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태와 스쾃(빈집 거주)

빈집,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김길태(부산여중생살해사건의 피의자)가 재개발구역의 빈집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몇몇 언론에서는 치안이 취약한 우범지역이 되어버린 재개발구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의미있는 시도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왔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지금 그 곳에 시선이 가고 있다.


재개발구역의 빈집

재개발구역의 빈집은 지금의 개발 제도가 만들어낸 필연적 산물이다. 보통 구역이 지정되고 사업계획이 확정될 때까지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자신에게 어떤 재정착 대책이 제공되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사업계획인가를 신청할 때 종이 한 장이 날아오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관리처분 인가 단계까지 간다.

다시 용산4구역으로 가보자. 2008년 4월 조합은 세입자들에게 보상 협의 요청서를 보낸다. 협의 기간은 5월 2일까지란다. 6월 13일 조합은 <주거이전비 지급 및 이주 안내>라는 공문을 세입자들에게 보낸다. 8월까지 이사하란다. 8월 7일, 조합과 현암건설은 "9월 1일부터 본격적인 철거를 실시", "8월 31일까지 이주를 하셔야" 등의 내용이 담긴 안내문을 발송한다. 한 세입자는 8월 26일 세입자 대책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달라는 서한을 구청에 보냈다. 이주를 끝내라는 시점으로부터 5일 전까지도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보상 협의 요청서를 받아보고 '협의'하기 위해 조합 사무실을 찾아간 세입자들도 있을 게다. 그러나 '협의'는 없다.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과 공익사업을위한토지등의취득및보상에관한법률에 정한 그대로 조합이 정한 ‘통지’가 있을 뿐이다. 설령 협의를 하더라도, 원주민의 재정착이 협의의 목표가 되지 않는 지금의 개발제도에서는 세입자가 만족스러운 대책을 제공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빈집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먹고 이사를 준비하는 데에도 두세 달은 걸린다. 이사하려고 집 구하러 돌아다녀본 사람들은 안다. 일방적인 통지일 뿐인 '협의'에 두 달, 이주(사실 추방)하는 데에 두 달, 그러니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그냥 이사가라니까, 보상금 얼추 받은 듯하니까, 싸워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도 몇 달 전부터 동네를 돌아다니는 용역깡패들이 무서우니까,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들이 떠난 집이 빈집이 되어 남는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빈집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빈집들이라도 먼저 깨끗하게 철거하면 치안 문제는 덜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 사이로 군데군데 비어있는 집들만 철거하는 것이 어렵기도 할뿐더러, 용역업체는 일부러! 빈집의 일부만 철거한다. 동네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용역업체는 누군가 조합 소유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경비’를 위해 대체로 집의 한 쪽 벽의 일부만 허물어놓는다.

무엇보다도 빈집 철거는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협박이다.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억압이며 주거환경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다.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는 집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의 빈집 철거는 강제퇴거의 범위 안에서 다루어야 하며 막아내야 할 것 중의 하나다. 대추리에서 빈집 철거를 막기 위해 그렇게 싸웠던 이유도 다르지 않다.


빈집으로 찾아드는 사람들

이렇게 빈집들이 생긴다. 군데군데 부서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들도 있고, 아직 철거되지는 않았지만 온갖 쓰레기들의 집합소가 되어 아무도 향하지 않는 집들도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낡은 건물이라 부쩍 낡아가기도 한다. 그런 공간들에 “노숙자”, “비행청소년”이라고 언론에서 표현하는 이들이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언론은 이런 분위기가 주민들의 치안을 위협한다며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일까. 그들이 처음부터 노숙인이거나 ‘비행’청소년이 아닐 것은 분명하다. 비를 피할 지붕이 없어 거리에서 잠을 청하다가 그런 공간으로 찾아들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 ‘노숙자’라 이름 붙었을 테고,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밤 늦은 시각 낯선 동네에 나타나기 때문에 ‘비행청소년’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일 게다.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왜 열심히 일해서 집을 구하지 않느냐는 질타만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그/녀들이 어떻게 느끼는지와 상관없이 그/녀들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간(대개는 부-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라는 훈계만 있다.

물론 범죄 장소가 필요해 범행을 목적으로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그냥 몸 하나 뉘울 곳을 찾아갔다가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렇게 빈집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을 모두 예비범죄자로 본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전의 문제이고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빈집'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에게는 잠자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둘은 주거의 문제라는 점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

사회가 '가난한 동네'를 주목하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다시 그 동네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의 대립적 관계만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가난한 동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개발사업구역으로 지정된 구역이 일반적인 동네들보다 낙후할 것은 짐작 가능하다. 그래서 정부와 지자체는 주거 환경을 개선하겠다며 개발사업 구역을 지정한다. 그러나 개발은 오히려 가난한 동네를 만들어낸다. 가난한 동네는 개발하기 전까지 가난한 동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개발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동네들의 문제는 오직 개발사업을 통해서만 풀려고 하는,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가난한 동네를 팔아서 자본을 축적하고 공간의 가치를 독점하려는 개발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 동네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려는 노력을 정부도, 지자체도, 당연히 자본도, 그리고, 우리도 안한다. 그렇게 집값이 조금 낮은 동네들에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주거환경개선을 시도할 수도 없고, 사회보장도 취약하고, 차별의 시선들과 사회적 배제의 심화로 다시 지역의 빈곤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소득이 생기면, 살기 좋은 동네로 '이사'가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살기 좋게 바꾸려는 고민은 엄두도 안 나고, 해보려고 해도 먹고살기 바쁜 세상이니까.

그리고 소득이 오히려 줄어들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집값이 조금 낮은 동네들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 또다른 가난한 동네를 찾아간다. 가난한 동네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은,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에게로 뻗어나가야 한다.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 역시 같은 굴레 안에 있다.

개발사업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시급하다. 빨리 빨리만 외치며 조합과 건설자본의 금융대출 일정에 맞춰 시공 일정을 잡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빼앗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 주민들에게 포괄적인 재정착대책을 제공하고 주민 대부분과 합의를 마친 후 이주를 시작하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띄엄띄엄 빈집들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떠날 집도 없는 사람들의 스쾃에 대답해야 한다. 치안 강화만 외치며 또 다른 빈집으로 내몰 것인가, 개발과 빈곤의 굴레를 깨고 함께 살만한 집에 살 권리에 도전할 것인가.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진보복덕방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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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 빈집 , 김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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