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사태를 예견한 미술가

[새책] 김민수의 문화사랑방 디자인사랑방

김민수 교수는 미술가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역사가 있다. 오랜 불편을 감수했던 그의 폭로는 ‘역사’에 기반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재벌회사의 그룹 로고와 이미지 광고가 외국 것을 표절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 <김민수의 문화디자인>(2002년)을 더 좋아하지만 이번엔 지난해 연말에 나온 <김민수의 문화사랑방, 디자인 사랑방>을 소개한다. 김 교수는 책의 제목에서 늘 ‘문화’와 ‘디자인’을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헤친다.

도대체 광고가 무슨 짓을 하는가

잘나가던 때 쌍용차의 광고를 보고 망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예견했던 김민수. 이번 책은 친일조각가들의 작품에서 독일 제3제국의 흔적을 캐는 열정, 철옹성 같은 학계의 권력에 대항했던 지난 10년을 넘어 통영으로 간 건축가들의 사유와 ‘선유도 공원’의 아름다움, 애니멘터리 한국설화를 소개하는 긍정의 힘으로 발전했다.

길을 가다가 <경축, 위험등급 4급 판정, 재건축 추진>이란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막 무너질 정도로 위험한 집에 사는 게 자랑스럽다는 이상한 광고다. 재건축으로 대박을 치겠다는 배금주의가 밑에 깔려 있다. 얼마나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했으면 지방의 한 대학은 신입생 유치광고에 <4년 연속 ‘정규직 취업률 1위’>라고 박았다. 비정규직의 고통마저 상품광고로 간단히 순치시켜 버리는 광고쟁이의 재주가 놀랍다.

옆의 조선일보 2010년 5월14일자 9면에 실린 인천의 영종하늘도시 아파트 분양광고도 소름 끼치긴 마찬가지다. <분양가 상한제 폐지확정!>을 자랑스럽게 내걸었다. 건설사의 탐욕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영종, 청라지구는 천국을 떠올리는 ‘하늘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무분별한 아파트 난립으로 분양가에 밑돌게 팔고 있다.
도대체 광고가 무엇인지. 문화사학자 자크 바전(Jacques m. barzum)의 책 <예술의 효용과 남용>은 디자인이 오늘날 우리 삶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김민수 교수는 2005-2006년 국악FM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이 책은 당시 라디오 방송을 위해 썼던 원고를 다듬어 나왔다. 저자는 머리말 끝에 오랜 친구이자 동료 교수인 아내에게도 인사를 전하며 “초발심을 다지며”라는 말로 끝맺는다.

청바지와 상품 이데올로기

IMF 때 토종 청바지가 외국 브랜드와 경쟁해서 앞섰다. 닉스와 잠뱅이 등 토종 브랜드가 리바이스, 캘빈 클라인, 게스를 제쳤다. 그러나 최근 다시 리바이스 등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원래 가난과 노동의 산물이던 청바지는 독일 남부 출신 재단사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고안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1847년 16살에 미국으로 이주해 1853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의류도매업을 시작했다. 광부들의 바지는 노다지의 꿈을 캐기 전 고된 노동으로 쉽게 닳았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천막이나 마차덮개로 사용하던 질긴 옷감 ‘진’으로 바지를 만들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1860년대 염색한 청색 실과 염색하지 않은 실을 섞어 짠 능직물 ‘데님’천으로 바꿨다. 1872년 재단사 제이콥 데이비스가 리베팅 바지주머니로 특허를 얻었다. 1960년대 젊은이는 반전운동과 히피문화 속에 청바지를 찢어 입고 사회적 저항을 표했다. 오늘날 제조업체들이 저항의 산물이던 청바지를 고가 패션품으로 둔갑시켰다.

유치한 광고, 왜곡된 가치관

책에서 김민수 교수는 2005년 당시 ‘대한민국 1%’에 초점을 맞춘 쌍용차 광고를 보고 부실광고와 경영책임을 종업원들이 뒤집어쓰고 직장을 잃는 건 아닌가 우려했다. 4년 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 아파트 광고는 우연히 차 안에서 예쁜 여학생에게 반해 가슴 설렌 학창시절이 배경이다. 성인이 돼 그 여학생이 어디 사는지 알아봤더니 역시 이 고급 아파트라는 식이다. 외모지상주의다.

기억과 동상, 뒤틀린 정체성

친일조각가 윤효중(1917-1967)은 배제고보를 나와 일본으로 유학 가 1941년 동경미술학교를 나왔다. 귀국 뒤 1943년 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조각 ‘천인침’으로 창덕궁 상을 받았다. ‘천인침’은 일제 침략전쟁에 나가는 병사에게 천 번의 바느질을 한 천 조각을 몸에 지니면 총알도 피해간다는 주술적 전시 시책을 말한다. 윤효중은 1944년 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제4반’이란 조각을 출품해 전쟁물자 공급을 위한 여성노동대의 모습을 표현했다. 같은 해 결전미술전에선 ‘아버지의 영령에 맹서하다’가 조각 1등상을 받았다.

