동을 위해 23개 연맹이 대한노총에서 탈퇴하겠다”고 성명 발표했다.(동아일보 59.8.14)

김기옥 중심의 대한노총과 전업노조 위원장 정대천 중심의 전국노협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59년 10월 대한노총 전국대대를 앞두고 치열하게 성명전을 벌였다.
김기옥은 경전사장이 정대천 노조위원장과 짜고 천인공노할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렀다고 규탄했다. 또 정대천의 사돈을 전차과장에 뽑고 정대천을 지지하지 않는 전차감독 100여 명을 일시에 좌천시켰다고 주장했다.

58년 전국대대에서 김기옥과 연합해 사무총장에 뽑혔던 이주기가 전국노협으로 넘어왔다. 이주기는 대한노총 사무총장직 사퇴성명에서 김기옥 중심의 대한노총의 부패 타락상을 폭로했다. 김기옥이 한국운수에서 3.7제의 노임협약을 위반하고 노임을 횡령했고 397만환의 부두노동자 노임을 횡령 착복했다고 주장했다.

전국노협은 김기옥이 주도하는 전국자유노련을 주공격대상으로 설정했다. 자유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한 자유노련이 십장제, 반장제 같은 중간착취제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노협 설립준비위는 김말룡 대구연맹위원장, 김정원 광산노련 위원장, 김관호 광산노련 부위원장, 최종자 부산연맹 위원장, 노응벽 석탄노련위원장, 경전노조의 정대천 이상진 등이 중심이었다. 57년 10월26일 대한노협 결정준비위때 참여했던 세력이 대부분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에 들어왔다. 57년 대한노협 결성준비위는 57년 10월대회에서 김주홍에게 패한 정대천이 김기옥과연합해 구성한 것이다. 그때는 김기옥과 정대천이 연합했지만, 전국노협 설립과정에선 김기옥과 정대천은 대립했다.

전국노협의 임원 구성에 부패의 장본인이던 어용세력(정대천)과 이에 저항했던 세력(김말룡)이 하나로 뭉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정대천은 장기간 누리던 대한노총에서의 지위를 김기옥에게 뺏긴데 대한 반감으로 반 김기옥 투쟁을 선언했다. 반면 김말룡 김관호 최종자 노응벽 등은 노조운동의 민주화, 대한노총의 자유당으로부터 독립을 지향했다. 전국노협 준비위는 반 김기옥으로 뭉쳤지만 헤게모니 쟁탈에 성공한다면 언제든 내부분열의 여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김말룡 중심의 신진세력이 왜 정대천과 연합했을까. 김말룡과 정대천은 51년 12월 조방쟁의 때부터 같은 조방파로 관계를 맺었다. 김말룡이 부패 장본인인 정대천과 연합한 것은 신진세력들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2)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 결성

자유당은 반 김기옥파가 전국노협 설립준비위를 구성하자 적극 분쟁해결에 나섰다. 보사부도 적극 해결에 나섰다. 59년 9월3일 정대천 김기옥 김주홍은 “과거 모든 분규는 ‘백지환원’하고 대한노총 깃발 밑에 대동단결한다”는 화합 성명을 냈다. 전국노협은 ‘백지환원’을 현 대한노총 간부진의 총사퇴로 해석했고, 대한노총은 대대에서 경전노조 등 몇몇 조직만 제명시키면 된다는 석으로 이해했다.

전국노협은 대한노총이 59년 10월7일 전국대대를 열자 즉각 불법으로 지적, 대회를 부인했다. 전국노협은 59년 10월26일 서울 세종로 태화관에 대한생사노조 등 14개 노조 21명이 모여 결성식을 열었다.(동아일보 59.10.27) 전국노협은 이날 임원선거에서 의장제를 채택하고 김말룡 의장을 뽑았다. 임원 구성을 보면 준비위때 구성과는 현격히 다르다. 전국노협 준비위에 가담했던 어용들이 자신이 없어서 많이 이탈했다. 새로 전국노협에 편입된 임원 중 한몽연은 어용 전업노조 결성으로 분규가 심했던 50년 2월 당시 노동국 조정과장이었다. 또 새 인물 배형은 대구 대한방직쟁의때 어용노조 위원장 고일하를 물리치고 위원장에 뽑혀 사장 설경동에 맞서 투쟁한 인물이었다.

