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은 공약으로 제시했던 보편복지의 프레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 국민들에게 국가복지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데 일정부분 성공했다. 최근 ‘과잉복지는 국민을 게으르게 한다’는 이데올로기나 ‘중부담-중복지’와 같은 프레임은 수구보수 세력의 이전 복지담론으로의 회귀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복지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되, 국가의 재정 및 제도적 책임은 최소화하는 것으로 자본과 수구보수세력의 이해가 충실히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박근혜 정권이 국가재정을 내세워 파괴해 온 국가복지 프레임과 국민을 분할하고 분절시키는 복지전략의 실체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계급복지에 대해 재고해 보자.
국가재정과 보수의 파괴적 복지프레임
박근혜 정부는 인수위 시기부터 대선공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은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내세워 보편주의 대신 선별주의로 선회한다. 보편과 선별은 복지급여를 제공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보편주의와 선별주의의 관계는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의 불평등을 제고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선별이 적합하고, 불평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편이 더 우수하다. 즉 빈곤층의 빈곤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선별방식으로 적극적인 소득보장을 해야만 하고, 시민들의 빈곤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위험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교육, 의료, 연금 등과 같은 보편주의적인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어야 한다.
기초연금은 한국 노인의 보편적이고 심각한 빈곤에 긴급하게 대처할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와 더불어 공적연금의 낮은 급여 수준 등이 고려되어 말 그대로 ‘기초’라는 보편성이 채택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상위 30% 노인과 국민연금 장기가입 노인들을 분리했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이건희에게 기초연금은 필요 없다는 논리로 무상급식 논란에서 제기했던 논리와 동일하다. 보편복지를 막는 가장 중요한 주체는 재벌가가 된 것이다. 이건희 일가는 끊임없이 한국의 보편복지 확대를 막는 구체적인 실례로 등장한다. 그리고 국가재정의 건전성을 내세운다. 얼핏 이러한 보수의 논리는 합당해 보이지만, 다른 이면을 보면 국가의 재정 수입구조는 그대로 둔 채 지출 구조만을 통제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희 일가가 문제가 된다면 자본과 고자산가들에게 더 많은 조세를 부과해서 국가의 재정수입을 확대하면 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애초에 자본과 고자산가들에 대한 더 많은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이자 이들만이 자신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분할을 통해 선별주의가 합리적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왔다.
정권의 국가재정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소득보장과 관련된 일련의 복지 제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대표적으로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에 대한 정권의 태도는 일관되게 ‘재정 안전성’에 맞춰져 있다. 공무원연금은 미래에 예상되는 누적적자를 내세워 개혁의 필요성을 항변한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재정이 흑자인 제도에 대해서는 관대한 급여가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건강보험에서 누적흑자로 12조원 발생했지만, 건강보험료는 올랐고 보장성은 떨어졌다. 더욱이 국민연금은 향후 40년 이후에 소진될 기금의 안전성을 내세워 급여를 깎고, 보험료를 올려왔다. 이러한 국민연금의 개혁 결과 공적연금으로 최저생계비 조차도 보장받기 어려운 수준으로 제도가 축소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이러한 국민연금의 개혁을 내세워 공무원연금 개혁의 절박성을 국민에게 강조했고, 국민연금 가입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해 왔다. 공적연금을 매개로 국민으로부터 공무원을 분리시켰고, ‘과도한 공무원 연금’의 프레임으로 공적연금 개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잠정적으로 국가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끊임없이 국민의 양보와 희생으로만 가능하다는 보수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다. 동시에 이들은 공적연금으로 부족한 노후소득을 사적연금시장에서 각자 해결할 수 있다면서 시장활성화 정책을 풀어 놓았다. 더불어 현재 국민연금공단에서 운용하고 있는 500조에 이르는 기금을 공단으로부터 분리해서 정부가 직접 관리하겠다고 시도 중이다. 제도의 축소로 국민의 삶이야 어찌 됐든 오로지 ‘돈’에만 몰두하는 정권의 이해는 공적연금 전반에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재정위기를 내세워 제도를 축소하고, 공적 제도가 축소되어 부족한 욕구는 국민 각자가 시장에서 구매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달성한다는 일차원적인 논리가 강화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국가재정의 책임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의 축소를 사적 시장으로 이전시킴으로서 공공복지의 시장화를 통한 자본의 이윤증식이 가능하도록 정책적인 여건과 환경을 조성시키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계급 분할 통치
