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노동조합을 회사 발전의 파트너로 보지 않았습니다. 회원 수를 늘리기 위해 부당영업을 강요했던 회사는 어느새 조합원 줄이는 일을 영업수치보다 중요시하였습니다. 90만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학습지 업계 2위였던 재능교육은 노동조합을 없애려는 목적에 치중한 결과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하고 맙니다.
회사 내부 문건을 보게 되었는데, 영업성과에 신경 쓰지 말고, 지국 별로 조합원 조직율이 몇 프론데, 그걸 이번 달에 몇 프로로 하라. 조합원 수가 몇 명인데 몇 명 탈퇴시켜라. 회사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근 5년간 영업적인 것은 다 버리고 오로지 조합 깨는데 집중을 하죠. 회원이 줄기 시작해요. 저희가 (회원이) 90만 가까이 갔을 때, 회사는 1백만 달성이 목표였거든요. 그래서 학습지 업계 1위가 되는 게 목표였는데, 노조가 만들어진 뒤로 노조를 깨기 위해 1위고 뭐고 다 포기하고 5년을 딱 노조 깨기만 하고 나니까, 돌아보니 회사가 남은 게 없는 거야.
그 5년은 회사는 물론 노동조합도 엉망이 되는 기간이었습니다. 4천명을 눈앞에 두던 조합원도 회사의 앙칼진 노력으로 수백 명으로 줄었습니다. 학습지 업계 1위를 코앞에 두었던 재능교육도 어느새 업계 4위로 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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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했다는 이유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2001년 7월 임금 및 단체협약이 끝나자 회사는 조합 집행부에게 임금을 비롯한 조합비를 가압류했습니다. 그 금액이 자그마치 9억원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임금 및 단체협약이 끝나고 나니 가압류 금액이 12억원 달했습니다. 고스란히 급여를 뜯기다보니 한 달 급여가 20만원도 되지 못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수술비가 없어 고통에 신음하는 아내를 눈물로 지켜봐야 했던 조합원이 있었습니다. 자식 양육비가 없어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는 조합원도 있습니다. 자식의 돌 반지를 내다 팔아야 했습니다. 전세금을 빼서 달세 방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다 한 학습지 교사를 떠나보내게 됩니다. 정종태. 정종태는 3기 위원장으로 노조활동을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회사에서는 수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끼니를 걸러야 했고, 차비가 없어 몇 시간씩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결국 정종태를 위암으로 세상과 하직하게 하였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게 회사와 교섭 중인데, 전 간부였던, 가압류가 풀리지 않은 전 임원한테 전화가 오는 거예요.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이번 교섭만 되면 가압류 풀어준다고 했다, 회사 안을 받아라. 이런 전화가 교섭 중에 와요. 아, 진짜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거 같아요.
조합원 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회사는 “(노동조합 때문에) 잃어버린 십년을 되찾자”는 의지로 이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노동조합을 아예 사라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2007년 임금협상을 하며 수수료 제도를 개악을 하고, 2008년에는 아예 단체협약을 해지 합니다. 노동조합 사무실은 회사에서 쫓겨나야 했고, 유명자는 해고를 당합니다. 휴회에 대한 교사의 책임이 다시 부활을 하였습니다. 개악된 제도로 급여가 1백만 원 가까이 줄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유명자와 조합원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노동조합이 사라지고, 다시 굴종을 강요받는 학습지 교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소수라도 싸우며 정의를 외치고 양심에 호소하여야 할 것인가.
저희 요번에 파업이 아니에요. 농성을 시작한 거예요. 간부들이. 지금 파업할 수 있는 대오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천막농성 투쟁을 시작해보자. 그래서 천막을 쳤고, 7백 일을 온 거예요. 7백 일이 되니 인제 다 병이 들었어요. 인제 골병이. (웃음)
재능교육 본사 앞에 농성천막을 치면 곧바로 뜯겠습니다. 천막을 치고 뜯기기를 십 수 번 되풀이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벌금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반 년 전부터는 아예 천막을 치지 않고 본사 앞 인도에 노숙자가 되어 농성을 합니다. 하지만 한 순간도 농성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별빛을 맞으며 철야를 합니다. 기약 없는 싸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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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을 시작한지 7백일 하고도 하루가 지난 2009년 11월 20일 오전, 재능교육 본사 앞을 찾아갔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피켓만이 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현관 앞에는 서울역에서 익숙히 봐왔던 장면이 연출됩니다. 화단을 등지고 3면을 피켓과 우산으로 빙 둘러쳐진, 집 없는 이들의 집. 그 안에 검은 머리카락이 보입니다. 유명자입니다. 종이박스로 만든 피켓으로 한겨울 찬바람을 막으며 새우 등짝을 하고 움츠리고 있습니다. 주변을 맴돌며 사진 수십 장을 찍었건만 인기척을 느끼지 못합니다. 추위에 몸만이 아니라 오감이 얼어붙었나 봅니다. 헛기침을 하자 머리가 들리고 맑고 초롱초롱한 눈이 반깁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말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재능교육 노동자는 7백일을 보냈습니다. 그 숱한 날을 두들겨 맞으며 보냈습니다. 추운 날은 꽁꽁 얼고, 한여름에는 흠씬 땀범벅이 되어 농성을 이어가지만 언론의 주목 한번 받지 못하고 7백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기억을 지워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투쟁을 오래하는 건 동지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유명자의 깊은 한숨이 칼바람보다 날카롭게 옷깃을 파고듭니다.
유명자는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뭔가 “결단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조용히 말합니다. 그 결단이 40년 전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을 생각하며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했던 전태일의 결단과는 왠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무섭고 두렵고 위험하고....., 긍정보다는 부정의 느낌이 들어 섬뜩합니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확인하기 위한 결단이 아닐까?
농성이 끝나면요, 카메라를 메고 여행을 가고 싶어요. 제주도 올레길. 홀로 말이에요. 그리고 학습지 교사 할 거예요. 이번 싸움 끝나면 학습지 선생 안하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할 거예요. 십년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밤 열시, 열한시까지 수업하고 나서 조합원들 만나러 새벽에 다니고 그럴 때가 가장 신났던 거 같아요. 저는 꼭 다시 들어가서 학습지 선생님들하고 일하고 싶어요.
농성 초기만 하더라도 늘 카메라 가방을 지니고 다녔다는 유명자. 어느 샌가 카메라를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사진기를 손에 쥐어주고 싶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그의 필름 속에 고이 간직하게 말입니다. 오늘 이 절망의 사진이 누렇게 빛바랜 사진이 되고, 훗날 그 사진을 바라볼 때 그 시절 그 싸움이 희망이었다, 희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날, 그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