전국노협 정식 결성에 대거 이탈자가 생긴 건 정부와 자유당의 탄압 때문이다. 행정당국은 전국노협을 유령단체로 보고 전국노협에 가담한 인물들을 탄압했다. 정대천은 자유당에 의한 김기옥파의 화합공작에 밀려 점차 전국노협에서 발을 빼고 대한노총으로 포섭당했다.
59년 8월11일 준비위에 24개 노조 32명의 대표가 모였다. 그러나 59년 10월26일 결성때는 14개 노조 21명의 대표로 크게 줄었다. 광산노련 김정원 위원장, 김관호 부위원장, 석탄광노련 노응벽 위원장, 최종자 부산연맹 위원장이 전국노협에서 이탈했다.

3) 전국노협 결성 의의

전국노협은 밑으로부터 민주적 개편을 통해 각 단위노조를 기반으로 한 상향적 조직방침에 따라 새 형태의 새로운 노동단체를 구성했다. 전국노협은 기업주의 앞잡이로 노임을 횡령 착취하는 부두 십장들과 대구 대한방직노조처럼 쟁의를 스스로 파괴해 노조를 불법점거한 고일하 어용노조 위원장 무리들과 구분된다.

전국노협의 결성식에서 “대내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부패된 노총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노력해 왔으나 그것이 헛수고였다. 부두십장들과 쟁의파괴자 등 기업주의 주구들이 중심인 대한노총과 결별해 새로운 전국조직체를 마련코자 한다”고 밝혔다. 또 전국노협은 특정 정당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편파 태도를 지양하고자 했다.
전국노협은 대구 대한방직 투쟁에서 어용 짓을 벌인 대한노총 경북연맹에 반발해 만들어진 대한노총 대구연맹의 김말룡이 주축이었다. 당시 김말룡은 대한방직 쟁의때 대구연맹 위원장으로 쟁의지도에 헌신했다. 노동자 투쟁 속에서 대한노총의 어용성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대구 대한방직 쟁의는 조방쟁의와 더불어 50년대 노동운동의 중요한 획을 그었다.

반 김기옥파는 50년대 중반 이후 대한노총의 어용성에 불만을 갖던 노동자 세력을 중심으로 모였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 다른 일면이 있다. 전국노협은 이후 노동운동의 자주와 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다.
전국노협은 자유당 정부에서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조직 약세와 자유당의 탄압으로 60년 4월혁명 전까지 뚜렷한 활동을 벌이지 못했지만 4월혁명이란 열린 공간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3. 4월혁명기 노동계의 변화

1) 대한노총 과도체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대한노총내 기존 집권세력은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발표했다. 이는 대한노총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보려는 얕은 의도였다. 4월혁명때 대한노총 위원장 김기옥이 발표한 결의문엔 이승만의 하야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이기붕의장은 책임을 지고 당선된 부통령직은 물론 일체의 겸직을 사퇴하라”고 밝혔다. 김기옥은 이기붕을 날리는 선에서 사태를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안이하게 봤다. 대한노총은 60년 4월25일 위원장 김기옥 명의로 “부패된 정치를 일신하고 누적된 폐습의 광정과 침전된 도의의 선양을 통감”한다고 결의문에 썼다.

그러나 대한노총의 하부조직 노동자들은 대한노총의 자유당과의 절연만으로 그동안 보였던 어용성 부패성을 청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노동계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위원장 김기옥 규탄운동으로 나타났다. 60년 4월26일 부산 부두노동자들은 어용간부 축출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고 김기옥의 집을 급습해 규탄시위를 감행했다. 4월27일엔 부산역앞 부산부두노노 사무실에 노동자 200여명이 몰려가 노조 간부를 상대로 “노동자임금을 착취한 자를 처단하라” “90년 추가노임을 내놔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간부들을 집단폭행했다.(경향신문 60.4.27) 또 대한노총 부산부두노조는 60년 5월1일 긴급회의에서 9명의 노조운영대책위원을 뽑았다. 대책위는 노동자들의 자발적 규탄시위로 김기옥 위원장과 간부들이 도피하거나 행방을 감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였다.