윤효중의 친일행적은 1945년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조선총독의 아들 아베 소위의 흉상에서 절정에 달했다. 윤효중은 가미카제에 감명 받아 자발적으로 사상전향자 통제조직인 ‘대화숙 미술부’ 화실에서 흉상을 만들어 총독부에 헌정했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21일자는 윤효중이 만든 아베 소위 흉상을 “굳게 닫은 입술에는 조국과 동포를 사랑하는 뜨거운 순정이 서리고 불이 일 듯이 허공을 노리는 눈동자에는 멀리 푸른 대공에 대한 끝없는 투지가 불타오른다. 일본 남아의 거룩한 용자. 헤라(조각도구)를 잡은 손길이 한 줌 두 줌 진흙 위를 스칠수록 그 끝에는 우리의 아베 가미와시 소위의 씩씩한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윤효중은 해방 후 1948-1958년까지 대학교수를 지내고 1953년부터 국전 심사위원이 됐다. 1955년 38살에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65년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까지 지내다 1967년 일본에서 죽었다. 윤효중이 승승장구 한 이유는 남산에 25m의 엄청난 이승만 동상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윤은 서울 견지동의 충정공 민영환상과 진해 도천동 로터리 충무공 이순신상, 대구 달성공원의 수온 최제우 동상도 제작했다.

천지에 널린 친일조각가의 동상

역시 친일조각가 김경승(1915-1992)은 1938년 동경미술학교를 나왔는데 윤효중보다 3년 선배였다. 겸경승은 4.19 때 시민이 부순 윤의 이승만 동상을 1988년 서울 종로구 낙산 이화장에 등신대 보다 약간 작게 다시 만들었다. 이 동상의 오른손 자세가 1969년 역시 김경승이 만든 백범 김구 선생과 똑같다.

김경승은 1967년 윤효중이 죽은 뒤 전국의 동상을 거의 도맡아 제작했다. 남산의 안중근 동상도 1959년에 김경승이 만들었다. 역시 남산의 김구상은 1969년에 김경승이 만들었다. 김경승은 이순신 동상을 여러 번 만들었다. 1953년 통영 남망산 정상과 부산 용두산 공원의 것도 김이 제작했다.

김경승은 수유리 4.19 국립묘지의 4월 학생혁명 기념탑의 조각상과 부조를 만들었다. 여기 인물과 근육 표현법이 독일 제3제국 나치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와 요제프 토락이 선보인 파시스트 미학을 빼닮아 4.19 정신을 크게 훼손했다.

위대한 의자와 히틀러, 이명박

서울시립미술관이 2005년 3월 11일 ‘위대한 의자, 20세기 디자인’전을 열었을 때 예술과 정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 국내 문화계 인사 14명이 위대한 의자에 앉은 흑백사진을 걸었다. 14명 가운데 이명박 서울시장이 의자에 앉은 사진도 있다. 이 시장이 앉은 의자는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가 1948년에 디자인한 ‘라 쉐즈’다. 그런데 이 시장 사진만 거리를 두고 배치해 마치 군계일학처럼 표현했다. 다른 13명의 문화인사보다 더 위대해 보이게 했다.

사진은 한국 사진작가 준 초이가 찍었다. 준 초이의 사진 속 인물들은 크리스티앙 쿠아니의 사진과 같은 방식으로 자세를 취했다. 문제가 되자 미술관은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 복원 같은 문화적 담론을 제공한 점이 인정됐다”고 변명했다. 시립미술관장도 이번 전시의 ‘위대한 의자’에 앉아 찍어 그 사진을 이명박 시장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도시계획과 공공건물에서부터 경기장, 영화, 우표까지 자신을 위대하게 심어주는 예술을 정치적으로 디자인했다. (월터 C. 렁거, 히틀러의 정신분석, 최종배 옮김, 솔, 1999)

왜곡된 안중근 숭모사업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일제가 건립한 남산 조선신궁 터에 새로 지었다. 나는(김민수) 얼마 전 방송에서 안 의사 숭모회 인사와 인터뷰 하면서 직접 물어봤다. “안 의사를 숭모한다면서 어떻게 친일 조각가가 만든 동상을 세웠냐?” 이에 숭모회 인사는 “안 의사 동상이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조각가 김경승이 훌륭한 작가라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이런 왜곡된 기념사업 때문에 지난 2003년 6월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있었다.

