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후기근대성 테제가 상대적으로 그 경계가 확고해 보이는, 하루에 얼마 움직이지도 않는 인간 신체에 적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저자 멜린다 쿠퍼는 70년대 후반 자본과 제국이 맞이한 위기에서부터 생명공학의 형태로 신체를 ‘말랑하게’ 만드는 시도가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이 시도는 과학 담론의 변화와 경제 구조의 변화, 세계 정치 지형의 변화와 맞물려있다. 거칠게 나누자면 저자는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주로 4장과 5장 일부(과학담론), 1장과 5장 일부(경제구조), 2장과 3장(세계정치)에서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생명공학-신자유주의 전환에 대한 미국 대중의 이중적 운동을 6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생명정치의 선행요인을 밝히는 4장에서 저자는 장기이식과 조직공학을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과학담론의 변화를 짚는다. 과거의 개념인 장기이식이 삶 혹은 신체를 가사 상태(state of suspended animation)로 유지한다면 조직공학은 재생의학으로서 이를 끊임없는 자기 변환상태(state of perpetual self-transformation)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재생의학의 등장 이후 더 이상 신체의 변화는 억제되지 않으며 오히려 권장된다. 5장은 4장의 연속선상에서 재생의학과 생식의학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짚으면서 특히 줄기세포의 사례를 통해 세포의 지속적 성장, 즉 변화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긍정적 관점을 획득하는 데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변화는 곧 불확실성이며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대체로 다양한 신뢰(trust, confidence)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이 신뢰, 더욱 정확히는 상품으로서의 신뢰(credit)가 산업자본주의와 극명히 구분되는 금융자본주의의 대상이다. 저자가 5장에서 지적하듯 변화된 과학담론은 인간의 생명을 재발명, 재생산, 재평가하도록 이끌었으며 그 주체들에게는 특허권 등의 형태로 신뢰성이 부여되었다. 그들의 생산물은 (가끔은 아직 생산되지도 않은) 의료 서비스로서 이는 선물 상품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로 거래된다. 이 거래의 확장된 사회적 형태는 감염병 대유행이나 생물테러 등의 재난에 대한 보험 상품의 매매이다. 5장 일부를 인용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명이 상품화(commoditification)되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영구한 변화로서 생명의 복제본인 잉여가 금융화(financialization)되는 것이다. 1장에서는 이와 같은 사례들에 내재된 의미를 한 문장으로 “신자유주의와 생명공학 산업은 공통적으로 미래의 예상적 재창조를 통해 산업 생산의 끝으로 상정된 성장의 생태계적, 경제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고 서술한다.
[출처: 출판사 갈무리] |
그렇다면 금융화의 결과는 무엇인가? 미래의 예상적 재창조는 생명을 현재 이상의 무엇을 포함한 개념으로 재구성하는데 이렇게 발생한 잉여로서의 생명은 늘 실제 생명의 황폐화와 함께한다. 저자는 황폐화의 좋은 사례로 서구사회에서 감염질환의 재유행을 들고 있다. 잉여 금융화 시기의 국가는 더 이상 근대 국가 초기 식의 보건복지에, 곧 생명 자체에 관심이 없다. 국가의 무관심을 3장 일부를 빌어 표현하자면 신자유주의 국가는 재해 혹은 위험에 대해 늘 경각심을 갖출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재난에 대한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는다. 국가나 자본의 이기심이 발현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신체를 개별화하고 생명에서 잉여를 창출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국가가 위험과 생명을 과거 복지국가와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풀링(pooling)된 위험 확률은 이제 사회연대를 통해 공동책임이 되지 않고 각 부분으로 조각나 금융 시장에서 판매된다.
한편으로 잉여로서의 생명 창출과 생명 황폐화의 처소는 반드시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에이즈의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에이즈가 만성질환으로 관리 대상이 된 서구사회와 달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에이즈가 무서운 감염질환으로 생명 안보의 주적이다. 에이즈가 남아프리카에서 만연한 원인의 일부는, 2장에서 지적하듯 남아공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채권 관계로 얽혀 미국이라는 제국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에도 있다. 이들은 제네릭의 생산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는 문제에까지 강대국의 영향을 받는다.