대한노총 고문 정대천(경전)과 김주홍(철도)은 60년 5월2일 정식 사임했다. 김기옥 위원장도 5월3일 위원장직을 사임했다.(조선일보 60.5.3, 동아일보 60.5.5)) 대한노총 내 김기옥 반대파는 수습위를 조직해 다른 임원들의 사임을 촉구했다.(동아일보 60.5.6) 수습위는 간부 총사퇴 후 과도체제를 운영하다가 새 임원을 뽑아 대한노총을 재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은 수습위의 이 같은 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노총은 재발족을 위해 60년 7월22일 김주홍 성주갑 중심의 전국대대 소집준비위를 구성하고 60년 8월 7-8일 대회소집을 공고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대회를 열 상황도 아니었다. 간부 대부분이 도망가고 대한노총에는 광산과 전매 2개 조직 대표만 현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대한노총은 내부 권력다툼으로 분열했다. 광산과 정비중이던 전업노조가 뭉쳐 소집준비위와 달리 9.10월에 대대를 따로 열자고 했다.
산하 노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대한노총은 대회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성주갑 중심의 대한노총 수습준비위는 60년 9월 김말룡의 전국노협과 통합을 결정했다.

2) 전국노협과 제3세력

전국노협은 4월혁명의 여세를 몰아 대한노총의 어용성 비민주성을 집중공격하고 조직화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60년 7월29일 총선까지 노동계는 김말룡 중심의 전국노협, 성주갑 김주홍 등 대한노총 잔존파로 나뉘었다. 총선 직후 전진한 김두한 중심의 제3세력이 등장했다.
원래 전진한과 김두한은 미군정기부터 긴밀했다. 대한민주청년동맹(민청/유진산이 만듬)의 감찰부장 김두한의 반공활동은 대한노총 조직확장에 지대하게 공헌했다. 미군정기 대한노총과 우익청년단(김두한)의 공조 속에 두 사람은 긴밀해졌다. 민청 회장 유진산과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은 개인적으로 돈독한 사이였다. 이에 전진한이 만든 노농당(55.2.15 결성)에 김두한이 참여하기도 했다.
60년 7.29 총선 이후 전진한 김두한은 한때 대한노총을 무력 접수하려고 했다. 60년 9월5일 대한노총 본부 사무실을 김두한이 점거하고 전 대한노총계 인사들을 추방했다. 김두한은 9월7일 자진 해산했다. 이들 제3세력은 사회적 혼란을 틈 타 무력에 의존하는 전횡을 재연시켰다. 대한노총 본부 난입사건 이후 김두한은 노동계에서 사라졌다. 전진한은 통합대대에서 조직된 한국노련을 부정하고 제2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만들었다.

3)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결성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은 60년 9월13일 대표간 통합에 합의했다. 전국노협이 대한노총과 통합하고자 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한노총 대표 성주갑과 전국노협 대표 김말룡은 60년 9월 14일 ‘10월 통합대회’ 개최에 합의했다.
60년 10월1일 전국노동단체통합대의원대회가 열렸지만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명칭 문제로 ‘대한노총’이냐 ‘한국노련’(한국노동조합총연맹)로 싸우다 회의가 중단돼 무기휴회가 선언됐다.