기초연금 제도화를 매개로 노인상위 30% VS 노인하위 70%, 노인세대 VS 미래세대, 국민연금 장기가입자 VS 국민연금 미수급자로 세대 내, 세대 간 분화가 촉발되었다. 공적 연금의 재정안정화를 내세운 정권의 논리는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기 위해 현세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입되거나 개혁이 시도되고 있는 제도를 보면, 결국 미래세대는 현재보다 적은 공적연금의 급여를 받게 된다. 즉 박근혜 정권이 미래세대를 걱정해서 재정절감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기보다는 공적 재원으로 재분배되는 규모를 축소시켜서, 임금외비용(사회보험료와 조세)에 대한 자본과 고자산자들의 책임을 최소화시켰다. 자본과 고자산자들에 대한 무증세 계획은 흔들림 없이 관철되고 있고, 줄어드는 세수를 메우기 위해 결국 중산층으로부터 편법을 동원해서 증세가 진행되고 있다. 단적인 파동이 지난 1월 연말정산을 통해 드러났고, 이러한 경향은 담배값 인상과 같은 각종 서민증세에서 추진되어 왔다.
통계청의 '2014년 가계동향'에 따르면, 소득 중간층의 세금 증가율이 고소득층의 여섯 배가 넘었다. 소득 중간층(소득분위 3분위) 가계의 지난해 월평균 경상조세(근로소득세, 재산세, 사업소득세 등 가계에 부과되는 직접세) 지출액은 8만3천385원으로 2013년의 7만187원보다 18.8% 증가했다. 반면, 소득 최상위(5분위)의 가계 경상조세 지출액은 지난해 월평균 38만332원으로 전년도 36만9천123원보다 단 3.0% 늘었다. 박근혜 정권은 최상위 소득층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대한 조세정책을 유지하는 반면, 중산층 이하 계층에게는 더 많은 과세를 위한 각종 편법을 동원했다. 누구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인지 짐작 가능한 지점이다.
2014년도에만 10조 이상의 세수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도 정부는 근본원인에 대한 진단 대신 이것이 마치 과잉복지의 결과인 것처럼 책임을 회피하고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다. 지속적으로 제기된 무상보육의 재정책임 주체(중앙 VS 지방)와 최근 불거진 어린이집 아동 학대에 대한 원인을 모두 무상보육으로 전가시키고 있다. 재정책임에 대해 여러모로 대안이 마련되지 않는 시점에서 주부들이 무상보육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시설에 맡기게 됨으로써 재정부족과 아동학대가 발생했다는 논리다. 심지어 복지부 장관은 직장맘과 전업주부를 분리시키는 분할 통치전략을 내세웠다가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기본적인 노선변화 없이 이를 계기로 무상보육의 틀을 흔들고 있다.
초저출산 국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 분담과 소득지원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삶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의 입장에서도 노동력 확보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인 투자가 요구된다. 또한 초고령화를 앞두고 노령사회의 부양비용을 낮추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은 출산율 제고에 있다. 이러한 절박함에서 박근혜 정권도 국가가 0세부터 5세까지 아이들을 키워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권은 사회적 필요의 절박성은 외면하면서 재정책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시장화된 보육공급체계에서 안전하게 아이들이 놀고, 교사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는 무관심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세월호 참사이후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해경을 해체했듯이, 박근혜 정권은 복지에 문제가 생기면 보편복지를 없애는 방향으로, 이를 위해서 국민들을 분할하고 계층화하는 통치전술로서 복지정책을 구현했다. 국민들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노동자와 서민들이 문제의 원인인 자본과 국가를 적대화하지 못하도록 눈가리개를 씌우려고 해왔다. 박근혜 정권은 ‘보편복지를 하려고 했지만, 재정이 더 필요하고, 더 필요한 재정을 위해 증세를 해야 하지만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복지는 엄격하게 국민들 중 선별해서 나눠주는 것이 합리적인 복지’라는 프레임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보편복지에 필요한 재정을 노동자와 서민들은 조세와 사회보험료로 이미 부담하고 있고, 실제 박근혜 정권 하에 서민증세는 진행되었지만, 정부는 끊임없이 시민들의 복지권을 공격하면서 축소시켜 왔다. 실상을 매일매일 체험하는 국민들을 더 이상 속아 줄 여력도 남아 있지 않다.
