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과 처벌을 거부한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서울 도심에서 낙태죄 폐지 요구하는 집회 및 행진 진행돼


이르면 4월 초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소송 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서울 도심에서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가 열렸다. 궂은 날씨에도 1천 여명 가량의 참가자들이 모여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권리’를 요구했다.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23개 여성 및 인권 단체 등으로 이루어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주관한 ‘카운트다운!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 집회가 열렸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낙태죄 위헌소송 판결을 앞두고 헌법재판소에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하고, 낙태죄 폐지 이후의 변화를 위한 요구들을 알리기 위해 집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국가가 인구를 줄이기 위해 ‘강제 낙태’와 불임시술을 강요하다 다시 저출산 해소라는 명목으로 임신 중지하는 여성을 비난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기만적인 행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낙태죄를 폐지할 것이며,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또 낙태죄 폐지 이후 새롭게 필요한 조건들을 설명하며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되는 사회 △포괄적 성교육을 보장하고 피임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된 사회 △약물적 유산유도제를 도입하고 여성건강권이 보장되는 사회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전면 개정 △낙인과 차별을 해소하고 모두의 재생산권이 보장되는 세계 등을 주장했다.

특히,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약물 허용과 고가로 책정된 수술에 대한 보험급여화 요구가 눈에 띄었다.

김민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가는 “약물을 통한 임신중지가 수술보다 훨씬 안전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약물을 처방받을 수 없다. 이 약물이 필요한 여성들은 해외 NGO를 통해 약을 구하고 초조하게 몇 주를 기다리거나 브로커를 통해 출처도 알 수 없는 약을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제대로 된 복약 설명도 없이 복용해야 했다”라며 “약물은 여러 나라에서 그 효과와 안전성이 검증됐다. 저렴하고 안전한 임신중지와 여성 건강 향상을 위해 그동안 못 들어온 임신중지 약물 한시라도 빨리 허용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김 활동가는 또한 “임신중지 가격을 의료기관이 전적으로 결정하는 비보험 체계에서는 고가의 임신중지 비용이 형성되고, 이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차별이 된다”라며 “임신중지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급여화 돼야 한다”라고도 요구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역시 선언문을 통해 “대학병원과 공공의료기관은 앞장서서 안전한 임신중지와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며, 국가는 최신지견의 의료기술에 대한 의료인 교육을 제도화하고, 약물적 유산유도제를 지금 당장 도입하고, 안전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약품처방과 시술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장애인, 청소년들이 더욱 위험한 임신중지를 겪게 되는 실태 역시 이야기됐다.

라일락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는 과거 청소년 시기 어렵게 임신중지를 경험한 사례를 소개하며 현재의 임신중지 시스템은 청소년을 보호한다면서도 결국 청소년 건강권을 중대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라일락 활동가는 “수많은 산부인과를 전전했지만 청소년은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며 수술을 해주는 병원이 없었다. 결국 스무살이었던 친구에게 신분증을 빌려 수술을 해야했는데 이 친구가 없었다면 수술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시간이 지체돼 더 위험한 수술을 받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라일락 활동가는 “임신중지를 선택할 때 필요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는 것이 아닌 국가와 전문가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받고 임신중절 방식과 병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은 “우생학적 모자보건법은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국가가 만든 법으로 국가는 장애인의 재생산 권리를 통제해왔다”라며 “사회는 장애인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성적 실천에 필요한 지원을 무시하고 있다. 성적 착취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권리, 상황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장애여성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사무국장은 “여기모인 우리들은 더 넓은 토론의 장을 열어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며 “(임신중지 관련) 허락과 처벌을 거부한다”라고 외쳤다.

한 시간여의 집회를 마친 후 참가자들은 행진에 나섰다. 광화문광장, 경복궁 앞 삼거리, 안국역 사거리를 지나 다시 광화문으로 되돌아오는 코스였다. 행진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낙인과 차별을 해소하고 모두의 재생산권이 보장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해산했다.

한편, 낙태죄 위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헌재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의견들이 속속 전달되고 있다. 지난 17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출산은 여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인데도 낙태죄는 경제·사회적 사안에 관해 공권력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라며 “"오랜 기간 여성을 옭아맨 낙태죄 조항이 폐지돼 여성이 기본권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도록 헌재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지난 27일엔 유엔의 '여성차별 문제에 관한 실무그룹'에서 한국의 형법상의 낙태죄가 여성의 임신중지를 범죄화하고, 이로 인해, 그리고 그 자체로 다양한 여성차별의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임신중지의 비범죄화와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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