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사측은 2011년 합의 이후에 손해배상청구 최소화라는 당시 합의내용과는 달리 한진중공업지회에 158억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하여 사내에 어용노조를 만들어 한진중공업지회 노조 사무실 폐쇄 통보를 하는 등 민주노조 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현재 근무 중인 300여 명의 노동자들 중에 지회 소속의 조합원은 13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용노조 소속 노동자들입니다. 한진중공업지회는 故 최강서 열사 문제 해결을 위해 한진중공업 사측에게 3차례에 걸친 교섭요구를 하였으나 사측은 보름이 지나도록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지회 간부·조합원들의 회사·노조사무실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사측은 민주노조사수와 손해배상철회라는 열사의 유지를 거스르는 유가족 개별 협의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월 5일에는 고공농성중인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철탑 농성장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투쟁 현장에 방문하여 투쟁중인 노동자와 가족들을 격려하는 ‘다시 희망만들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한진중공업지회는 158억 손해배상 소송 철회와 노조탄압중단, 수주를 통한 한진중공업 정상화, 유가족 대책 마련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상경투쟁을 계획하고 있는 중입니다. 또한, 사측의 158억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하여 시민들의 탄원서도 받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고 투쟁했던 동료를 잃은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과 가족들이 큰 아픔을 딛고 열사의 뜻을 이루기 위해 투쟁을 결의하는 내용을 나누며 故 최강서 열사 투쟁을 포함한 한진중공업지회 투쟁에 관한 많은 관심과 연대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강서가 좋아하겠다
“밀어느라!”
“아이다 아이다.”
“됐네.”
“좋다~ 회의 실컷 해라.”
12월 29일 오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앞에 망치질 소리가 요란하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이 故 최강서 열사 분향소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분향소 입구에 부착할 문을 만들면서 손잡이까지 만들었다. 한 조합원은 “우리 조합원들이 천막 설치는 자신 있다”면서 기회가 되면 전국에 있는 투쟁사업장들 천막 보수 작업을 하러가야겠다고 한다.
지난 27일 ‘노동탄압 분쇄! 정리해고 철폐! 손배가압류 철회! 악질 한진중 자본 규탄! 최강서 열사정신계승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 마무리 중에 영도 한진중공업 본관 입구에 확보한 공간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있는 중이다.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스티로폴과 장판을 깔았다. 그리고 본관 입구 쪽에 제단을 만들고, 故 최강서 열사 영정사진을 올렸다. 영정사진이 본관 안에 들어가게 되자 한 조합원이 “강서가 좋아하겠다”하며 미소를 짓는다.
▲ 故 최강서 열사 분향소를 설치 중인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 |
혹시 살 수 있었을까?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차해도 지회장도 상복을 입지 않은 채 망치질을 하고, 장판 까는 일 등을 했다. 차지회장은 1979년 마산 코리아타코마 조선소에 배관 작업 노동자로 입사하였다. 차지회장은 1987년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상집간부를 맡으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91년 한진중공업이 코리아타코마를 인수하면서 그는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근속연수가 35년인 차지회장이 현장에서 일을 한 기간은 10년 정도다. 7년 간의 해고기간과 군복무 기간이 10년을 차지하고, 위원장과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장 등의 활동이 나머지 10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89년 코리아타코마에서 해고된 차해도 지회장은 96년에 복직하여 노조 사무국장을 하다가 2001년 한진중공업 마산공장 지회장에 당선되어 2003년 故 김주익.곽재규 열사투쟁을 했다. 2003년 열사투쟁이 마무리 된 후에 한진중공업 지회장에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며, 2005년과 2007년에는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정리해고 투쟁 기간 중이던 2011년 10월 다시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에 당선 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 분향소 설치 작업 중인 차해도 지회장 |
이 날 오전에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조합원·가족들과 함께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때 차해도 지회장은 이번 투쟁이 끝나면 모든 일을 정리하고 사표를 쓰고 조용히 떠나고 싶다고 했다.
차지회장은 가깝게는 故 최강서 열사, 멀리는 1995년 대우정밀 조수원 열사로부터 시작해서 2003년도 두산중공업 배달호·김주익·곽재규 열사 등 가깝고 편하게 지냈던 동지들의 죽음을 보면서 매번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것만 끝나면 모든 일을 정리하고 떠나고 싶다.’ 동료들은 “행님은 무슨 죄를 많이 졌길래 꼭 이런 일 겪을 때마다 지회장이나 앞에서 하는 걸 하느냐? 복이 많아서 그런 거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차지회장은 최강서 열사가 세상을 떠나던 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공간에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크다.
“(최강서 열사는)이미 시신으로 누워있고, 저는 벽 한 칸 사이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제가 십분만 이십분만 더 먼저 그 문을 열어만 봤어도 혹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마지막 얼굴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창틀에서 내려가지고 인공호흡 마사지를 시키고 쳐다보고 했을 때 얼굴이 계속 떠올라요.”