60년 11월 25-26일 통합대회를 다시 열었다. 이때 명칭을 한국노련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강령 규약 등 수정을 놓고 싸우다가 임원선거에서 걸렸다. 27일까지 하루 더 연장해 임원선거에서 최고위원제, 위원장제, 중앙이사회제 등 3개를 놓고 싸우다가 절충안인 중앙위원회제를 택하고 김말룡 이규철 이인곤 전병민 성주갑 김정원 등 13명의 중앙운영위원을 뽑았다. 이때 불만을 품은 전국자동차노련의 김종화는 대회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다. 중앙위원 외에 의장 부의장 사무총장 선출을 놓고 직선제파와 간선제파가 또 싸워 폭력으로 번졌다. 결국 김말룡은 정회를 선포하고 퇴장해 통합대회는 무기중단됐다. 이때 전진한은 단일지도체를 관철시켜 위원장 지위를 차지하려고 의사진행을 방해했다.(조선일보 60.11.29자 사설 ‘노동단체 통합대회의 난투극을 개탄한다’) 이날 조선일보 사설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개척자로 자처하고 나선 그들이 새시대의 노동운동을 지도할 자질이 없음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 되었다는 점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난동에 가담한 폭력배들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자진 용퇴할 것을 바라며 또 이러한 사람들을 대표자로 파견한 각 노동단체들도 노동운동의 신성성과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금후의 수습에 대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라고 썼다.

난장판이 된 대회를 보고도 보사부 김문영 노동국장은 “중앙위원이 구성된 이상 한국노련의 발족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임원 구성에서 김말룡의 전국노협 세력이 중심이 됐다. 전진한은 13인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뽑힌 중앙위 임시부서는 불법이라고 성명을 냈다. 전진한은 이어 한국노련과 달리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발족시켰다. 전진한은 노련회관 점령을 시도했다. 한국노련(김말룡) 삼임위가 열리는 노련회관을 전진한이 인솔하는 20명으로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김말룡은 경전과 철도의 기동력으로 막았다.

한국노련은 61년 민주당 정부가 추진한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투쟁을 벌였다. 문제가 된 보안법 13조 2항은 쟁의권을 보장하는 노동쟁의조정법 13조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김말룡과 전진한의 대립으로 통합은 지연됐다. 대립속에 양측은 61년 5월13일 통합에 합의하는 성명을 내고 5월30-31일 서울 3.1당에서 대회를 연다고 발표했지만 5.16 쿠데타로 무산됐다.
김말룡의 한국노련은 50년대 대한노총의 조직체계와 동일한 산업별 직업별 지역별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따라서 50년대 유지했던 대한노총의 조직 틀을 그대로 답습했다. 또 중앙조직의 부서를 대폭 축소했다.

4. 진보적 노동운동의 고양

1) 어용노동조합 개편과 규탄운동


어용노동조합 규탄데모는 김기옥이 위원장으로 있던 부산부두노동조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던 날인 4월26일 조합원들은 어용간부 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며 조합회관을 점령하는 등 간부들의 총퇴진을 요구했다. 어용노조 규탄데모에 의해 기존 단부들은 일괄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합운영의 공백은 수습위라는 기구를 구성했다. 수습위는 새 조직을 개편하는 과거의 독선적이고 비민주적 조합운영방식을 시정해 나갔지만 과거의 고질적인 파벌투쟁이 재현되기도 했다. 4월혁명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어용노조 규탄데모는 전국노협이 주도했다. 전국노협 의장 김말룡은 60년 5월1일 성명에서 “관제 노동단체인 대한노총의 전간부는 물러가라”고 주장했다.

대한노총은 기층노동자들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5월9일 간부 총사퇴로 해산상태였고, 10여 명의 수습위원이 연맹책을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과 대조로 전국노협은 4월혁명의 여세를 몰아 대한노총의 어용성, 비민주화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조직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전국노협은 신정부 수립 때까지 일체의 노동운동을 중단하고 내부정비만 했다.

2) 노동운동의 고양과 노조 결성

4월혁명기 노동운동의 주요 특징은 미조직 노동분야의 활발한 노조결성이었다. 59년 노조 547개, 노조원 28만이던 것이 60년엔 노조 914개 노조원 32만1천명으로 늘었다. 60년 한 해 동안 설립된 노조는 388개였다. 신설된 노조들은 자유당 치하에서 노조 결성이 어려웠던 중소사기업에서 두드러졌다. 59년 평균 조합원 수가 503명이었는데 4월 이후 결성된 노조의 평균 조합원 수는 166명에 불과했다. 4월혁명 이후부터 61년 5월까지 1년간 노동쟁의는 총 282건이나 됐다. 특히 교원, 은행원, 신문기자의 노조 결성투쟁이 활발히 전개돼 노조운동의 폭이 넓어졌다.