4월 7일은 아톰의 생일이다. 아톰은 1951년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가 만들었다. 아톰은 도쿄 과학성장관 덴마 박사가 창조했다. 아톰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뒤 실추된 자존심을 되찾고 사회를 수습하기 위해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창조한 캐릭터였다. 전범이 된 어른들은 전후 일본에서 아톰 같은 아이 영웅으로 위로받았다.

뉴욕타임스는 2005년 11월 19일자 <일본에서 아시아 경쟁국들의 추한 이미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혐한류는 일본서 약 36만부가 팔렸다. 중국을 비하하는 만화 <중국입문>도 있다. 혐한류의 저자는 젊은 만화가 야마노 사린으로 자신의 웹사이트에 만화를 올리기 시작했다.

애니멘터리 한국설화

<애니멘터리 한국설화>는 2000년 1월 ‘삼국유사’편을 시작으로 공중파를 탔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다룬 ‘여걸 소서노’,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의 ‘다섯 개의 무덤’, 왕건이 나주 송월동 우물에서 만난 나주 오씨 낭자의 ‘조롱박에 잎 띄우고’, 문익점의 ‘붓통에 숨긴 목화씨’, 조지훈의 시 석문의 배경이 된 일월당 황씨 부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첫날밤에 있었던 일’ 등이 있다.

고우영 만화와 해학의 미학

2005년 4월 25일 만화가 고우영 선생이 죽었다. 고우영 만화는 1970년대 군사독재정권의 경제개발 속에 자유를 저당 잡히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상을 견디는 일종의 ‘진통제’ 역할을 했다. 1972년 1월1일부터 <일간스포츠>에 실린 연재만화 <임꺽정>은 최초의 신문 연재만화다. 고우영의 임꺽정은 명쾌한 필치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민초들의 삶을 다루었다. 엄꺽정 연재 첫 회에 시대배경을 설명하면서 “실권을 뺏어 왕 아닌 다른 사람에게 왕권이 있던 때이다. 지방 말단 관직에 있던 자까지도 권력에 아부할 줄이나 알고 백성의 재물을 털어내는 데만 능했다”고 썼다. 독자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고우영의 최초 만화는 부산 피난시절 중학교 2학년 때 발표한 <취돌이>다. 1970년까진 <짱구박사>로 알려졌다. 짱구박사는 1958년 고등학교를 나와 만화학생이란 잡지사에 입사해 ‘추동성’이란 필명으로 그렸다. 이 때 <마의태자> <이태백>도 나왔다. <임꺽정> 이후엔 역사 시대물에 잘 어울리는 극화된 자유로운 형상미로 발전했다.

고우영의 특기는 해학적 언어다. <삼국지>에서 동탁이 여포한테 죽는 장면. 동탁이 나이 55살에 양아들 여포의 손에 죽었는데 어찌나 살이 쪘는지 어느 손재주 좋은 사내가 솜으로 심지를 꼬아 동탁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켰더니 뱃속의 기름 때문에 50일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삼국지>는 총 10권 분량인데 백여 쪽이 검열로 삭제돼 5권으로 출판했다. 24년이 지난 2002년에야 무삭제 완전판이 나왔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다큐 사진


살가도의 브라질 <세라 펠라다 광산>(1986)에선 퍼낸 흙 자루를 메고 계곡을 오르는 수많은 인간들이 흡사 개미 떼처럼 보인다. 거대한 만리장성도 쌓을 수 있는 인간 노동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살가도는 1944년 브라질에서 태어나 상파울로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공부를 마쳤다. 이후 경제학자로 프랑스와 영국 런던에서 일했지만 1973년 프리랜서 사진가로 전환했다. 경제학 논문 한 편보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노동하는 인간 존엄성에서 더 큰 경제적 가치를 발견했다.

바벨탑 판타지

에펠탑처럼 티자인한 제2롯데월드의 첫 번째 안이 서울시 도시건축위원회에서 퇴짜를 맞았다. 에펠탑 흉내 낸 도쿄타워는 1958년에 세웠다. 안내판에는 “도쿄타워는 에펠탑보다 높이가 13m 더 높다”고 쓰여 있다. 누가 물어봤냐고.