지회장뿐 아니라 참석한 거의 모든 조합원들이 최강서 열사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죄의식을 표현했다. 여러 조합원들이 ”죽고싶다” “힘들다”는 말을 듣고 있는 차지회장은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꼿꼿하게 앉아 있다. 차지회장은 마지막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고통스럽고, 괴롭고, 이 자리에 있는 것 조차 힘들다면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조합원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실질적인 책임이 없다는 증거
오후 3시, 고 최강서 열사의 5살 7살 두 아들이 장례식장에 왔다.
“초콜렛인데 이거 먹을래?”
장례식장에 있던 조합원들이 챙겨주는 초콜릿 먹기에 바쁘던 아이들이 엄마와 삼촌이 시키는 대로 국화꽃 한송이를 공손하게 영정 앞에 두더니 이내 재잘재잘 떠든다. 적막한 장례식장 곳곳에서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혜신 박사와 쌍용자동차 권지영 가족대책위원회 대표가 조문을 하기 위해 왔다. 권지영 씨가 최강서 열사 아내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빈소를 나서는 정혜신 박사는 열사의 아내를 꼭 안아준다.
이 장면을 지켜본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강서야. 널 똑닮은 아이들이 왔는데 아빠는 없고 그저 영정만 바라본다. 아빠한테 사랑한다 해보라는 엄마 말에 동생이 멀뚱히 서있으니 "니는 왜 안하노" 6살 형이 5살 동생을 나무란다. 집에서도 울고, 오는 차안에서도 울었다는 큰아이는 아빠가 이 세상에 없는걸 알까”라는 글을 남겼다. 김지도위원은 아이들에게 초콜렛을 건네니 "이빨 썩어서 아빠한테 물어보고 먹어야 돼요" 했다면서 아이들이 무심결에 아빠란 단어를 참 많이 쓰는데,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고 아빠와 같이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겠냐며 가슴 아파 했다.
▲ 2011년 7월, 희망자전거에 참여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투쟁위원회 노동자들. 첫 번째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故 최강서 열사. [출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
장례식장 한켠에 마련된 노동조합 컴퓨터 앞에서 사진을 보는 머리가 허연 노동자가 있었다. 이성준(가명)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은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서 2011년 ‘희망버스’와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렸던 ‘희망자전거’ 등 최강서 열사가 함께 했던 투쟁 사진들 속에서 열사의 사진을 찾고 있었다. 열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찾으면 한 장 한 장 확대해서 마우스로 열사의 얼굴에 동그랗게 원을 그린다. 이성준 씨는 최강서 열사가 투쟁하는 모습을 많이 지켜보았다. 이씨는 최강서 열사와 당시 투쟁이 끝난 후에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함께 하기도 했었는데, 열사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고 회상한다. 2011년 <민중의소리>에서 제작한 영상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희망자전거>에서 故 최강서 열사는 “많이 바란 거 아니잖습니까. 가정 지키고, 안전하게 일하고 애들 키우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몰린다는 건 참 비참한 거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한다.
“가끔 속 얘기를 위트 있게 한마디씩 던지곤 했습니다. 술 한 잔 먹으면 춤도 곧잘 추곤 했는데...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많이 힘들었구나... 강서라는 게 확인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오전 집단상담 중에 정혜신 박사는 최강서 열사의 죽음과 관련하여 많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조합원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순서대로 죄의식을 갖게 된다. 가해자는 아무 죄의식이 없고, 피해자끼리 죄의식을 나누게 된다.”는 설명을 했다. 가해자는 고인의 생각과 마음의 접접이 없기 때문에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반면, 고인과 정서적 접점이 많은 피해자인 조합원들이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이 있는 사람일수록 죄의식을 안 갖게 된다. 정혜신 박사는 조합원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곧 조합원들에게 실질적인 책임이 없는 증거라고 이야기 했다. 조합원들의 죄의식은 조합원들이 최강서 열사와 친했던 증거라는 것이다. 또, 지금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열사와 밀접하고 서로 좋아했고, 죽기 전까지 서로 가장 많은 것을 나눴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 정혜신 박사가 진행하는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과 가족들 |
말없이 깔개를 깔아주던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새 분향소가 얼추 마무리될 즈음, 생명평화 백배서원을 하는 3명의 부산 시민이 분향소로 들어온다.
“와~ 완전 최고다.”
녹색당 부산시당 윤미라 사무처장이 밝은 목소리로 탄성을 지른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투쟁 기간 중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을 하던 85호 크레인 맞은 편에서 매일 백배서원을 했던 윤씨는 최강서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4일째 되던 12월 24일부터 한진중공업 앞에서 매일 저녁 6시 30분에 백배서원을 올리고 있다. 그동안은 밖에서 했는데, 이제는 새롭게 만들어진 분향소에서 할 수 있겠다며 표정이 밝아진다. 그녀는 85호 크레인 앞에서 백배서원을 하던 당시,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말없이 백배서원을 할 수 있게 비에 젖은 깔개를 마른수건으로 말없이 닦아주던 이가 故 최강서 열사였음을 알고 더욱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윤씨는 SNS에 “일 년 전 비오던 어느 날 말없이 백배서원팀 깔개를 닦아주던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네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생명평화 백배서원 중인 윤미라 씨와 장영식 씨, 그리고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
“진리가 삶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을 새기며 첫 번째 절을 올립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임을 믿으며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생명평화 백배서원 멘트에 따라 윤미라 씨와 사진작가 장영식 씨,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한명이 백배를 시작한다.