생명 자체가 아닌 생명의 잉여분을 금융 시장에서 거래하는 방식으로 여러 난제들을 교묘히 피해 자본이 축적을 지속하고자 한다는 저자의 아이디어는 기발하며 흥미롭다. 저자의 주장이 매우 새로우며 또 일부 급진적인 까닭에 몇몇 인용된 정치경제이론에 대한 의문-많은 경우 사납기로 악명 높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내부의 사상투쟁으로 이어지는-을 차치하고라도 본 작은 곳곳에 의문을 던질 법한 부분이 많다. 그 논쟁적 성격을 이 책의 단점으로 여기느냐 장점으로 여기느냐는 독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본 저서를 접했는지에 따라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평가하(거나 혹은 구입하)기 앞서 몇 가지 고려해 볼만한 지점들이 있다.
첫째,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좋은 의미에서 보편적이며 나쁘게 말해 구태의연하다. 지난 십 수 년간 미국 의료사회학계에서 의료화나 생명정치와 관련해 출판된 논문 중 많은 수가 미국을 중심으로 에이즈, 생물테러, 줄기세포, 생명공학 및 학계의 변화, pro-choice와 pro-life 운동을 다루며 이는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레퍼런스가 누적되어 있다는 것은 저자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때로는 더 많은 근거를 제공하는 논지들이 이미 학계에 제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작에 의의가 있다면 이 사건들을 각각 따로 기술하거나 미시적으로 바라보는데 그쳤던 여타 수많은 작품들과 달리 쿠퍼는 과감히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 과감함 덕분에 저자는 생명공학이 신자유주의의 영향 하에 있다는 소극적 상관관계를 넘어서 필연적으로 같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심지어는 신자유주의 자본의 꿈이 물질화된 것이 바로 생명공학이라는 도발적인 그리고 인과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보건학적으로 이는 의미가 큰 주장이기도 한데 보건의료영역이 단지 자본주의에 부수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의 토대 중 하나일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에서 다루는 생의료화 개념은 더 검증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의료화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책의 주제상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생의료화 개념이 주목하는 지점은 정확히 이 책의 주제와 겹치며 일부 주장에서는 경합하는 관계에 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생의료화 개념을 제시한 아델 클라크(Adele E. Clarke)는 주저 <생의학화(Biomedicalization)>에서 생의료화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제시하는데, 현실적으로 가장 유용한 설명은 기존의 생의학이 주로 치료를 목적으로하는 한편 생명공학이 후생체의료 강화(enhancement)에 초점을 둔다는 것이다. 강화는 인간의 한계라 여겨진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써, 사회 각 영역을 이러한 생각과 제도가 잠식하는 것이 생의료화이다. 클라크는 생의료화를 신자유주의가 아닌 근대 기획과 연관시키는데 그는 근대의 승리가 곧 생의료화라고 본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어 상술하자면 “길가메시 프로젝트”의 근대적 형태가 바로 생체의학이며 종교가 가지고 있었던 영생과 죽음에 대한 관심을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받아 안지 못한 대신 과학기술의 형태로 구체화한 것이 생의료화라 할 수 있다.
쿠퍼의 경우에도 잉여라는 표현을 통해 이 강화된 부분 혹은 늘어난 잠재성의 (정치경제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다만 그가 잉여가 국제 레짐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새로이 창출된 것이라 여긴다는 점, 위상수학과 재생의학 이전에는 신체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담론이 득세했다고 분석하며 잉여의 담론적 근거가 신체 변화에 있다고 본다는 점 등은 일부는 진위가 의심스러우며 또 일부 클라크의 주장과도 부딪친다. 클라크 역시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고 그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더욱 아니나, 적어도 그의 주장이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충분히 개진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셋째, 물론 남아공과 성노동자 등 다양한 지역 및 직군이 등장하기는 하나 이 책에서 미국이라는 지역을 벗어난, 상대적으로 엘리트들의 전유물인 과학기술 담론을 벗어난 생의료화의 다양한 풍경이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이를 굳이 꼬집는 것은 생체의료라는 미국의 지배담론이 세계의 지배적 담론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구체적인 표현 양상의 차이가 저자의 기대보다도 훨씬 크리라 예상되기에 그렇다. 한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풍경은 상대적으로 큰 일체감과 연속성이 있는 미국이나 남아공 혹은 중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을 빌려오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한 편에서는 조사결과 의료전문직 신뢰가 70%를 상회하는 근대 초기의 의사-환자 관계 양상이 나타나는 한편, 청와대 안에서는 대통령이 미용적 강화를 위한 각종 주사를 맞고 강남의 유명 병원 원장 일가가 효과도 불분명한 제대혈 주사를 맞는다. 여전히 황우석의 연구를 지지하는 대중이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가임기 여성 지도를 발표하는 국가가 있는 한편으로, 각종 종편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 주제를 건강식이 차지하고 누구나 한 번쯤 헬스의 유혹에 빠진다. 종로의 침구사와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가 공존하며 자녀 건강을 위한 셧다운제와 의료관광 정책이 함께 제시된다.