전국 주요도시의 혈 자리에 롯데 건물이 들어서면서 도시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심각하다. 대구의 롯데백화점은 대구시의 상징경관인 대구역을 삼켜 버리고 마침내 대구역을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 꼴로 만들었다. 부산의 제2롯데월드 역시 옛 부산시청과 일제강점기 부산부청사로 이어지는 용미산에 터를 잡아 역사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

광주 치평동의 광주광역시 신청사는 지하 2층 지상 18층이다. 인구에 비해 엄청난 규모로 마치 핵추진 항공모함을 방불케 한다. 5.18 기념 때문에 18층으로 했단다. 이런 식이라면 5.18이 5월31일에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인간의 탐욕에 희생된 선유봉

선유도 공원은 조선때 ‘신선이 노니는 봉우리’라는 뜻의 선유봉이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집인 <경교명승첩>의 선유봉은 빼어난 절경이다. 겸재는 1740년 여름 양천현감으로 부임해 사천 이병연에게 시화를 만들자고 제안해 다음해 여름까지 그려 <경교명승첩>을 만들었다.

겸재는 이 화첩에 양수리 부근 녹운탄에서 시작해 경강(한강)일대의 절경을 담았는데 선유봉도 들어있다. 겸재의 그림 속 선유봉은 멀리 북이 보이고 마포나루를 오가는 황포돛배, 부드럽지만 기개와 풍채를 지닌 선유봉, 소나무와 어우러진 정자와 소담한 마을이 있어 마치 무릉도원 같다. 그러나 지금 아름답던 선유봉은 온데간데 없다.

선유봉은 1925년 7월 한강 대홍수, 을축년 대홍수 이후 제방을 쌓고 여의도 비행장을 만든다고 암석 채취를 감행한 눈먼 인간들을 위해 몸 바쳐 사라졌다. 선유봉은 지금 여의도공원 밑에 깔려 있다. 봉우리 자태가 사리지고 한낱 평지의 섬이 돼 버린 선유도는 1978년 서울시 정수처리장이 됐다.

선유도 공원화사업은 1999-2002년 4월까지 진행해 도시디자인이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에 훌륭한 대답을 제시했다. 자연을 때려 부쉈던 산업화의 공병대가 아니라 누적된 시간의 켜를 축적하고 문화적 연속성을 가꿔 나간 좋은 예다.

걷고 싶은 여백으로 바뀐 선유도 공원

지금의 선유도 공원은 진입하는 길을 여러 개 만들어 접근성을 높였다. 한강시민공원 방면에서 선유교로 들어오는 길, 양평동 한신아파트에서 선유교로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양화대교 위 공원 동문으로 들어오는 길이 각각 있다. 프랑스의 ‘2000년 위원회’와 서울시가 새천년을 맞아 공동기념사업으로 ‘루디 리치오티’가 디자인을 맡아 완성했다. 특히 루디 리치오티가 디자인한 선유교는 사람이 걷기에 섬세하게 신경을 쓴 마음이 담겨 있다.

‘네 개의 원형공간’엔 옛 정수장 시설을 재활용해 휴식과 놀이의 문화공간으로 바꾸었다. 원형의 콘크리트 농축조가 마치 빛바랜 고성같이 화장실, 환경교실, 원형극장으로 환생하고 옛날에 사용하던 송수관이 놀이마당의 미끄럼틀로 다시 태어났다. 옛 취사펌프장은 차를 마시며 한강의 정취를 보는 카페테리아 ‘나루’로 태어났다.

‘시간의 정원’에는 옛 정수시설의 지하공간에 사각의 정수조 공간이었던 것을 식물이 자라는 정원으로 바꾸었다. 인공폭포가 떨어져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한편 옛 구조물의 흔적을 살리고 정원에 적당한 습도를 조절하고 있다. 물을 여과하던 곳을 재활용해 만든 멸종 위기 수생식물의 정원인 ‘수생식물원’을 지나면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원래 테니스장에서 콘크리트 상판을 들어내고 기둥만 살렸다.

토목우월주의에 젖은 관료들 머릿속

녹색 기둥의 정원 풍경을 바라보며 디자인을 맡았던 건축가 조성룡 선생은 “정수장 폐허를 좀 더 남겨 놓으려고 지키고 감독했는데도 서울시 공무원들이 시장의 지시로 많이 철거해 버렸어요. 그 사람들은 뭘 놔둬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공무원들은 그동안 부수고 새로 지을 줄만 알았지 남겨두고 살려내는 디자인을 생각해 보거나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녹색 기둥의 정원’ 바로 옆 ‘한강전시관’은 원래 송수 펌프실이었다. 한강전시관은 지상 2층과 지하 1층의 전시공간으로 되살아났다. 1층엔 멀티미디어 갤러리와 휴게 공간, 2층은 기획전시실, 지하엔 한강의 역사와 생태, 문화를 알리는 전시와 교육공간이다.

방문자 안내소 맞은편은 약품침전지가 ‘수질정화원’으로 거듭나 있다. 얄팍한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전락한 디자인이 ‘공공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미덕과 선을 실천하는 철학으로 거듭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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