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올해로 79세다. 노인 세대가 그렇듯 일제강점기에 나셨고 8·15 광복, 한국 전쟁 등 굴곡진 한국 역사를 관통해 온 분이다. 어린 시절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했으나 가난 탓에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생계를 위해 일을 했다. 열여덟 나이로 일하고 있던 쌀집 주인 아들에게 강간당하고 이미 기혼이었던 그의 첩으로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한 번도 입 밖으로 ‘시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지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생각해보니 남편에겐 이런 느낌을 단 한 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남편에겐 그저 ‘그리운 아버지’일 뿐이므로.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축적해 큰 마당 네 개를 가진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시내 한복판에 가지고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부자였던 만큼 어머니는 당시 흔치 않았던,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식’으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생일상이 차려진 어느 아침 식탁에서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막고 갑자기 우신 적이 있다. 막내인 (나의) 남편을 낳았을 때,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과 함께 시댁을 떠나 멀리 살고 있어 미역은커녕 쌀도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남편’은 어디서 구했는지 미역국을 올린 밥상을 내밀더라고 했다. 내 남편이 여섯 살, 아주버님이 열한 살, 시누이가 열세 살 되던 해 ‘어머니의 남편’은 뇌종양으로 두 번의 수술 끝에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의 ‘시집’은 곧바로 어머니와 어린아이들 셋을 쫓아냈더랬다. 당시, 호적상 아주버님이 집안의 장남이었고 막대한 재산의 1순위 상속자였지만 집 한 칸은 물론 생활비 한 푼 쥐여 주지 않은 채였다. 그 후 어머니와 가족들은 경제적인 문제로 친척 집을 전전하며 약 6년을 흩어져 살아야 했고 어머니는 노점부터 시작해 하숙으로 세 자녀를 키우셨다. 그들은 그렇게 장성해 일가를 이루고 산다.
여기까지가 시어머니와 남편 생애의 간략한 이야기다. 나와 ‘친정엄마’의 생애가 이 못지않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나 글로 풀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과 다르게, 이들의 생애를 글로 쓰는 동안 약간의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감정이입이 되거나 심란하지 않다. 이 말은 곧 함께 산 10년 넘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들은 각각 서로에게 타자란 의미일 것이다. 이 말은 거꾸로, 어머니와 나의 남편은 생애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고유한 영역에 매여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갈등은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연유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결국 함께 겪고 경험한 생애에 대한 기억, 체화된 생활 습관 때문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지만, 자수성가해 7~80평대 아파트에 살던 아주버님이 IMF 사태로 사업 실패를 겪었다. 그 때문에 신혼 초 나와 남편이 살던 집이 통째로 사업 밑천으로 들어갔고, 얼마 전에는 지금 사는 집을 담보로 빚을 낸 사실을 알기도 했다. 남편은 아주버님의 부채, 신용 보증으로 엮여 최하위 신용등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물론 다른 ‘가족’과 얽히고 싶지 않아 한때 ‘공식적 결혼’을 거부했으나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산다. 시어머니는 나의 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나를 대신 해 아이들을 키우셨고 살림도 했다.
신혼 초 15평의 작은 살림집에 나와 남편에게 한마디 말씀도 없이 장롱과 쌀통, 식탁을 배달한 게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상의 없이’ 숟가락부터 온갖 주방용품과 살림살이를 들였다. 아마, 빨래하지 말아 달라고 수천 번은 더 말씀드렸던 것 같다.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는 검게 빨아야 하며 어린아이들 옷은 따로 빨아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빨래는 모아서 빨아야 하고, 섬유 유연제는 비용 면에서나 환경 면에서 겨울철에 정전기가 방지될 정도만 소량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많든 적든 모든 빨래를 함께 넣어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 분이고 사시사철 섬유 유연제를 들이붓는다. 입이 짧은 큰 아이에게 아무거나 많이 먹으라며 하루에 열 개 나 되는 요구르트를 먹이고, 애가 밥을 안 먹는다는 타령을 달고 사셨다. 늘 넉넉히 밥이 담긴 전기밥통은 24시간 꽂혀 있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는 물음에 어머니는 “누구라도 배가 고프면, 언제라도 따듯한 밥을 먹어야 하니까”라고 답했다.
식탁에는 언제나 최소 세 가지 다른 종류의 김치(오늘 나의 식탁에는 배추김치, 열무김치, 무청으로 만든 김치, 오이소박이가 있다)와 반찬이 수라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깔린다. 전날 만든 반찬이 있어도 매일 아침 다시 만들어야 하므로 주방에는 늘 두세 가지의 먹다 남긴 국과 찌개가 있다. 물론 이 중 3분의 1은 늘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향한다. 주방 한쪽에는 각기 다른 라면이 늘 있어야 하고 냉장고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가장 많이, 자주하는 말은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면 가방을 열어 통신문이 있는지 확인하고, 숙제와 학습지 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으신다. 나와 남편이 있든 없든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깨알같이 챙긴다. 아침마다 아이들이 입을 옷을 놓고 나와 남편, 어머니 사이에 삼파전은 일상이었다.
직장생활과 노동조합 활동을 병행하는 나를 보고 동료 활동가들은 어머니가 아이들과 살림을 봐 준다는 걸 알고 부러운 시선으로 “어쩐지…”하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런 순간마다, 긴 설명이 필요한 탓에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자 이제, 나에게 어떤 질타와 질문들이 돌아올 것인가. ‘배가 불렀네. 복 받은 줄 알아라.’ 라거나 ‘그게 싫고 스트레스라면 왜 협상하거나 개선하지 않는가?’라는 두 가지 반응일 거다. 나는 결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산다. 착하게 사는 건 나의 신조가 아닐뿐더러 직장 상사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든 해야 할 말이나 행동이 있다면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왜, 15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런 갈등 하나를 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앞서 시어머니의 생애를 간략히 기록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당장 현실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사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감정, 삶의 태도가 맞부딪히기 때문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생애를 생각하면 비록 타자의 자리일망정 안타깝기 그지없다. 관계의 빈곤함, 허기짐, 공포로부터 비롯되고 지속하고 있는 저 삶의 역사를 내가 어찌할 것인가. 이것을 중간에서 조정하지 못하는 나의 남편은 마마보이일까? 아니다. 독립해서 마땅히 자기 앞가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나와 남편이 다르지 않다. 주변의 가족과 더불어 잘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돌아서 나가는 시어머니 발뒤꿈치에 맥주병을 던졌다는 한 친구의 고백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아무리 말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어머니에게 이제 독립하시라고 채근해야 할까? 이제 제발 각자 살자고 큰 집에 관계의 절멸을 선언해야 하나? 질 낮은 사회보장 정책과 불안정한 고용 상황은 어떤가. 사람 사이의 관계와 공간이 나날이 세분되고 고립되어 가는 것은 긍정적인 일인가? 공동체성과 관계는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 않지만, 여기에 가족이 첨가되는 순간, 다른 이해관계를 파생한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가족 사이에 독립과 관계 맺음, 물리적, 심리적 공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교육받지 않았고, 살아오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사는 사람을 지켜본 일도 많아서다. 그러므로 나는 포기하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된 협상을 벌이는 것도 아니면서 오늘도 그 경계에서 부단히 흔들린다. 삶은 매일, 매시간 끝도 없이 반복되는 매우 구체적인 일상이기 때문이다.
[워커스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