소위 ‘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집계되는 건강결과만 살펴봐도, 극명한 건강 수준 향상을 이룩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신자유주의 이후에도 계속해서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을 눈에 띄게 향상시켜왔다. 이것이 이 수많은 국가들이 모두 중심부 국가임을 뜻하거나 생의료화가 진행되지 않았음을 혹은 신자유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거나 긍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잉여 창출 기제나 생체의료가 있음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국가가 자본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있고 특히 보건의료영역에서 이러한 자율성의 크기는 더욱 클 수 있음을 직시하고 있지 않다. 당장 신자유주의 중심 국가인 영국의 보건의료체계(NHS)가 신자유주의적인지조차 판단하기 모호한 것이 보건의료영역의 특징이다. 보건의료는 사회에서 탈배태 시키기에 너무 깊이 묻어 들어가 있다. 대중의 삶은 분명 자본이 군침 흘릴만한 큰 파이이지만, 제 아무리 그것이 삶 자체가 아닌 삶의 복제로서 잉여분에 불과하더라도 집어삼키기에 그리 만만한 크기는 아닌 것이다.
넷째, 에필로그에서 그리고 작중 곳곳에서 저자가 주지하듯 거시적인 구조의 변동은 다양한 주체들의 기대 및 반발과 연관된다. 국가와 자본의 움직임을 다룰 때는 대중의 이중적 운동을 충분히 다룰 필요가 있고 여기에는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편으로 국가와 자본의 주장을 지지하고자 하는 흐름 또한 포함된다. 본 저서의 6장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그런 점에서 조금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나 판단된다. 이는 의료화 혹은 생의료화 개념 자체가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최근 여성주의 관점에서 (생)의료화를 연구한 학자들은 신체의 (생)의료화 과정을 여성들이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의료화의 흐름을 일부 강화하고 있으며, 이런 구분 전략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님을 밝히고 있다. ADHD 치료제를 공부 잘 하는 약이라며 자식에게 맞혔으면 하는 학부모들과 자신의 장래희망이 ‘성형미인’임을 밝히는 학생들 역시 생의료화의 직간접적인 지지자들이다. 이처럼 저자가 어떤 대중적 욕망과 운동들이 구조 안에 있는지를 더욱 폭넓게 다뤘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있다.
정리하자면 저자가 잉여라고 부르는 것의 뒷면에는 인간의 오래된 꿈인 영생, 무한한 시간에 대한 열망이 있다. 또한 잉여의 뒷면에는 개인의 신체를 강화함으로써 이 시간을 정말 노동에서 벗어나 “잉여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계급상승에 대한 욕망과 과시욕으로서 베블런식의 유한(leisure)도 존재한다. 저자는 잉여라는 단어를 통해 각 개별 신체가 지닌 변화의 잠재성과 그 실현으로서 미래라는 시간이 어떻게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금융상품으로 바뀌었는지를 성공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그가 쓴 잉여라는 개념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와 어떻게 다르다거나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는 류의 오래된 반박들로는 꺾이지 않을 업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체의료가 인간의 무한과 유한에 대한 오래된 꿈을 실현시켜주겠다는 약속으로 지원군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 오래된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운동이 있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이 운동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선행하는 무언가이자 기술 유토피아의 정신인 것은 아닐까?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야말로 사실 생의료화의 본질인 것은 아닐까? 이는 저자와 본 저서의 한계라기보다는 다른 장소에서 또다시 던져봐야 할 질문들일 것이다. 생의료화와 신자유주의의 속도를 어느 정도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