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노조의 등장...20년 노조 ‘민주화’ 한방에 후퇴

[복수노조 기획](6) 임원 임기 연장, 체결권 삭제 등 규약 변경

민주노조 진영의 숙원 사업이었던 ‘복수노조’가 도입된 지 1년. 금속과 공공부문을 필두로 현장에는 속속 기업노조의 깃발이 꽂혔다. 복수노조 도입의 취지였던 ‘자율경쟁’의 의미가 무색하게, 경쟁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단기간 내에 소수노조로 전락하는 사례도 늘었다.

복수노조 도입 이후, 민주노조 진영에 비상이 걸린 것은 복수노조의 취지가 어그러지면서부터다. 노조 간 자율경쟁은 고사하고, 회사의 지원과 ‘창구단일화’라는 악법이 경쟁의 출발점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단기간에 민주노조 자리를 탈환한 기업노조들의 민주성이다. 최근에 설립된 복수노조들은 지도부 임기를 늘리거나, 체결권을 삭제하는 등 노조 민주성을 후퇴시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수십 년간 노조 민주성을 제고하기 위해 쌓아온 역사성이 한방에 후퇴되면서, 노조는 민주노조 재건을 위한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기업노조의 ‘신노사문화’...20년 전 노사관계로의 회귀

민주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제2노조들은, 민주노총의 정치파업과 산별노조 운동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기업노조’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다. 새로운 노사문화 창출을 위해 회사와 협력, 상생하겠다는 ‘합리적 노사관계’가 핵심이다.

만도노동조합은 지난 7월 30일, 출범 선언문을 통해 “25년간 만도를 지배해 온 ‘87년식’ 노동운동이 그 수명을 다하고 질적 변화가 불가피한 국면에 도달했음을 절감했다”며 “회사의 경영과 조합원의 고용안정 가치가 상호 존중되는 상생과 협력의 새로운 노동문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홍섭 발레오전장노조 위원장은 노조설립 당시, 민주노총의 투쟁을 ‘불법 노동운동’으로 규정하고, “합리적 노사관계를 정립하는데 민주노총도 동참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유성기업(주)노조 역시 활동이념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적 노사문화 창출’을 내세웠으며, 강령으로 ‘선진노사문화 창출’을 적시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노조가 내세우는 ‘신 노사문화’가 87년 체제를 뛰어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87년 이후 노조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제고해 온 ‘민주노조’의 역사성을 후퇴시켜, 과거의 노사관계로 회귀하게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기업노조들은 임원임기를 늘리고, 체결권 조항을 삭제시키는 등 그간 노조의 ‘민주성’을 담보해 왔던 규약을 모두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발레오전장노동조합과 만도노동조합, KEC노동조합 등은 그간 2년이었던 노조 임원의 임기를 3년으로 연장했다. 또한 발레오전장과 만도, 유성 등의 기업노조는 단체교섭 이후의 ‘체결권’을 삭제시키거나, 위원장의 독자적 권한으로 축소시켰다.

만도노동조합의 경우, ‘단체교섭 및 체결권’ 조항에서 “위원장은 조합원을 위하여 사용자 또는 사용자 단체와 교섭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기존 금속노조 만도지부의 경우 ‘단체협약의 체결’ 조항을 통해, 지부의 단체협약은 조합원 총회를 거쳐 위원장의 승인으로 체결하도록 돼 있다. 조합원 총회를 거치지 않고, 위원장에게만 독자적으로 체결권이 위임될 경우, 직권조인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기업, 발레오전장 등의 기업노조의 경우, 아예 체결권 조항을 삭제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조합이 단체교섭의 당사자이며 위원장이 교섭위원장이 된다’는 단체교섭 권한만을 적시하고 있다.

임원임기 연장, 체결권 삭제 추세
“노조 어용화, 위원장 직권조인 문제 발생할 것”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따르면, 노조 임원의 임기는 3년 이상 역임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아울러 체결권은 위원장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조법에 따른 임원 임기와 위원장 체결 권한은 노조의 민주성 확립에 큰 장애물이 돼 왔다. 노조 지도부는 3년의 임기 동안 2번의 단협과 3번의 임금교섭을 진행하기 때문에 지도부가 어용화 될 경우, 발 빠르게 노조 체질개선에 착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단체협약에 따른 체결권이 위원장 독자 권한으로 부여되면서, 직권조인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때문에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90년대를 거치며 규약을 통해 노조 민주성 제고에 힘을 쏟아 왔다.

안재원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87년 이전, 한국노총 소속 노조들 대부분이 임기가 3년이었고, 지금도 한국노총 소속 노조의 지도부 임기는 3년”이라며 “하지만 3년간의 임기동안 지도자 어용화와 직권조인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해,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90년대 초부터 임기를 2년으로 줄여가는 과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노동계 관계자 역시 “노동조합 집행부는 누구라도 어용화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은 그대로 유지돼야 하기 때문에 노조 자체의 빠른 정상화를 위해 임기를 2년으로 줄인 것”이라며 “복수노조 시행 이후 빠르게 생겨나고 있는 친 기업노조들이 임기를 3년으로 다시 늘리는 것은, 3년이라는 시간을 벌어 친 기업적 성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짙다”고 강조했다.

조합원 총투표를 통한 체결권 조항은 노조 민주성의 핵심이었다. 위원장의 직권조인을 견제하고, 노조 내부의 소통체계를 위한 중요한 장치로 활용돼 왔기 때문이다.

안재원 연구위원은 “노동법상 단체협약 체결권은 위원장에게 있지만, 90년대 이후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조합원 총회를 해 왔던 전통이 있었다”며 “조합원 총회를 통한 체결권 조항은 사측과 싸워서 확보한 관행”이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벌써부터 기업노조 내부에서는, 체결권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금속노조 유성기업 관계자는 “임단협 설명을 위해 조합원 총회를 개최했지만, 지도부가 조합원을 협박해 조합원 다수가 퇴장하는 일이 발생했다”며 “또한 기존에는 단협 체결 전,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치지만 이번에는 확대간부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서 논란이 됐다”고 밝혔다.

이처럼 복수노조 시행전후 설립된 제2노조들이 공통적으로 ‘임기연장’과 ‘체결권 삭제’를 주도하면서, 소수노조로 전락한 기존 노조들의 재건사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노동계 관계자는 “위원장 직권조인은 회사의 회유, 협박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자본이 뒤에서 노조를 조종하는 격이어서 조직복원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조합원들이 반발한다 해도, 회사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현장 의견이 관철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안재원 연구위원은 “발레오만도를 시작으로 광진상공, 유성, KEC, 만도 등 제2노조를 중심으로 유사한 규약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이들 사업장 대부분은 창조컨설팅 개입이 있었던 곳으로, 이 역시 창조컨설팅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