교원노조는 대구에서 60년 4월29일 대구시교원노조결성준비위 구성을 시작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교원노조 결성이 확대되자 60년 5월9일 이항녕 문교부차관은 “교원노조 구성을 막지 않을 방침”이라고 했으나 5월18일 이병도 문교부장관은 불허 방침을 천명했다. 교원노조는 당국의 불허에도 불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60년 7월말가지 전교원의 25%에 해당하는 2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은행 쪽에선 60년 6월1일 조흥은행 노조결성을 선두로 6월8일 상업은행, 6월11일 제일은행과 한일은행, 6월18일 서울은행에서 노조가 만들어졌다. 7월23일엔 전국은행노조연합회가 결성됐다.
60년 5월15일 대구일보 기자들이 사내 인쇄공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기 시작해 6월17일엔 연합신문이, 6월22일엔 평화신문이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신문노조는 전국 조직을 결성하진 않았다.

5. 좌절

1) 5.16 군부 쿠데타와 노동단체 해산


4월혁명으로 노동운동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위원회는 61년 5월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계업사령부 공공 5호로 ‘경제질서회복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해 모든 노동쟁의를 일체 금지시켰다.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은 61년 7월5일 한국노련을 중심으로 중앙조직을 재건하고자 박정희 의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한국노련 김말룡 의장의 재조직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철도노련 위원장이며, 한국노련 부의장인 이규철을 중심으로 노동조직 중앙을 재건하려고 했다. 이런 의도는 61년 8월3일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공포 이후 현실이 됐다.

2)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결성

61년 8월3일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근로자의 단체활동을 부활시켜 헌법과 노조법에 따라 보장된 근로자의 단체활동권을 다시 인정했다.

정희섭 보사부장관은 8월4일 담화에서 노조를 재조직함에 군소노조의 난립보다 전국 단일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김말룡 중심의 한국노련계 간부들을 배제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군사정부는 노조활동을 허용함과 동시에 8월5일 산별노조 조직 책임자를 지명해 이규철을 의장으로 하는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재건조직위원회는 9개의 산별노조 대표자로 구성돼 ‘9인 위원회’라고도 불리웠다. 9명은 철도의 이규철을 포함, 광산의 한기수, 외국기관의 이광조, 전력의 조창화, 섬유의 김광수, 체신의 조규동, 운수의 안강수, 해상의 최재준, 금융에 김준호였다. 김말룡은 빠졌다.

김말룡 중심의 전 한국노련계 간부들은 전국노동단체 재조직연락위원회를 만들어 김말룡을 책임위원으로, 김정원(광산), 이기설(섬유), 전병민(자유), 박민균(해상), 김대연(화학), 조재규(한전), 조규동(체신, 김중길(은행) 등 약 40명의 산별 대표를 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들은 이규철 중심의 재건조직위원회를 비난했다.(동아일보 61.8.6)
정부당국은 김말룡의 연락위원회를 배제할 뜻을 분명히 했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재건조직위원회는 중앙조직 결성대회 준비를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당국은 김말룡 쪽의 결성 준비집회를 불허했다.

61년 8월 30-31일 이규철 중심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결성대회가 15개 산별노조를 목표로 서울 용산 교통부우회관에서 우선 11개 산별노조로 만들어졌다. 한국노총은 대회 결의문에서 “5.16 군사혁명 전폭지지”를 다짐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우리 노동운동사에 또다시 슬픈 장면이다. 결의문에서 “정부는 노동쟁의금지령을 즉시 해제하라”고 하면서도 “노동쟁의의 평화적 해결로 산업평화 유지에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순을 보였다. 또 “5.16 군사혁명 전폭지지”를 다짐하면서도 “정치적 엄정중립을 확립”한다는 모순된 내용도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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