“그땐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김진숙 지도위원님의 외로움에 손을 내밀고 싶어서 시작했었어요. 김진숙 지도위원님이 내려오고 나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천막농성 하는걸 알면서도 각자 생활을 한다고 자주 와보지 못했어요. 연대는 끝까지 책임지는 것인데, 지도위원이 내려오고 나자 사람들이 빠져나간 걸 최강서 열사가 느끼지 않았을지... 많이 외롭고 힘들었겠다... 사측에선 노조 손배가압류를 노동자 살인도구로 쓰는데, 빨리 철회되어 장례를 치룰 수 있게 해야죠.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면서 더 슬펐습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사수하라 손해배상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 故 최강서 열사가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 내용
“○○이와 □□이가 아버지를 만나러 빈소에 왔습니다. 무엇보다 슬픈 건 ○○이와 □□이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빈소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래서 더 슬펐습니다.”
저녁 7시 30분, 회사 앞 추모집회에서 故 최강서 열사 유서낭독을 마친 한진중공업지회 박성호 부지회장은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전체 조합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 가슴아프다는 내용과 함께 조합원들이 제발 하나로 모여서 꼭 최강서 동지를 보러오라는 간곡한 내용으로 보냈다고 했다.
▲ 한진중공업 앞 추모집회에서 故 최강서 열사의 유서를 낭독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지회 박성호 부지회장 |
1991년 박창수 열사를 잃었던 당시, 박성호 부지회장의 나이는 서른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그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울고 싸우고 붙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50대가 된 지금, 회사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젊을 때보다 작다는 것을 느끼며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성호 부지회장은 회사가 유가족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회유해서 열사의 뜻을 꺾으려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유족들에게 앞으로는 유족이 고민하거나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최강서 동지가 남긴 뜻을 향해 투쟁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박부지회장은 이날 분향소 설치를 시작으로 회사에게 교섭 요구를 하고,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요구할 것이며, 그래도 안한다면 목숨 걸고 이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힌다.
“우리 신랑도 너무 걱정스러웠고요. 무서웠고. 염려했던 부분들을 다들 갖고 계시니까. 이 분들이 앞으로 죄인 아닌 죄인처럼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고.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오전 집단상담에 참여했던 가족대책위원회 대표 홍미애 씨는 첫날 이후로는 슬픔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열사가 못다한 한을 풀어줘서 잘 보내주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보이고, 그걸 해야할 것 같다고 했다. 또, 그녀는 조합원들이 다들 불쌍하고 아픈 사람들이고, 옆에서 같이 했던 사람을 보내는 아픔을 아는 사람들인데, 죄인 취급을 받는 게 너무 안타깝고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 12월 29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 추모집회 |
한진중공업의 최후를 두 눈 부릅뜨고 볼 것입니다
이날 저녁 추모집회에서 마지막 발언을 한 차해도 지회장은 집단상담이 끝나고 회사 앞에 있는 천막농성장에 와서 현수막을 걸고 빈소를 만들면서 한 번 더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고 했다. 과연 자신이 이 회사와 동지들을 떠나고, 열사들을 버리고 자신 혼자 편하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얼핏 들었단다.
▲ 12월 29일, 한진중공업 앞 추모집회에서 발언중인 한진중공업지회 차해도 지회장 |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쳤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저는 조남호 회장 보다 오래 살아야겠습니다. 조남호 회장이 천수를 누리고 행복하게 죽는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 치면서 죽는지 저는 끝까지 지켜볼 것입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의 최후를 두 눈 똑똑히 부릅뜨고 볼 것입니다 저는 이 회사 한진중공업에서 옛날의 영광을 다시 보진 못 할 거라고 봅니다.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진중공업의 몰락과 조남호의 죽음을 제 눈으로 볼 때까지 저는 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상복을 벗었습니다. 이제 열사에게 미안하고 유족에게 죄스런 마음을 갖기보다는 최강서 열사의 뜻을 받들어서 투쟁하는 길만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고 남겨진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태가 해결되고 장례절차가 진행된다면 저는 또 다시 상복을 입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후 장례절차가 진행되지 않으면 저는 상복을 입지 않겠습니다.”
▲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본관 입구에 마련된 故 최강서 열사 분향소 |
차해도 지회장이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 열사들을 기리면서 함께 생활해나가겠다는 내용으로 발언을 마무리한다. 참가자 모두가 함께 <파업가>를 부르면서 집회가 마무리된다.
“앞사람 엉덩이 밖에 기억이 안 납니다. 진짜 딴 거 보고 갈수 있는 게 없고, 앞사람 엉덩이만 쳐다보고 쭉 따라가는 수밖에 없고예. 안 그러면 혼자 한다 그랬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겁니다.” -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희망자전거>(2011년 7월, <민중의소리> 제작)에서 故 최강서 열사 인터뷰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