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은 10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미투운동과 함께 한 1년, 변화와 전망…민주노총 조합원 의식조사 발표&조직문화 혁신 토론회’를 열고 노조 간부 및 조합원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 및 면접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지난해 11월부터 추진한 설문조사에는 민주노총 15개 가맹조직, 지역본부 직가입 노조를 포함해 총 380개 사업장의 노조 간부들과 여성 조합원 766명, 남성 조합원 1,118명이 참여했다. 면접조사엔 노동조합 간부 9명이 참여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날 설문조사와 면접조사 분석을 통해, 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서 가장 필요한 정책과제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조사 참여자들은 지난 1년간 일터 내 성폭력 사건 처리에서 사건의 규명은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지만, 2차 피해를 막고 피해자 지원과 가해자 처벌을 적절히 해 나갈 수 있는 절차와 제도를 갖추는 일을 앞으로의 과제라고 지적했다”라며 “일회적인 사건처리를 넘어 조직 내 성희롱·성폭력을 예방하고 처리하기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구성원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실효성을 높여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노동조합 간부 9명을 면접조사한 결과는 미투 이후 긍정적, 부정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담은 의미있는 조사로 꼽혔다.우선 주목할 만한 흐름은 미투 이후 공기업, 공공기관에서의 변화였다.공기업의 경우 경영평가와 CEO평가 등을 통해 성희롱 예방 노력을 지표화하고 기업의 성과평가에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절차의 개선에 따라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증가한 것도 유의미한 변화다.
면접에 참여한 A공기업노조 여성간부는 “(성폭력 처리 절차 및 예방 교육 등의) 절차들이 만들어지면서 실질적으로 직원들이 구제를 요구하는 빈도수가 많아졌다”라며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구제조치들이 실제 추진되면서 예전처럼 ‘문제를 제기해도 돌아올 게 불이익밖에 없다’라는 식의 인식은 많이 덜어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미투’가 ‘성희롱’보다 훨씬 강한 의미로 해석되면서, 공무원 조직의 분위기와 회식문화를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과장님, 이거 성희롱이에요”보다 “과장님, 이거 미투예요”가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일상적 관계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됐고, 회식문화 역시 2차를 가는 경우가 줄었다.
이처럼 전면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부분적인 변화를 겪은 사업장의 경우, 주로 노동조합이 나서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대응해왔다는 특징을 보였다. 학교, 병원, 금융산업 등의 세 가맹 노조는 평소 젠더 이슈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여성위원회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들이다.
이날 토론회에선 사무금융노조의 성희롱 예방 교육 컨텐츠가 주목받기도 했다. 사무금융노조에선 동성 간 성희롱이 심했는데 노조에서 성희롱 금지 스티커를 배포했고, 직원들에게 성희롱을 많이 하는 사람 책상에 붙이게 한 결과 많은 스티커를 받은 직원이 이를 자연스럽게 문제로 인지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례를 소개했던 E사무금융노조 여성간부는 “한 사람 책상에 10개가 붙어있는 것을 봤다. 자연스럽게 ‘너 조심해라, 너 성희롱 한대잖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백래쉬는 어디에도 있다
미투가 일터에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여성혐오 댓글, 펜스룰 등의 백래쉬가 다양해지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신 교수는 “성폭력 사건이 적절히 처리되고 성희롱 예방교육이 강화된 사업장이 있는가 하면, 성폭력에 대한 문제인식은 커졌지만 이를 구실로 여성을 배제하거나 심지어 혐오 행위가 늘어난 사업장도 있다. 또 여전히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어렵고 성차별적 제도와 문화도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는 사업장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투 이후 전면적 변화를 겪고 있는 공기업, 공공기관의 경우 한쪽으론 여성혐오 댓글이 증가하고, 성폭력 범죄를 인정하지 않거나, 노동조합 남성간부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반작용을 겪고 있었다. 공기업 직원들만 이용하는 사내 게시판에 여성들이 쉽게 산다며 ‘꿀을 빤다’는 표현이나, 페미니즘을 비하해 ‘꿀빠니즘’ 등의 일베 용어들이 올라오곤 한다는 것이다.
A공기업노조 여성간부는 “성희롱·성추행을 방지하기 위한 징계와 절차들이 엄격해지며 의식적으로 (인식이) 향상되기보다는 오히려 왜곡되고 혐오성 의식들이 강화되는 것 같다”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여성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불편하다’는 남성들도 생겨났다. 문제는 단지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여자들 때문에 남자들이 피해를 본다’라고 하는 피해의식이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궁극적으로 성희롱 사건을 덮거나 사건에 대한 대응을 왜곡시킬 수 있는 ‘남성연대’로까지 나아간다.
신 교수에 따르면 “남성들의 심정적 연줄망 속에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한 남성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가해자적 위치로 역전되고 성폭력 가해자는 동정의 대상으로 바뀐다”.
C전교조 여성간부는 “피해자에게 자꾸 봐달라고 유도한다. 저 사람 저렇게 되면 어떻게 먹고 살아.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인데 왜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고민하고 그 얘길 왜 피해자한테하는 건지 모르겠다”라며 남성연대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브라더 문화’, 미투도 건들지 못했다
미투 이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었던 사업장인 건설, 금속, 식품의 경우 △성차별적 직무분리와 직급구조 △펜스룰 △브라더 문화가 이미 강고했다.
면접조사에 참여한 건설, 자동차, P제과 사업장은 공통적으로 직무와 직급이 성에 의해 분리돼 있고, 여성은 낮은 직급에서 저임금으로 일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건설, 자동차의 경우 대다수의 노동자가 남성이며 여성은 대부분 사무직이거나 소수만 현장에서 일하는 반면 P제과의 경우 제조기사의 대다수가 여성이고, 소수의 남성이 관리직으로 일한다.
P제과노조 여성간부는 미투도 건드리지 못한 사업장의 특징으로 ‘브라더 문화’를 꼽았다. 이 간부에 따르면 P제과는 20대의 여성 제조기사들을 30-40대 남성 관리직이 통제하는 노무관리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P제과 여성간부는 “남자들끼리의 모임이 많다. 관리자들은 ‘너 언제까지 그 위치에 있을래?’ ‘너도 과장인데 이렇게 해야지, 따라와라’라는 식으로 모임을 따로 만든다. 그러면서 여자들한테는 여자들이 하기 좋은 직업이라며, 승진 생각말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남자만 진급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이걸 ‘브라더 문화’라고 부른다”라고 설명했다.
건설 분야는 여성을 채용에서 배제하고, 회식자리에서 배제하는 일들이 최근 더 강해졌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여성 배제가) 최근에 좀 강화됐다. 두려움이 있으니까. 남성 입장에서는 아예 안 보는 게 좋다는 식이다”라며 “최근 제가 소속돼 있는 회사도 채용 공고를 냈는데 여성은 아예 면접대상으로도 안 뽑았다”라고 밝혔다.
민주노총을 향한 제언도
신 교수는 “노동조합 내에서도 ‘남성연대’라고 할 만한 의식이 깔려있고 많은 일터에서 ‘브라더 문화’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라며 “민주 노동운동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적인’ 것이 되려면 그동안 배제되고 분리되고 주변화되어 온 여성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첫번째 작업은 일터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을 ‘듣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신 교수는 또한 “비정규직 여성들은 일터 성폭력에 훨씬 더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기에 이들의 일터 내 안전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도 노동조합의 과제에 포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남성 노조 간부들이 먼저 성차별적인 사고와 행동에 대해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됐다.
한편 이번 토론회의 좌장 역할을 맡은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번 조사는 한국사회 전반적인 노동현장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지 민주노총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