국가 책임복지가 곧 계급복지
국가복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재정확대는 필수불가결하다. 문제는 누가 재정책임을 더 져야할 것인가이다. 최근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과 관련된 논의에서 일부 진보진영에서는 더 많은 소득자가 더 많은 보험료를 내는 것이 정의롭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러나 개편안의 핵심을 보면, 국가와 자본의 부담률은 전혀 증가하지 않는다. 현재 구조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가 8:2의 재정책임을 담당하고 있다. 이 중 직장가입자는 5:5로 고용주와 노동자가 분담하고 있다. 이걸 고려하면 건강보험 재정부담은 ‘고용주: 노동자: 지역가입자=4:4:2’로 부담하고 있다. 개편안에서는 형평성을 고려해서 지역가입자의 부담을 줄이고, 줄어든 부담부분을 노동자 부담으로 전환하고, 부족한 재정을 보험료 인상을 통해 메꿀 계획으로 보인다. 고소득 노동자가 더 많이 부담하는 것이 사회정의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고소득 노동자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자산소유자와 자본의 부담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편안은 국세청이 보유한 소득자료를 근거로 부과할 수 있는 소득에 대해서만 더 많은 보험료 부과를 계획했다. 이 계획은 자칫 연말정산 파동과 같은 논란을 야기할 소지가 상당하다.
노동소득은 증가하지 않는 반면 각종 명목으로 노동자와 서민은 사회적 비용을 책임지고 있다. 보편복지의 욕구는 개인의 노동소득으로 감당하기 힘든 교육 및 양육, 주택, 의료, 노후에 대한 대책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실함은 무상시리즈 복지운동으로 대중화되었다. 사실 무상이란 용어를 복지 앞에 사용하는 국가는 흔하지 않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고, 법적 효력을 강제하기 어려운 용어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법적’ 또는 ‘책임’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보수들은 무상 자체의 용어를 마치 국민들이 공짜나 바라는 집단으로 폄하하면서 시민들의 당연한 사회권을 무시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무상이란 용어의 역사성은 국가복지를 강화시켜 국민들이 필요시 각자의 소득수준과 관련 없이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체계를 상정하며 발전해 온 것이다. 여기서 국가복지 강화의 핵심은 자본과 고자산자들에 대한 재정책임 강화였다. 보편복지로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보수세력이 무상복지에 흠집을 내고, 보편복지를 파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에 자본과 수구보수세력의 복지정치 및 복지담론과는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계급복지의 전략이 필요하다. 자본과 수구보수세력이 지배한 국가세력은 그들의 경제적 이해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영속시키기 위해 불법, 편법, 거짓에 이르기까지 매우 계급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노동계급이 노동자 계급 내부의 재분배 형평성을 제고하는 수준으로 복지정치를 추진한다면, 결국 자본과 국가의 이해와 다름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1차 분배의 불균형성이 심화되면서 재분배를 위한 노동계급 내부의 파이자체도 축소되었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국가복지를 위해서는 복지비용의 책임주체를 자본과 국가에게 묻고, 이것이 정책과 제도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실천이 일상으로부터 다시 촉발되어 확산되어야 한다. 이것은 몇몇 브레인을 통해서 혹은 몇 가지 정책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 아닌 민중권력의 확대를 통해서 가능한 매우 생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국가 책임복지의 강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자본과 고자산가들에 대한 재정책임 요구는 계급복지의 현주소로 유의미하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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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질라라비 139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